사람을 만나다보면, 특히 배우를 만나다보면 ‘공식적인’ 언어와 ‘일상의’ 언어를 따로 준비해두는 것 같은 사람들이 있다. 스크린이나 TV에서 점잖던 사람이 일상적인 대화를 나누면 지나치게 경박해진다든지, 너무 재미있을 것 같던 사람이 실생활은 그렇지 않다며 너무 무게를 잡는다든지…. 하지만 차태현(25)은 ‘얼굴을 맞대고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는 사실을 ‘TV프로그램을 보고 있다’는 사실과 혼동하게 할 만큼 ‘보여지는 모습’과 ‘가지고 있는 모습’이 똑같은 배우다. “이미지 때문에 하고 싶은 거 못하고 그러는 거 보면 꼭 저렇게 살아야 하나 싶어요. 싫어하는 건 안 해요. 그런 거 시키면 얼굴에 티가 나요. 그래서 가끔 건방져보인다는 소리도 듣는 거고. 연기를 할 때도 그 역할 빠져들기보다 늘 역할을 내 몸에 맞는 옷처럼 만들기 위해 애를 써요. 제 연기를 자연스럽게 느꼈다면 그 때문이겠죠. 하지만 역으로 그게 제 한계이기도 해요.”
브라운관은 이미 이 스물다섯 청년에게는 익숙한 놀이터다. 95년 탤런트선발대회에 합격한 이후 일일연속극부터 주말드라마까지, 여자 쫓아다니는 대학생부터 착한 손자까지 안해 본 역할이 없다. ‘열광적’ 팬은 없었지만 “누구 하나 싫어하지 않았다”고 자부하는, “원래 다 그렇게 시작해야만 되는 줄 알았다”고 회상하는 조연 시절을 끝내게 해준 건 98년 <해바라기>였다. 어처구니없는 소리만 해대는 정신병 환자 순영과 결국엔 사랑에 빠지는 실수투성이 신경외과 레지던트 허재봉으로 사람들은 오랫동안 자신의 주변을 서성이던 ‘차태현’이란 이름을 입 속으로 되뇌기 시작했다. <해바라기> 이후 차태현에겐 <햇빛속으로> <줄리엣의 남자>로 이어지는 행운의 기회가 찾아들었다. 그리고 그는 올해 들어 한참을 준비했던 두건의 ‘사고’를 쳤다. 하나는 고등학교 축제 때 잠시 맛본 무대의 감흥을 잊지 못해 오매불망 배우보다 더 하고 싶어했던 가수로 데뷔한 것이고, 하나는 <엽기적인 그녀>라는 영화로 스크린으로 통하는 문을 살며시 연 것이다.
한창 촬영중인 <엽기적인 그녀>는 PC통신에 연재되어 인기를 끌었던 동명의 소설을 영화로 옮긴 것. 순진한 대학생 견우가 어느 날 밤 술취한 ‘그녀’를 만나게 되면서 일어나는 일들을 맞춤법의 법망(?)에서 완전히 벗어난채로 들려주는 엽기적이지만 사랑스런 소품이다. “그간 시나리오가 들어와도 주로 깡패, 고등학생 역이었어요. 게다가 <줄리엣의 남자> 끝내고 TV에서 보여줄 수 있는 건 다 보여줬다, 그런 생각이 들더라구. 그때 적절히 <엽기적인 그녀> 시나리오를 봤어요. 한번에 다 읽었어요. 왜? 재미있더라구요.” 자칫 즐겁게, 별다른 욕심없이 사는 젊은이려니 하는 순간 그가 털어놓는 고민은 의외다. “사실 다른 배우를 보면서 긴장하는 법이 별로 없거든요. 그런데 <공동경비구역 JSA>의 하균이형(신하균)을 보는데, 순간 떨리는 거예요. 아, 큰일났구나. 저렇게 돼야 되는데, 걱정이 밀려오데요.” 과장된 표정이나 구르고 넘어지는 법 없이도 ‘쿨’하게 ‘욱길’ 줄 아는 용띠 쾌남아(快男兒), 반말을 해도 건방져보이지 않고, 욕을 해도 천박해보이지 않는 축복받은 사각지대에 사는 차태현. 혹자는 이제 무방비상태로 열릴는지 모르는 그의 사각지대를 염려하지만, 걱정마시라. 차태현은 생각보다 단단한 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