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키 카우리스마키(44)는 낯선 이름만큼 서먹한 얘기로 관객들을 불편하게 만드는 핀란드 감독이다. 다섯 해 전쯤 <레닌그라드 카우보이 미국에 가다>란 영화로 한국에 상륙했지만 그 진면목을 알리기도 전에 잊혀졌다. 21일 서울 광화문 아트큐브에서 개봉하는 <성냥공장 소녀>와 <레닌그라드…>는 카우리스마키 자신이 걸작과 졸작으로 꼽은 1989년작들로 세계 영화계가 일찌감치 알아 본 이 컬트 감독이 지닌 `겨자맛'을 강렬하게 풍긴다.
<성냥공장 소녀>는 과묵한 영화다. 비쩍 마른 몸, 밋밋한 얼굴, 바삭거리듯 물기 없는 모습을 한 소녀(카티 오우티넨)는 말이 없다. 말을 잃었다. 어머니와 의붓 아비도 텔레비전에서 눈을 떼지 못하거나 이미 잠들어 있다. 소녀는 무거운 짐짝처럼 그에게 얹혀져있는 부모를 위해 해가 뜨면 성냥공장으로 가고 해가 지면 집으로 돌아온다. 지리멸렬한 일상이 꾸역꾸역 계속되다 기껏 나오는 대사가 “밥먹자”나 “맥주 한 잔”이다. 오히려 뉴스에서 긴급하게 보도되는 중국 천안문 사태 화면이 더 영화같다.
소녀는 고무같이 질긴 현실을 견디고 또 견딘다. 무지막지한 사막을 낙타처럼 건너던 소녀가 어느날 문득 멈춰선다. 우연처럼 찾아온 사랑이 무시받고, 자신이 혐오스러워 견딜 수 없을 만큼 벽에 내몰렸을 때, 소녀는 묵묵한 인내가 조롱받는 세상을 저주하고 복수에 나선다. 피 한 방울 튀지 않는 살인 또한 건조하기 짝이 없다. 소녀는 무표정하게 부모가 먹을 밥과 애인이 마실 술잔에 쥐약을 탄다. 술집에서 지분거리는 사내에게도 쥐약 한 방을 먹인다. 비통하면서 우습다. 소녀가 터뜨리는 분노조차 슬프고 우스꽝스럽다. 대사 대신 흐르는 음악이 노래한다. “모든 것을 주고 실망할 때에는 더욱 힘든 일이지… 너의 차가운 시선과 얼음 같은 웃음이 사랑을 죽여 버렸으니까.” 86년작 <천국의 그림자>, 88년작 <아리엘>과 함께 <성냥공장…>이 `프롤레타리아 삼부작'이란 평가를 받는 것은 아마도 소녀가 대표하고 있는 `노동자 계급'을 향한 카우리스마키의 지지와 이해, 소외된 계층에 대한 동지애 때문일 것이다.
사람 죽이는 기계적 자본주의 사회를 향해 던지는 카우리스마키의 풍자는 <레닌그라드…>에서 더 졸깃해진다. 딱따구리 머리에 괴상한 옷차림을 한 록밴드 `레닌그라드 카우보이'가 미국에 온다. “아메리카에서는 뭐든 팔 수 있다”는 흥행업자 꼬임에 넘어간 핀란드 툰드라 촌놈들이 고생 끝에 낙을 얻는 곳은 멕시코다. 황량한 들판을 달리는 이들 얼치기 카우보이 뒤를 쫓는 카메라는 `로드 무비'풍이지만 흥겨운 음악 속에 비벼넣은 음산한 개그와 코미디는 쌉싸름하게 보는 이의 코를 자극한다. 87년작 <햄릿, 장사를 떠나다>에서 카우리스마키가 던진 한마디는 이랬다. “터느냐 마느냐, 그것이 문제로다.”정재숙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