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칸의 민족주의자 밀로셰비치가 전쟁범죄자로 낙인찍힌 일을 패권주의의 승리라고 말할 생각이 적어도 내게는 조금도 없다. 무자비한 인종청소, 그 과정에서 인종개량의 이름으로 자행된 강간, 그건 어떤 말로도 변명할 수 없다. 오늘 과거를 반성한다한들, 그 잘못을 되풀이하는 바보짓에서 완전히 자유로워지지는 않는다. 그러나 그나마 회복한 ‘건강한 정신’으로 세상과 삶을 일으켜 세우려 안간힘을 쓰는 동안, 우리는 한뼘씩 사람답게 사는 영역을 확장시켜나갈 수 있다.
제3회 여성영화제가 ‘쟁점’이라는 부문을 따로 만들어놓고, ‘포화 속의 여성들’을 초청해들였다. 그 ‘여성’들은 때로 남편과 아들을 전쟁에서 잃어버린 아내거나 어머니이다. 직접 싸움터에서 목숨을 잃지는 않았지만, 사랑하는 사람을 잃어버린 사람의 슬픔과 비탄은 전쟁의 비극을 정서적으로 환기시키는데 더없이 적절하다. 전쟁은 물론 그러한 상실만 강요하지는 않는다. 아이다처럼, 환향녀들처럼 남자들이 패배하면 그들의 여자들은 승리자의 전리품이 되어버리는 가부장제도의 오랜 악습은 아직도 남아 있다. 그림자를 먼나라의 밀로셰비치에서나 찾을 필요도 없다. 황석영의 <낙타누깔> 같은 단편소설을 다시 펼쳐보면 족하다. ‘포화 속의 여성들’ 초청작 가운데도 한국 종군위안부의 소식을 듣고, 오래도록 덮어두었던 자신의 과거를 다시 대면하게 된 흰 피부의 할머니 이야기, 오스트레일리아판 <낮은 목소리>가 들어 있다.
<낮은 목소리>의 그 할머니들이 국가의 배상과 사과를 요구하러 간 일본법정에서 패배하고 돌아온 지금, 여성영화제의 쟁점토론에 참가하는 독일의 한 여성영화가 유난히 기다려진다. 그 여성감독은 나치의 범죄는 당시 독일 국민들의 동조 아래 이루어졌다는 사실을, ‘나’의 어머니도 그 동조자였다는 사실을 파고들고, 파고들어 발견해낸다. 침묵하던 다수에게 면죄부를 주기 십상인 단선적 히틀러 비판을 넘어선 철저한 자기반성. 그것이 사회적 유전자에 각인될 때, 그만큼 그들은 성숙할 것이다. 종군위안부 부분을 삭제하고 국가주의를 합리화한 일본 우익의 역사교과서가 그 나라 정부의 검인정을 통과한 사태가 염려스러운 것은 그 반대되는 이유에서다. 우리 내부를 향한 의문도 생겨난다. 왜 그랬을까, 그 역사책의 등장을 한국의 한 기자가 처음 알렸을 때, 왜 모두들 침묵하고 있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