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요한 곳에 누군가 있다는 게 얼마나 소중한지, 없어지지 않으면 잘 모른다. 돈도 못 벌고 빛도 못 보는 자리라면 특히 그렇다. 한국독립영화협회
사무국장이자 인디포럼 프로그래머인 조영각(33)씨 같은 사람은 그래서 눈에 잘 안 띈다. 뭔가 의미있고 보람있는 행사를 할 때도 이런 인물은
무대 뒤에서 뭔가를 꾸미느라 정신이 없다. 최근 그가 준비한 독립영화회고전도 만만한 일이 아니다. 서울영화집단의 <판놀이 아리랑>에서 장산곶매의
<파업전야>까지 10년도 넘은 영화를 일일이 수배해서 프린트를 구하고 비디오 출시를 계획하는, 자질구레하지만 의미있는 일을 그는 조용히
해왔다. 한해 독립영화의 성과를 망라하는 영화제 인디포럼이나 매달 여는 상영회도 그런 일이고 협회 차원에서 추진중인 미디어센터 관련 실무진행도
그의 몫이다. 애써 단편영화를 만들어놓고도 보여줄 기회를 찾지 못하는 사람들에게 조영각씨처럼 자기 일을 대신 해주는 사람이 있다는 건 참으로
다행스럽다.
감독도 제작자도 아니지만 그는 독립영화인이다. 비주류영화, 비주류영화인에 대한 애정이 그를 독립영화의 마당발로 키워왔다. 지난해 조영각씨는
황당한 일을 겪어 때아닌 유명세를 타기도 했다. 이른바 ‘쓰봉사건’이 그것. 영진위 주최 세미나에서 반바지를 입고 나타났다 원로영화인 한분에게
날벼락 같은 꾸지람을 들은 사건이다. 김지운 감독은 조영각씨의 반바지 차림을 옹호하는 글을 <씨네21>에 싣기도 했는데 어쨌든 그 일이
있고나서 사람들은 ‘조영각’ 하면 ‘반바지’부터 떠올린다. ‘독립영화’와 ‘반바지’, 어쩐지 어울리는 궁합이다. 자기가 믿는 바를 따르고
스스로 즐거울 수 있는 일을 하자면 때로 주류가 못마땅한 눈빛을 보내는 일도 할 필요가 있다.
<파업전야> 등 80년대부터 나온 쟁쟁한 독립영화들을 모아 회고전을 여는데 어떻게 기획된 것인가.
지난해부터 준비했다. 처음엔 쉽게 할 수 있을 거라는 생각에서 올린 기획안이었는데 막상 준비해보니까 장난이 아니다. 10년 전 프린트도
행방이 묘연하고 제대로 보관된 영화도 많지 않았다. 60년대 한국영화 프린트가 없다고 충무로 영화인들 욕할 일이 아니더라. 작품 출처 찾는
데만 두세달 걸리기도 했다. <파업전야>도 장동홍 감독이 프린트를 갖고 있어서 틀 수 있게 됐다. 서명수 감독의 단편 <문>은 83년 이후
영상자료원에서 한번도 외부반출이 된 적 없고 <인재를 위하여>는 프린트는 없고 테이프만 구할 수 있었다. 행사를 기획한 건 우리 과거를
알아줬으면 하는, 소박한 바람에서 출발했다. 독립영화가 뭔지 혼란스러운 때에 과거를 돌아보면 지침이 있을 거 같고. 주위에 물어봐도 제목만
알았지 본 적은 없다는 영화가 상당했다. 영화제 끝나면 비디오로도 출시할 생각이다. 영진위에서 2800만원 지원금 받아서 영화제를 하고
비디오 내고 책자도 만들고. 독립영화 하는 사람들 아니면 그렇게 못할 거다.
최근 문화부 장관과 면담을 했다던데 어떤 이야기가 오갔나.
장관이 문화계 인사를 차례로 만나는 중인데 독립영화 하는 사람들도 만나보겠다고 해서 주선된 자리였다. 김동원, 류승완, 이효인 등
7명이 장관과 편하게 이야기를 했다. 독립영화에 대한 직접 지원보다 인프라에 투자하는 게 필요하다는 얘길 했다. 미디어센터와 독립영화전용관
건립문제를 꺼냈는데 일단 미디어센터 만드는 예산은 잡혔지만 아직 전용관을 위한 예산은 어렵다는 얘길 들었다. 기회가 되면 독립영화를 좀
봐달라고 했더니 <죽거나 혹은 나쁘거나>를 아주 재미있게 봤다며 그러겠다고 했다.
98년 한국독립영화협회가 생긴 뒤로 주력하고 있는 사업이 미디어센터와 독립영화전용관인데 어떻게 나온 안인지 궁금하다. 진행이 얼마나
되고 있는지도.
지난해 초부터 계속 준비했는데 최근에 미디어센터 건립을 위한 예산 24억원이 배정됐다. 처음엔 독립영화전용관이 들어가 있는 미디어센터를
구상했는데 한꺼번에 추진이 안 돼서 극장과 별개로 미디어센터부터 만들 참이다. 미디어센터는 말하자면 독립영화를 제작, 지원하는 전초기지다.
독립영화 만드는 사람은 많이 있는데 다 개인작업이라 안정적인 제작시스템이 없다. 한두편 만들면 충무로로 가거나 영화를 그만두거나 하는 실정인데
기자재가 있고 제작지원이 되는 센터가 생기면 독립영화 작업도 꾸준히 할 수 있으리라 본다. 영화교육기관으로서도 효과적이다. 일반시민을 대상으로
워크숍을 하거나 기자재 대여를 하면 누구나 손쉽게 영화제작에 접할 수 있을 것이다. 독립영화 배급을 위한 네트워크 구축도 염두에 두고 있다.
지방 순회상영을 기획하고 정기영화제를 여는 일 등을 한다고 보면 된다.
지금도 독립영화 상영회는 계속하고 있다. ‘독립영화, 관객을 만나다’라는 명칭으로. 독립영화전용관은 이런 영화제를 상설화하자는 얘기인가.
작품을 만든 사람 입장에선 정기적인 상영이 반드시 필요하다. 만들어놓고 보여주지 못하는 상황이 오랫동안 문제였다. ‘독립영화,관객을 만나다’는 정기상영의 필요성 때문에 협회가 생기면서 계속해온 행사지만 전용관이 생기면 언제나 독립영화를 볼 수 있을 것이다. ‘독립영화,
관객을 만나다’는 아트선재센터가 공동주최하면서 매달 한번씩 하는 행사인데 관객동원은 잘 안 된다. 독립영화를 접할 다른 기회가 많아진 탓도
있지만 매달 하면서 적극적인 홍보를 하기 어려워진 점도 있을 것 같다. 올 초에 협회에 배급팀을 만들어 영화제 전담을 맡겼다. 혼자 이것저것
다하는 것보다 조직적으로 일하는 게 필요하다는 판단에서다.
인디포럼 프로그래머 일도 계속하고 있는데 올해 준비는 어떻게 하고 있나.
올해 인디포럼은 6월2일부터 10일까지 아트선재센터에서 할 계획이다. 작품을 출품하는 감독들이 작가회의라는 이름으로 모여 주최하는
행사라 프로그래머라고 말하기도 어렵다. 실무적인 일을 하고 있는 건데 올해 슬로건은 ‘영토확장’이라고 정했다. ‘영토확장’이라는 말을 듣고
우습다고 말하는 사람들도 있던데 내가 보기에 지금은 독립영화의 영역이 넓어지고 있는 시기다. 각자 지향점이 다르지만 그만큼 스펙트럼이 다양해지고
있는 셈이다.
어떻게 이쪽 일을 하게 됐나? 인디포럼을 하기 전엔 문화학교 서울에서 일한 걸로 알고 있는데.
93년 말에 처음 문화학교 서울을 찾았다. 영화보러 갔다가 일까지 하게 된 경우다. 88년 아주대 심리학과에 입학해 95년에 졸업했다.
원래 영화를 좋아했는데 내가 문화학교 서울에 처음 갔을 때는 시네마테크 활동을 시작하려 할 때였다. 내부에 제작팀을 만들고 제작준비도 하면서
영화상영회를 했는데 그때부터 제작보다는 글쓰고 기획하는 데 관심이 있었다. 회원들과 함께 화질 안 좋은 비디오를 졸면서 보고 공부하고 자료집
내고 그런 일을 했다. 그때만 해도 문화학교 서울에서 영화제 하면 굉장히 잘됐다. 다들 영화보는 데 굶주려 있는데 희귀한 영화를 볼 수
있는 곳이 없었으니까.
인디포럼을 시작한 계기는 뭔가. 영화제 프로그래머를 계획하고 시작한 건 아닌 것 같은데.
당시 서울단편영화제를 보면서 자극이 됐다. 대기업이 하는 영화제말고 우리 스스로 준비하고 만드는 영화제가 있어야 하는 것 아닌가
싶더라. 김성숙, 김윤태, 임창재 등 단편영화 만드는 사람들과 뜻이 맞아서 문화학교 서울에서 실무를 맡아 영화제를 만들었다. 서울단편영화제는
많아봐야 15편 정도밖에 못 트니까 다른 많은 영화를 보여줄 기회가 있어야겠다는 판단이 들었다. 이제는 규모가 커져서 신청하는 영화를 모두
틀 수 없는 상황이 됐다. 98년부터 공모작품 중 걸러서 영화제 상영프로그램을 짜게 됐는데 사실 비판도 있었다. 애초 취지에 상영기회가
없는 모든 독립영화를 보여주자는 게 있었으니까. 하지만 돈을 받고 트는 영화제라는 점에서 아무 영화나 트는 건 안 된다고 판단했다. 기본은
된 영화를 보여줘야 한다. 대신 선정기준에 이런 건 있다. 도발적이거나 실험적인 영화에 점수를 많이 준다는.
문화학교 서울에서 일하다 인디포럼을 만들게 되고 그러다 독립영화협회 사무국장을 맡고 계속 같은 방향으로 가고 있는데 인생행로가 제대로
풀리고 있다고 생각하나.
운이 좋았다. 하는 일마다 나름대로 성과가 있었고. 독립영화협회가 처음 생기고 일을 맡았을 때는 뭐 별로 하는 일이 있겠나 싶었는데
막상 시작하니까 정신없다. 비상근으로 가끔 나오면 되겠지 싶었는데 매일 나가서 종일 일해도 힘들다. 그래도 많이 커졌다. 사단법인이 되고
영화제를 비롯한 사업도 많고. 계간지 <독립영화> 편집부를 포함해 상근하는 사람만 7명이다. 인건비는 2사람 몫이지만. 협회가 내 발목을
잡고 있는 거 아닌가 하는 때도 있다. 하지만 덕분에 열심히 살고 있다.
돈도 안 되고 크게 주목받는 일도 아닌데 계속하게 되는 이유는 무엇인가.
다 돈 되는 영화 하면 재미없지 않을까. 정치적으로 발언하고 싶어서일 수도 있고 그냥 개인이 자기 좋아서 만드는 영화일 수도 있지만
그렇게 마음대로 만든 영화들이 있는 게 좋다. 그리고 그런 영화를 볼 수 있는 환경을 만드는 게 즐겁다. 처음부터 충무로 가서 일할 생각은
없었으니까. 그건 나한테 맞지도 않고. 물론 협회라는 데가 조직의 성격상 좀 지겹다. 내가 하고 싶은 일만 하는 게 아니라 위에서 결정한
데로 해야 하는 일이 많다. 개인적인 일을 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어서 지난해 말에 사무국장 그만두겠다고 한 적도 있는데 이런 일을 할 만한
사람도 없다. 독립영화 하는 사람들이 대부분 연출자이고 또다른 사람이 하는 거 보면 내가 답답해서 못 참는다.
이지상 감독의 <둘 하나 섹스> 만들 때는 프로듀서 일도 했는데.
준비가 안 된 상황에서 일한 거라 아쉬움이 많다. 이지상 감독이 작업하는데 문화학교 서울 사무실을 좀 빌려주고 그런 정도라고 생각했다가
막상 닥쳐보니 이것저것 많은 일을 하게 됐다. 독립영화 보다보면 제대로 된 프로듀서가 붙어서 작업했으면 훨씬 좋았을 텐데 하는 생각이 들
때가 많다. 그런 차원에서 일을 배운 셈인데 앞으로도 기회가 주어진다면 기획이나 프로듀서로 참여하고 싶다.
올해 인디포럼 슬로건을 ‘영토확장’이라 했다지만 독립영화의 입지가 줄어들고 있다는 생각은 안 드나. 예전처럼 정치적인 이슈가 있는
것도 아니고.
독립영화가 더 많이 나오고 있고 제작환경도 좋아졌다. 예전엔 정말 자기 돈으로 한두편 만들고 그냥 끝이었는데 이젠 맘만 먹으면 계속
작업할 수 있다. 제작지원프로그램이 많아졌고 제작에 접근하기도 쉽다. 영화를 취미로 하든, 직업으로 하든, 정치적인 운동으로 하든 그 모든
걸 포괄할 수 있는 상황이다. 그런 면에서 독립영화의 입지가 넓어진 것이고 충무로에서 작업하다 돌아와서 다시 독립영화를 만들 수도 있게
됐다. 매년 독립영화의 정체성에 대해 이러저러한 이야기를 하지만 올해는 정말 그걸 되짚어볼 생각이다. 무엇이 독립영화인지 자문할 필요가
있다. 편가르기가 아니라 뭔가 다른 영화를 만드는 방법이라는 점에서 말이다.
글 남동철 기자 namdong@hani.co.kr
사진 이혜정 기자 hyejung@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