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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다은의 리코더] 통과하는 영화, <지난 여름>

<지난 여름>

홍천군 화촌면의 풍경과 농민들의 정경을 지나 그곳 복지센터에서 일하는 민우와 그의 가족을 비추는 <지난 여름>의 도입부는 한적하다. 그렇다고 그 장면들의 심정이 하염없이 편안하기만 한 건 아니다. ‘가뭄’이라는 소제목이 일러주듯 메마른 땅은 비를 간절히 기다리는 중이고, 텔레비전 뉴스가 전하듯 이 마을도 여느 농촌처럼 고령화 문제를 겪고 있으며, 복지센터 변기를 부여잡고 구토하는 민우(김민혁)의 모습이 보여주듯 청년은 이곳에서 자주 권태롭다. 변화의 여지가 요원해 보이는 도입부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민우의 아버지가 막힌 배수구를 손으로 뚫어 메마른 논으로 들여보내는 물줄기처럼 ‘흐른다’. 그저 평온해 보여도 실은 각자의 자리에서 고전하는 세계의 숏들 사이에 물길을 찾아 ‘흐름’을 찍어보려 한다는 인상을 준다. 그 물길의 속성은 서사적 개연성과는 거의 무관하다. 순환하는 자연의 시간을 반영한다는 설명도 어쩐지 식상하고 미진하게 들린다. <지난 여름>은 관조하는 영화처럼 보이지만, 실은 시도하는 영화에 더 가깝다. 흐름을 시도하는 일, 영화의 물길을 발견하는 일, 그것은 어떻게 가능해지는 걸까.

우선 한 장면에서 시작해보려고 한다. ‘현대수족관’이라고 써진 가게 앞에서 민우는 문틈에 고개를 들이밀고 친구 성훈(김현섭)을 찾는다. 성훈의 부재를 알려주는 누군가의 목소리에 민우가 문을 닫고 발길을 돌린 후, 이 영화에서 가장 의아한 장면 하나가 나온다. 장면의 주인공은 민우도 성훈도 아닌 수족관을 헤엄치는 금붕어들이다. 무려 수족관이 프레임 전체를 메우는데, 그 위로 민우가 왔었다는 소식을 성훈에게 전화로 전하는 이의 음성이 들린다. 사방이 트인 산과 밭, 긴 패닝을 작동시키던 거리의 풍경이 불시에 인공적인 수족관으로 축소된다는 점도 낯설지만, 느리게 이동을 지속하던 이전 장면들의 흐름을 영화가 잠시 멈춰 세워 수족관의 금붕어들을 골똘하게 주시한다는 점에도 눈길이 간다. 이 장면의 시점은 누구의 것일까. 여기서 영화가 고르는 호흡은 무엇을 위한 것일까. 그러한 의문이 채 가시기 전에 금붕어는 금세 다시 등장한다. 민우가 봉지에 담긴 금붕어 한 마리를 방에 들고 와서 작은 어항에 담는 대목에서다. 이전 장면에서 우리는 그가 금붕어를 사는 모습을 보지 못했으므로 그것이 앞서 프레임을 가득 채우던 수족관 장면과 연관된 것인지 알 수 없다. 시간은 선형적이지만 그 시간을 걷는 인물의 동선은 모호하다. 민우의 아버지가 방 청소를 하던 중 어항을 발견하는 모습을 끝으로 금붕어는 다시 출현하지 않고, 금붕어의 죽음은 나중에 아버지의 입을 통해 스치듯 전해진다.

금붕어 하나에 대단한 메시지가 있을 리는 없다. 다만 금붕어 장면들을 구상할 때 감독이 사로잡힌 생각은 곱씹어볼 만하다. “금붕어를 민우의 방에 어떻게 데려다놓을까.” 대상을 한 장소에서 다른 장소로 옮기는 일이 영화의 근본적인 기조를 고심하고 뼈대를 건축하는 문제라면, 그의 말은 장면을 명료한 순서나 인과관계로 엮는 방식이 <지난 여름>의 관심사가 아니라는 점을 분명히 한다. 금붕어가 불쑥 나타난다, 어딘가에 잠시 머문다, 어느새 사라진다. 이 경로는 사건이 아니라 현상으로 다뤄진다. 출현과 퇴장을 이야기로 연결하거나 이미지로 다루는 대신, 통과의 감각을 설명 없이 수용하며 구축하는 일. 이 영화는 통과가 빚어내는 것이 의미가 아니라 작은 진동이며 가시적일 수도, 비가시적일 수도 있을 그 진동의 잔상을 발견하고 환기하는 일이 자신에게 주어진 과제라고 여긴다.

이와 관련해 한 대목을 언급하고 싶다. 실제 마을 주민인 네 남자가 식당 방 한쪽에서 밥을 먹으며 끝날 줄 모르는 가뭄에 관해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 대화의 내용은 무거워도 오랜 관계에서 비롯된 이들의 친밀함과 떠들썩함이 활기차다. 이 생생한 순간은 감독이 카메라를 세워둔 채 이들 곁에서 이런저런 질문들을 던져 먼저 대화를 유도한 뒤, 카메라 뒤로 슬며시 빠져나와 찍은 장면으로 알려져 있다. 다음 숏에는 방 바깥 식탁에서 혼자 냉면을 먹는 노인이 담기는데, 노인 역시 실제 식당 사장의 남편이며, 그 모습 위로 가뭄을 염려하는 네 남자의 목소리가 흐른다. 그때, 화면 중심에 앉은 노인 뒤로 민우와 성훈, 그러니까 이 영화의 픽션을 재현하는 배우들이 식당 문을 열고 등장해 무감하게 프레임을 지나간다. 화면 전경에서 식사를 지속하는 노인의 모습 또한 이에 무심하기만 하다. 민우와 성훈의 밥 먹는 숏이 이어지는 동안에도 앞선 네 남자의 음성은 여전히 들려온다.

<지난 여름>

어디까지가 픽션이고 어디까지가 논픽션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 식당 장면의 운동성과 미묘한 활기를 설명하기에 그 경계를 묻는 물음은 적합하지 않다. 두 계열이 뒤섞인다는 뭉툭한 표현도 썩 내키지 않는다. 각기 다른 공간에 분리되는 세개의 숏은 한 식당 안에서 그저 느슨하게 연결되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영화 내부와 외부, 마을 주민과 배우, 가뭄에 시름 깊은 사람들의 목소리와 같은 계절을 사는 사람들의 얼굴, 다큐멘터리적 면모와 픽션적 요소가 딱히 상대를 의식하거나 곁눈질하지 않으면서도 서로를 통과하며 그 여름, 그 찰나를 공유하므로 세개의 숏은 긴밀한 연속성을 지닌다고 말해도 될 것이다. 계절의 곤경을 걱정하는 음성이 어제와 다름없을 누군가의 식사 시간을 통과하고, 그 평범한 풍경을 허구의 주인공들이 통과하고, 그들의 이야기를 다시 현실 속 가뭄의 목소리가 통과하는, 그리하여 그 저녁이 한 세계를 통과하는 궤적을 기록하고 기억하는 영화. <지난 여름>은 고정된 카메라로 통과의 감각을 설계한다는 점에서 보기보다 야심 차다.

그렇다고 이 영화가 그 감각의 전능함을 믿는 건 아니다. 이 점이 중요하다. 극 중 성훈이 키우는 소들을 축사에서 도축장으로 보내는 날의 장면을 떠올려보자. 성훈이 천으로 가림막을 세우는 동안, 함께 일하는 외국인노동자는 막대기를 휘둘러 소들을 트럭쪽으로 밀어붙인다. 차에 오르지 않으려고 버티는 소들과 소들을 트럭에 태우려는 사람들이 팽팽히 대치하는 이 대목은 감독에 따르면, 카메라에 주어진 마지막 기회로 놓치면 다시는 찍을 수 없었던 실제 상황이다. 이 장면은 그러나 한 호흡으로 찍히지 못한다. 소들이 천과 카메라로 제한된 공간의 압력에 본능적으로 저항하는 순간, 당황한 카메라가 마치 작동을 멈추듯, 장면은 돌연 축사 안을 거니는 소들의 영상으로 바뀐다. 이 인서트 숏을 지나서야 다시 원래의 자리로 돌아온 영화는 마침내 소들이 트럭에 실리는 순간을 포착하는 데 성공한다. 아니, 이것을 성공이라고 부를 수 있을까.

이 대목의 숏 구성은 소의 돌진으로 흐름이 끊긴 장면을 보완하기 위한 선택이었다고 감독은 고백하기도 했다. 그러한 돌발성이 이 지점의 리듬과 성질을 영화 전반과 달라지게 만든 일차적인 원인이겠지만, 눈여겨볼 차이가 있다. 인물들의 목표는 소들을 축사에서 그보다 비좁은 트럭 뒤 칸으로 이동시키는 데 있고, 카메라의 욕망은 이 과정을 프레임 안에 한꺼번에 포괄하는 데 있다. 달리 말해, 현실과 영화 모두 소들을 몰아세워 가두는 일에 몰두하는 셈이다. <지난 여름>이 내내 귀하게 벼리는 ‘통과’의 감각은 이 축사 장면에서만큼은 작동하지 못한다. 불시에 일어난 숏의 단절과 예기치 않은 카메라의 요동은 그 불가능성을 자인하는 영화의 흔들림이기도 할 것이다. 인서트 장면 속, 움직이는 무리 사이로 카메라를 기이하게도 끈질기게 바라보던 소 한 마리의 눈빛이 일찌감치 그 진실을 내면화한 시선처럼 뒤늦게 상기된다. 저 트럭이 향하는 곳, 울타리 밖으로 탈출하지 못한 소들이 이를 최종 목적지, 축사 장면이 귀결될 장소가 어디인지 우리는 명백하게 알고 있다. 영화는 그 사실을 덧칠하지 않는다. 카메라가 소들의 숏을 따라가지 않는 채, 소들과 고군분투하던 두 사람이 밥 먹는 모습으로 이동해 축사에 남을 때, 감독은 되뇌는 것 같다. 통과의 서정을 상상할 수 없는 세계도 있다. 통과할 수 없는 숏도 있다. <지난 여름>은 해도 되는 것과 하면 안되는 것을 가르고 논하는 영화가 아니라, 할 수 있는 것과 할 수 없는 것을 응시하고 자문하는 영화다. 강고한 윤리 같은 것이 아니라, 정직해지려는 노력이 이 세계가 믿으려는 힘이다.

그렇다고 <지난 여름>이 체념하는 영화라고 말해서는 안될 것이다. 통과할 수 없는 숏도 존재한다는 깨달음에 응답하기 위해 이 영화는 허구의 겹을 경유해 자신의 지평을 확장할 수 있는 길을 모색해본다. 민우 할머니의 죽음을 전하는 장면의 구도가 그 고심의 결과일 것이다. 세찬 비가 내리는 날 아침, 논의 물꼬를 트고 집으로 돌아온 민우는 할머니를 깨우러 화면 왼편에 자리한 방으로 들어간다. 얼마 뒤 할머니가 숨을 쉬지 않는다고 말하며 그가 나오는데, 화면 오른편 부엌에서 여느 날처럼 아침 식사를 준비하던 아버지는 그 사실을 확인하고, 전화 통화를 하며 화면을 빠져나간다. 빗소리 속에서 민우가 어두운 방 안에 우두커니 서 있다. 카메라는 방 문턱을 넘지 않으며 내내 한곳에서 거리를 두고 그 광경을 쳐다본다. 인물들은 별다른 감정의 동요 없이 이 순간을 대하며, 죽음이 일어난 방 밖으로 아무도 둘러앉지 않은 밥상이 보인다. 마치 이 집의 공기처럼 언제나 부자와 함께 식사 장면 일부를 이루던 노인이 소리 없이 세상을 떠났다. 이 대목에서 카메라에 담기는 건 그의 영혼이 자신이 죽은 방에서 아들이 차린 밥상을 지나 아마도 한평생 살았을 집 안을 돌아보고 사라지기까지의 시간일 것이다. 영화는 죽음의 이미지에 닿을 수 없어도 죽음이 프레임을, 공간을, 가족을 온전히 통과하는 시간은 묵묵히 기다려줄 수 있다. 한 세계가 소멸하며 안녕을 고하는 마지막 잔상을 화면에 새기므로 이 장면은 더없이 정적으로 보이지만, 실은 그 어떤 숏보다 간절히 운동한다.

장례식이 끝난 후 어느 날, 민우는 어둠이 내려앉은 마루에 앉아 손톱을 깎고 있다. 닭이 우는 소리가 새벽을 알려도 어둠이 계속될 것만 같은 기분이 든다. 그때 별안간 빛이 어둠을 흡수해 세상이 환해진다. 한순간의 변화가 놀랍다. 단숨에 마법처럼 일어난 이 전환은 그러나 어제도 왔을 테고 내일도 찾아올 것이다. 가뭄과 장마가 지났고 금붕어와 소들, 그리고 할머니가 죽었다. 세계의 급격한 출렁임도 이 아침, 민우를 둘러싼 어둠과 빛의 움직임과 결국 다르지 않을 것이다. 한 계절의 숏들 사이에서 근면하게 물길을 내며 한 걸음씩 나아가던 <지난 여름>이 그렇게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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