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아이스너상 수상을 축하한다. 처음 소식을 접했을 때의 소감이 어땠나.
노미네이트된 것만으로도 기뻤는데 막상 수상 소식을 들었을 땐 실감이 잘 나지 않더라. 주위에서 축하한다는 연락을 받은 뒤에야 비로소 체감했다.
- 지난해 <연옥당> 3권이 발간되며 수년의 대장정이 마무리됐다. 초기엔 짧은 단편으로 구상했다고.
처음엔 40페이지 분량의 단편이었다. 내용상으론 1권 첫 에피소드에 해당한다. <연옥당>의 세계관은 그때부터 잡혀 있었는데 하고 싶은 말을 덧붙이다보니 점점 길어졌다.
- 죽음에 관해 다각도로 접근한 작품이다. 남겨진 자는 고인을 애도하고 떠난 이는 장례식 케이크를 통해 남겨진 사람의 마음을 느낄 수 있다. 이승과 저승이 유기적으로 연결된 ‘연옥당’ 세계관을 떠올리게 된 계기가 궁금하다.
직접적인 계기는 외할머니의 장례식이었다. 외할머니에게 배운 많은 것들이 내 작품에 녹아들었을 만큼 외할머니를 좋아했다. 돌아가셨을 때 내 안의 무언가가 떨어져 나간 기분이 들었다. 다른 사람은 전부 살아 있는데 외할머니만 갑자기 사라졌다는 사실을 믿을 수가 없었다. 어린 내가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영역의 일처럼 느껴졌다. 소중한 이를 몇 차례 더 떠나보내면서 죽음은 고인의 사건인 동시에 주변에 넓게 영향을 미치는 일이라는 걸 깨달았다. 연옥당의 주인인 마고에게 이런 내 생각이 많이 반영됐다. <연옥당>을 그릴 때 남겨진 이의 시선, 고인이 죽음에 이르기까지의 기억을 상기하는 과정을 신경 써서 그렸다. 그게 고민을 마지막으로 보내는 의식이기 때문이다. 죽음을 떠올리는 게 행복한 일일 순 없지만 슬프게만 기억하는 것도 당사자가 원하는 바는 아닐 것 같아 너무 어둡게 그리지 않았다.
- 1~3권의 연출 지향점이 다르다는 인상이다. 가령 1권에선 레시피북처럼 느껴질 정도로 디저트 표현에 공을 들였다. 작가 본인이 실제 베이킹을 즐기는 게 아닌가 싶을 정도였다.
일러스트레이터로 커리어를 시작했기 때문에 1권이 일러스트레이션의 문법에 가장 가깝다. 해외 만화를 한창 즐겨 보던 때라 선도 거칠고 굵다. 레시피북이 연상된 건 실제로 내가 자주 참고했기 때문일 것이다. 다만 핫케이크 이상의 뭔가를 만들어본 적은 없다. (웃음) 베이킹 쇼를 좋아해서 넷플릭스에 올라온 베이킹 서바이벌을 거의 전부 찾아봤고 여러 아이디어를 얻었다. 2권의 ‘비눗방울 레몬 파이’ 에피소드에 동그란 설탕 방울을 만드는 기법이 나오는데 예전에 베이킹 쇼를 보며 감명 깊었던지 작업 노트에 여러 번 그려놨더라. 당시의 기억을 반영했다. 3권에 이르러선 만화 자체에 익숙해져 선도 가늘어지고 전달하려는 이야기에 훨씬 집중했다.
- 창작자로서 가장 애정이 가는 에피소드는.
3권의 ‘버터밀크 팬케이크’ 에피소드. 가장 하고 싶었던 이야기고 특히 ‘세나’를 너무 그리고 싶었다. 세나는 개인적인 경험과 학창 시절의 인연이 섞여 들어간 캐릭터다. 만화를 그릴 때 한 걸음 떨어져 그리는 편인데 세나에겐 잘 안됐다. 나도 모르게 세나의 에피소드를 그릴 때 울컥했다. <연옥당>이 죽음을 다룬 작품이 아니었다면 절대 세나에게 그런 마지막을 안기지 않았을 것이다. 이전의 캐릭터들이 동료 같다면 3권의 인물들은 유독 가족처럼 느껴진다.
- <연옥당>을 마무리 짓고 나니 해소되는 부분이 있던가.
작가로서의 한 챕터가 마무리됐다고 느낀다. 만화를 시작할 때 초반의 두 작품은 초등학교 도서관에 꽂혀 있어도 무방한 이야기를 그리는 게 목표였는데 무사히 이뤄냈다.
희망을 버려, 그리고 힘내
- 사회 이슈에 긴밀히 귀를 기울이는 편인가. 성차별, 기후 재난 등의 문제를 작품에 반영하곤 한다.
그런 이슈와 가까이 닿아 있으려 한다. 필연적으로 마음이 불편해질 수밖에 없는 뉴스지만 그런 불편함에서 멀어지면 작품을 하려는 마음에서도 멀어진다.
- <그리고 마녀는 숲으로 갔다>는 기후 위기로 자연이 훼손된 근미래가 배경이다. 앞서 말한 맥락이 바탕이 된 것일까.
어릴 때 시골에서 자라 자연이 내겐 무척 가까운 존재였다. 동식물이 함께하는 풍경을 좋아하고 그것이 내 삶에서 큰 영역을 차지했는데 도시로 오며 많은 것이 바뀌었다. 텃밭에서 나고 자란 것을 먹는 게 당연했는데 도시에선 그 무엇도 출처를 모르겠더라. 환경에 관한 생각을 항상 하다 보니 <그리고 마녀는 숲으로 갔다>를 자연스레 떠올렸다.
- 자연과 밀접하게 연결된 마녀들은 환경이 파괴되자 함께 병들어간다. 사회는 이들을 보호하는 대신 특정 구역에 격리시키지만 그럼에도 마녀들은 타인과 연대하며 자연을 지키기 위해 노력한다. 암울한 상황에서도 일말의 가능성을 포기하지 않는 전개를 산호 작가의 작품에서 자주 만나볼 수 있다.
“희망을 버려 그리고 힘내”라는 영화 <싸이보그지만 괜찮아> 속 대사를 좋아한다. 힘들고 우울할 때 이 대사를 되뇌며 그만 울고 일어나자고 생각하곤 한다. 살면서 이런 상황은 반복될 것이고, 그때마다 거창한 무언가를 꿈꾸는 대신 지금 할 수 있는 걸 하고자 한다. 그런 마음이 작품에 반영되는 것 같다.
- <연옥당>이 디테일한 묘사에 힘을 실었다면 <그리고 마녀는 숲으로 갔다>에선 드넓은 자연을 담아내는 데에 중점을 둔다. 화각이 넓어진 느낌이랄까.
인물에 카메라를 밀착하다 몇 걸음 뒤로 물러나기 시작한 시기다. 더 긴 호흡의 서사를 다루기 위해 배경을 조망하는 것에서 시작해 인물로 초점을 옮겼다.
- 인물의 성정은 유사하다. <연옥당>의 마고, <그리고 마녀는 숲으로 갔다>의 젊은 마녀 산은 남들이 외면하는 요소를 놓치지 않는다.
남들이 무의미하다 여기는 것을 파고드는 게 내게 가장 큰 테마다. 첫 단편 <비와 유영>에는 독립을 꿈꾸는 주인공이 나오는데 그런 꿈을 꾸는 여자아이가 정말 많다. 그런데 세상은 가끔 그런 걸 중요하지 않은 일로 치부한다. 앞으로도 남들이 도외시하는 것을 계속 주제로 다루고 싶다.
- 두 사람 사이의 감정을 다루길 좋아한다고 느꼈다. <연옥당>에서도 대체로 둘의 관계 중심으로 에피소드가 진행되고, <그리고 마녀는 숲으로 갔다>도 산과 초원 두 인물의 관계에서 서사가 확장된다. 단편 <비와 유영>도 유영이 바다에서 인어 ‘비’를 만나며 생기는 일을 다뤘고.
듣고 나니 그런 경향이 있는 것 같다. 군상극도 결국 작은 관계가 모여 다양한 이야기를 보여주는 것이니까. 군상극도 좋아하지만 사소하고 내밀한 관계를 포착하는 게 더 재밌긴 하다.
- 장편 작업을 해보니 전과는 어떻게 다르던가.
<연옥당>은 일단 만화를 시작해보려는 의지가 강했고 그때그때 생각나는 요소를 엮은 것에 가깝다면 <그리고 마녀는 숲으로 갔다>는 정해진 결말을 향해가면서 내가 말하고 싶은 요소를 배치하는 방법을 찾아가는 모험이었다. 두 작품을 하며 만화에 관해 정말 많이 배웠다. <연옥당>을 할 땐 짧은 에피소드 안에 기승전결을 담는 감각을 익혔고 <그리고 마녀는 숲으로 갔다>는 각각의 개인사가 전체 이야기의 흐름에 어떤 영향을 주는지를 다루는 게 어려웠지만 그만큼 재밌었다.
- 학부 시절엔 영화를 전공했다. 본격적으로 만화를 그리고 싶어진 건 언제인가.
그림은 오랜 취미였다. 끈기가 부족해 웬만한 취미는 며칠 해보고 그만두곤 했는데 유일하게 지금까지 해온 게 그림이다. 학부 때 영화과에서 자주 하던 일이 선후배, 동기의 영화의 스토리보드를 그리는 일이었다. 스토리보드가 말풍선이 없는 만화 같아서, 계속 하다 보니 내 이야기를 해볼 수도 있겠다 싶었다. 만화는 혼자서 상상한 세계를 전부 만들어볼 수 있어서 내가 하고 싶은 이야기를 구현하기에 영화보다 더 잘 맞는 수단이었다.
외면하지 않는 마음
- <비와 유영>은 픽션임에도 본인과 여러 교집합이 존재한다. 실제 좋아하는 부산의 여러 장소를 등장시키기도 했는데.
영화를 공부할 때 교수님이 처음 찍는 영화는 자전적인 내용이 될 수밖에 없다고 하셨는데 <비와 유영>을 그리면서 그 말을 체감했다. 부산에서 생활하며 느낀 것, 독립해 제 몫을 제대로 하고 싶다는 바람 등이 담겼다. 인어가 끝까지 곁에 남지 않아 쓸쓸하게 느껴질 수 있지만 그럼에도 유영은 자기 자리를 지키며 원하는 바를 이루려 한다. 내가 부산에 살면서 만난 수많은 여자아이들의 태도였다.
- 이별이 또 하나의 중요한 테마인가.
옆에 있던 이가 갑자기 사라지는 게 사람이 겪는 사건 중 가장 슬픈 일이라고 생각한다. 개인의 힘으론 돌이킬 수 없고, 이별이 반복될 때마다 슬퍼할 순 없기 때문에 견디는 방법을 고민하던 게 작품에도 담겼다.
- 선호하는 캐릭터 상이 있나. 마고, 산, 유영 모두 쇼트커트의 캐릭터인데.
그릴 땐 몰랐는데 나중에 모아놓고 보니 짧은 까만 머리의 캐릭터들이 많더라. 돌이켜보면 여태껏 좋아한 캐릭터 유형도 비슷했다. 처음 좋아한 캐릭터가 <원피스>의 로우였고 다음으로 <슬램덩크>의 서태웅, <모노노케 히메>의 산…. 한결같이 까만 고양이 같은 인물을 좋아했고 인식도 못한 채 그런 캐릭터를 그려왔다. (웃음)
- 그런 맥락에서 최근작 <지구 최후의 메이드>의 마리는 결이 다르다. 머리도 길고 무엇보다 성격이 밝다.
지금껏 목표를 위해 죽도록 노력하는 캐릭터를 그렸다면 마리는 노력하되 그 과정을 즐기는 인물로 묘사했다. 종말의 순간에 걸맞은 이런 발랄한 캐릭터를 언젠가 꼭 그려보고 싶었다. (그림체도 훨씬 간결해졌다.) 이번 작품에선 내가 좋아하는 요소들, 예를 들면 아포칼립스, SF, 고군분투하는 캐릭터, 천사, 복숭아 등을 전부 넣되 칸에 꼭 필요한 것만 선별해 묘사하려고 했다. 완성하고 나니 만화에서 무엇이 중요한지 더 잘 파악할 수 있었다.
- <지구 최후의 메이드>는 무엇이 발단이었나.
마크 저커버그가 하와이에 벙커를 지었다는 기사를 읽었다. 저런 억만장자들은 성공한 뒤로 집안일을 해본 적이 없을 텐데 도와줄 사람을 벙커에 데리고 들어가지 않을까. 인류가 멸망한 시기에 벙커 안에서 그들이 과연 즐겁게 살아갈 수 있을까 상상하며 그렸다.
- 새로 준비 중인 차기작도 있나.
두 작품이 있다. 하나는 어떤 여자가 모종의 사건으로 인해 해안가 마을로 도망치듯 내려오며 시작한다. 그곳에서 한 남자를 만난 뒤로 평탄했던 여자의 삶에 이상한 일이 펼쳐진다. 마을 전체를 하나하나 그려나가는 게 기대된다. 다른 하나는 자기 무덤을 파고 싶어 하는 남자의 이야기다. 시한부판정을 받은 뒤로 자기 무덤만큼은 파라다이스로 만들겠다고 결심한다. 남자가 고른 산은 한 가족이 경제적 이유로 내놓은 선산이었는데 이곳에 해당 가족의 일원인 고등학생이 중요하게 여기는 무언가가 있다. 고등학생이 남자를 찾아가자 그는 무덤 만드는 걸 도와주면 이 산을 상속하고 죽겠다고 말한다. 어머니의 고향을 배경 삼아 이번에도 개인의 이야기가 담길 것 같다.
- 약간의 판타지가 가미된 모험담을 기본적으로 선호하나보다.
정말 좋아한다. (웃음)
내 작품을 영상화한다면?
“<유리병 속의 나나니>를 보고 싶다(<유리병 속의 나나니>는 요정의 유충을 주워 성체가 될 때까지 키우는 인간의 이야기다.-편집자). 이 만화를 그리며 내가 원하는 스타일에 가까워졌다고 느꼈다. 다른 매체로 표현된다면 어떤 느낌일까 상상해본 적이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