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현영 통역사는 <오디세이> 내한 행사를 무사히 치르고 이제야 한숨을 돌리는 중이다. 크리스토퍼 놀런 감독의 전담 통역사로서 그는 놀런 감독의 모든 말을 한국어로 옮기고, 감독을 향한 모든 질문을 영어로 옮기는 고강도 통역을 해냈다. 그러므로 놀런 감독 인터뷰 영상 하단에 붙은 “크리스토퍼 놀런 감독은 인터뷰를 몇건이나 하고 간 거냐”는 감탄 섞인 댓글은 반쯤은 맞고 반쯤은 틀렸다. 놀런 감독뿐 아니라 통역사의 역할과 노력도 컸기에.
정현영 통역사가 <오디세이> 내한 행사를 준비한 건 수개월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일단 책의 내용을 자세히 알아야겠다”는 생각에 호메로스의 <오디세이아>부터 펼쳐 서사의 뿌리를 탐색했다. 그리고 영화 <오디세이>와 관련된 모든 영단어를 수집해 ‘글로서리’(glossary, 단어목록)를 만들어나갔다. “캐릭터 이름이나 지역명을 정리하는 것만으로도 굉장한 공이 들 거란 걸 알았기에 글로서리 작업을 다른 작품 대비 훨씬 일찍 시작”했고, 엑셀 파일에다 놀런 감독과 출연 배우들의 모든 필모그래피, 그리고 그들이 받은 상들을 “한땀한땀” 채워넣었다. 그리고 일상생활 도중에도 놀런 감독의 인터뷰 영상을 틈틈이 챙겨보며 그의 말투에 익숙해지려 했다. 정현영 통역사는 정작 모든 통역사들이 이런 사전 준비 작업을 한다고 겸손하게 말한다. 하지만 빼곡히 정리된 단어들을 보니 물 흐르듯 자연스러운 그의 번역은 치밀한 준비 과정이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는 사실을 새삼 깨달았다.
고백하건대, 내한은 찾아온 손님도, 맞이하는 쪽도 ‘지금 이 순간’밖에 없다는 생각에 다 긴장할 수밖에 없는 자리다. 그럴 때 정현영 통역사의 맑고 차분한 목소리를 들으면 점차 긴장감이 누그러진다. 그만큼 그는 든든한 존재다. 정작 통역사의 마음속 풍경은 어떨까. “엄청 긴장된다! 다만 숨기려 한다. 통역사들은 행사 직전에 ‘내가 왜 이런 직업을 택했을까’라고 생각한다고들 말한다. (웃음) 그만큼 스트레스가 크다.” 이번 <오디세이> 내한 행사도 긴장되긴 매한가지였다. 놀런 감독을 사랑하는 한국 팬들이 많고 이번이 감독의 첫 내한인 이유도 크지만 “통역사는 전체 행사에서 마지막 필터”이기에 “단어 하나도 절대 틀리면 안된다”는 강박이 있었다.
그러나 강박이 긴장으로 이어지지 않기 위해 정현영 통역사는 현장에선 흐름에 몸을 맡기려 한다. 답은 단순하고도 어려운 진리, 즉 ‘상대방의 말에 귀 기울이기’이다. 한국은 월드 투어의 마지막 행선지였지만 놀런 감독이 지치지 않고 열정적으로 작품에 관해 이야기하는 모습에 동화되어 그 역시 열정적으로 통역에 임했다. 차분한 목소리, 정확한 발음, 빼어난 기억력을 지닌 정현영 통역사는 엔터테인먼트 업계에서 인정받아 지금은 중요한 일을 도맡고 있다. 올해 4월 로 내한한 배우 메릴 스트리프와 앤 해서웨이의 통역을 담당했고, 지난해부터 의 매기 강·크리스 애플핸스 감독, 가수 이재 내한 행사와 인터뷰를 맡으며 바쁜 나날을 보냈다.
영어와 한국어 모두 유려하게 쓰는 정현영 통역사는 한국에서 태어났다. 정치부 기자였던 아버지가 워싱턴 특파원에 임명되었을 때 10살 때부터 3년간 미국에서 잠시 살았을 뿐 해외에서 태어난 건 아니다. 짧다면 짧은 미국살이가 끝난 뒤 한국으로 돌아왔지만 “언어를 좋아하다 보니” 외국어고등학교에 진학했다. 20대 때 다시 미국으로 건너가 보스턴대학교에서 커뮤니케이션, 그중에서도 홍보를 전공했다. 대학 졸업 후에는 SK텔레콤에 신입사원으로 입사해 재무관리실에서 일했지만 그는 결국 언어로 돌아왔다. 회사의 실적 발표날 동시통역사를 가까이에서 보고 푹 빠진 게 계기였다. 서로 다른 언어를 옮기는 통역사의 프로다운 모습도 멋졌지만, 1시간 일하고 퇴근할 수 있다는 점이 매력적으로 다가왔다.
“1시간을 위해 몇달을 공부했을지 솔직히 그때는 몰랐다! (웃음) 나는 항상 전문가가 되고 싶다고 막연히 생각했는데, 그 통역사 선생님을 보면서 가능성을 보았던 것 같다.” 영화나 드라마처럼 다음날 바로 사직서를 날린 건 아니고 회사를 몇년 더 다녔지만 그때의 발견은 그를 한국외국어대학교 통번역대학원으로 이끌었다. 주위에선 “무슨 통역이야. 사양산업인데”라고들 했지만, 그는 결심을 굽히지 않았다.
“꼼꼼함보다는 순발력이 있는 성격이고 말하기를 좋아해서 처음부터 번역이 아닌 통역을 하고 싶다”는 생각이 확고했다. 흔히 통번역대학원은 통역 전공과 번역 전공으로 나뉘는데, 그는 처음부터 통역사를 꿈꾸었다. 그렇게 통역사란 큰 범주는 정했지만 어떤 통역사가 될 것인지 하위 범주를 정하는 일은 생각보다 만만치 않았다. 모든 분야에서 언어는 교환되기에 통역사가 필요한 분야가 무수히 많기 때문이다. 특허, 의료, 법정, 국제회의 등 건조한 언어를 교환하는 일에 주력하는 통역사들도 많았고 정현영 통역사 역시 “졸업할 즈음 테크, 데이터, IT 분야가 핫했”기에 지금과는 다른 분야로 전문성을 키우려 했다. “통역사 일을 시작할 때 엔터테인먼트 분야의 통역 일을 전문적으로 해야겠다는 생각 자체도 없었고 그땐 그런 생각을 할 만한 시장도 아니었다.”
2015년 통번역대학원 졸업 후 “일이 너무 없어서 땅바닥에 앉아서 운 적도 있었다”라는 그는 2016년 론칭한 넷플릭스 코리아와 운명적으로 만났다. <킹덤> 제작을 위한 실무자들간의 만남, 아이디어 피칭 회의에서 통역을 맡은 걸 계기로 “엔터테인먼트 산업이 잘 맞는다”라고 직감했다. 넷플릭스쪽에서도 비슷하게 “정현영 통역사와 스타일이 잘 맞는다”라고 이야기해주면서 자신감이 붙었다. 돌이켜보면 “어린 시절부터 문학을 좋아”했고 “디즈니 영화를 100번씩 보며 영어 노래 가사를 외웠던” 그는 예상하지 못한 영역에서 자신만의 영토를 발견했다.
<킹덤>을 시작으로 정현영 통역사는 넷플릭스와 깊숙이 연을 맺었다. 2020년부터 2년간 넷플릭스 코리아의 인사팀 ‘랭귀지 코치’로 일하며 “영어뿐만 아니라 영어권 문화를 직원들에게 종합적으로 코칭”하는 역할을 맡았다. 그리고 그의 경력에서 빼놓을 수 없는 <오징어 게임>과의 조우로 삶이 크게 바뀌었다. 정현영 통역사는 <오징어 게임>이 각종 시상식에 노미네이트되었을 때 황동혁 감독의 말을 통역했고, <오징어 게임> 시즌2부터는 더 큰 역할을 부여받았다. <오징어 게임> 시즌2, 시즌3 제작 당시에 황동혁 감독이 영어 대사를 쓸 때 도움을 주었고, 촬영 현장에 머물면서 황동혁 감독이 외국 배우들의 대사를 즉흥적으로 바꿀 때 역할을 했다. 그리고 두 작품이 릴리즈될 때 함께 풀릴 영어 자막을 검수하는 일도 맡았다.
드디어 완성된 <오징어 게임> 시즌2로 해외에 나갔을 때 정현영 통역사는 “이전과 무언가 다르다”라고 느꼈다고 한다. 미국 토크쇼 <더 레이트 쇼> <제이퍼 허드슨 쇼>에 배우 이정재와 나란히 앉았고, <켈리 클라크슨 쇼>에 배우 이정재, 이병헌과 함께했을 때도 비현실적이었지만 팬들과 직접 만날 때 더 크게 와닿았다.“ <오징어 게임> 시즌2로 루카 코믹스&게임스에 갔을 때 ‘이건 말도 안된다’라고 생각했다. 팬들이 상상을 초월할 만큼 작품을 좋아했다. 이탈리아 소도시인 루카에서 사람들이 이탈리아어가 아닌 한국어로 외치며 환호 했다.”
한국 작품을 향한 열기는 지난해 박찬욱 감독의 <어쩔수가없다>로 베니스국제영화제를 찾았을 때도 비슷했다. “외신기자나 영화인들이 박찬욱 감독을 알아보고 그들끼리 눈빛을 주고받으며 사인받으려고 다가오는 모습을 보면 자부심을 느꼈다.” 그리고 한국영화와 드라마를 향한 관심이 빠르게 확산되면서 성과 이름 순으로 부르는 한국식 호명법이 외국인들의 언어에도 점차 자리 잡는 걸 목격했다. 찬욱팍이 아닌 박찬욱으로, 준호봉이 아닌 봉준호로. 그는 이 광경을 두고 “어린 시절 미국에서 살았는데 이런 날이 올 줄 몰랐다”라고 말한다.
정현영 통역사의 다음 임무는 <가능한 사랑>에 관한 이창동 감독의 말을 옮기는 일이다. 9월에 열리는 베니스국제영화제 출장을 준비하면서 이창동 감독의 필모그래피를 하나하나 다시 보고 있다. <씨네21>과의 인터뷰 며칠 전 그는 한국영상자료원 영상도서관을 찾아 이창동 감독이 조연출을 맡았던 박광수 감독의 <그 섬에 가고 싶다>(1993)의 DVD를 보며 눈물을 쏟았다고 한다. 스스로 “영화광은 아니었고 일을 하면서 영화를 깊이 좋아하게 된 경우”라고 소개하지만, 누구보다 열심히 영화와 영화인들을 ‘디깅’하고 있었다. 놀런 감독을 떠나자마자 이창동 감독의 영화 세계에 푹 빠진 그는 말한다. “감독의 통역을 맡는 걸 특히 좋아하는 편이다. 방금 막 생각한 말이 아니라 오랜 시간 감독 안에서 쌓고 또 쌓고, 궁리하여 갈고닦은 이야기의 정수를 들을 수 있어 참 좋다. 그 이야기를 이해하려 노력하면서 귀 기울이는 이 일이 정말 재밌다.” 이창동 감독의 영화 세계에 깊이 파고들고 있는 정현영 통역사는 곧 이 감독이 <가능한 사랑>을 처음 공식적으로 표현하는 말을 제일 먼저, 그리고 가장 가까운 자리에서 듣고 전세계에 전할 예정이다.
ITEM
노트, 펜, 그리고 이어폰
“항상 쓰는 노트, 펜 그리고 이어폰이다. 특별하지 않은 것들이지만 손에 익은 게 좋아서 노트의 경우 한번에 20~30권씩 사서 쌓아놓고 하나씩 꺼내 쓴다. 펜도 간편하게 늘 쓰던 걸 쓴다. 통역 시작하기 전에 매번 펜을 열어서 잉크 잔량을 확인하는데, 그럴 때마다 총기 장전하는 스나이퍼가 된 기분으로 비장해진다. (웃음) 이어폰은 잠깐이라도 빠져서 못 들으면 안되니 귀 위에 확실히 걸 수 있는 모델이다. 이 일을 처음 시작했을 때부터 쭉 같은 모델을 쓰고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