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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찬호의 아주 사소한 사회학] 한번만 머리를 긁적이면 되는데

아이가 여섯, 일곱살 때였다. 함께 마트를 거닐다가, 우유 하나 가져오라고 하면 좋다면서 들고 오는 그런 나이였다. 그것만으로도 뿌듯해하고 재밌어하는 시절이었으니 부모 입장에서는 시켜 먹는 재미도 쏠쏠했다. 아이는 난이도 있는 문제도 제법 풀었다. 이를테면, 감자를 비닐봉지에 원하는 만큼 담고 저울 앞으로 가서 직원에게 건네 그 무게만큼 가격표를 붙이는 시스템에서도 잘 적응했다. 성공하면, 비닐봉지를 손에 들고 싱글벙글거리며 달려온다.

그날도 익숙하게 지시를 내렸다. 감자 한개만 가격표 붙여오라고 하고 나는 옆에서 깻잎을 담았다. 그때, 가까운 곳에서 왕갈비 타임 세일이란 소리가 들렸다. 기회를 놓칠 수 없어서, 아이에게 깻잎 든 봉지를 주면서 이만큼만 더 담아서 가격표를 붙이라고 한 다음 재빨리 이동했다. 3분 정도 걸렸을까나. 나는 왕갈비를 카트 안에 넣고 자연스레 아이를 찾았다. 눈앞에 없어서 두리번거리는데, 아직까지 채소 계산대 앞에서 자기 차례를 기다리고 있는 게 아닌가. 깻잎 한 뭉치 대강 손으로 집고 넣어서 계산하는 건 10초도 안 걸릴 일인데 말이다. 농담조로 한마디 했다. 깻잎 그거 담는 데 한 세월이라고.

이유가 밝혀졌다. 54장이었다. 아이는 54장의 깻잎을 하나하나 뜯어내고 담았다. 먼저 내가 준 깻잎이 몇장인지를 일일이 확인했다. 27장이었다. 그리고 27장의 새 깻잎을 꼭지를 하나하나 떼어내며 담았다. 중간에 자꾸 틀려서, 세번이나 시도했다. 어떤 어른도 그렇게 깻잎을 구매하지 않지만, 아이는 그렇게 했다. 이 정도 더 담으라고 부모가 말했기에, 정확하게 그 정도 담으려고 최선을 다해 노력했다. 그걸 모르고 눈치를 준 내가 무안했다. 그 순간 내 머리 옆에는 악마가 나타나 절대 미안해하지 말고 더 큰 소리로 이렇게 말하라며 속삭였다. “이걸 한장씩 세고 있었냐. 아이고 그런 사람이 어디 있냐.”

그 말, 다행히도 하지 않았다. 그 순간에 해야 할 건 사과였다. 사과한 다음에 조언, 그딴 게 아니라 미안함을 전하는 것만이 그 순간에 적합한 행동이었는데 운이 좋았다. 그날따라 잡생각이 없었다. 아이에게 바로 사과했다. 석고대죄 그런 게 아니라, 아빠가 그것도 모르고 재촉을 했다면서 머리 한번 긁적거렸다. 아이니까 가능했던 꼼꼼함을 있는 그대로 인정했다. 쓸데없는 행동이었다면서 평가하지 않았다. 내 인생에서, 어쩌면 제일 잘한 행동이 아닐까 생각한다. 뭐랄까, 기준이 생겼다고나 할까.

일상에서 내가 예측한 모습과 다른 타인을 만나면 답답할 때가 많다. 하지만 난 깻잎이 먼저 떠오른다. 저 사람은 저 사람의 방식으로, 최선을 다하고 있을 거라고 일단 믿는다. 아닐 때도 있겠지만, 그게 고의인지 내가 알 방법은 없다. 그렇게 이해해야만, 행여 조언을 할 상황이 오더라도 목적에 맞게 대화가 오갈 수 있다. 이때는, 이렇게 하는 게 더 나은 방법일 수 있다면서 깔끔하게 그것만 전달할 수 있다. 듣는 자도 잘 듣는다.

하지만 일상은 그렇지 않다. 내가 그것도 모르고 재촉을 했네, 이 말 한번이면 될 상황을 애써 부정하는 이들은 곳곳에 있다. 그들은 그 순간을, 타인의 과실을 더 명료하게 부각해 공격하는 방법으로 넘어간다. 융통성 없네, 고집스럽네, 깐깐하네, 고지식하네 등등의 추임새로 말이다. 앞뒤가 꽉 막혔네, 하나만 알고 둘은 모르네, 외고집이니 등의 말로 대화가 안 통하는 답답함을 짜증 가득하게 표현하며 좀 전에 심하게 말해서 미안하다고 말할 절호의 기회를 발로 찬다. 무례함으로, 이전의 무례함을 덮는다. 머리 한번 긁으면 될 일을 말이다.

태생적으로 기질이 사과하지 않는 성격일지도 모르겠지만, 원래 안 그럴 사람도 그러기에 인간을 사회적동물이라 하지 않겠는가. 가부장제 가족주의 사회에서는 남편이 아내에게, 부모가 자녀에게, 첫째가 둘째에게 그렇다. 폐쇄적 조직문화를 지닌 공동체에서도 비슷하다. 사장이 사원에게, 선배가 후배에게 본인의 머쓱함을 반드시 돌려주겠다며 집착한다. 뻘쭘하면 뻘쭘함을 느끼면 그만인데, 이상하게도 어떤 위치에 있으면 그 민망함에 본인이 기분 나빠한다. 사회구조란 게 이렇게 무섭다. 내가 저 사람을 민망하게 만든 근거가 오류였음이 드러났는데, 본인 기분이 우선이다. 그래서 어색함 정도로 그쳐야 될 순간에 굳이 수치심을 개입시켜 논의를 이상하게 확장한다.

사과를 하지 않으려면, 반드시 상대가 틀려야 한다. 그래서 자신은 보편이고, 넌 그렇지 않다는 논리를 펼친다. 정상과 비정상으로 분류하는 논법처럼 간단한 게 없으니까. 간단하지만, 이 방법 누구나 사용할 순 없다. 권력의 크기에 따라 큰 쪽에서 아닌 쪽으로만 흐른다. 반대 방향으로는 좀처럼 작동되지 않는다. 그들은 이렇게 말한다. “그런 식으로 사회생활하면 어떤 취급 당하는 줄 아냐?”

그나마 가정에서는 이런 투박함이 완전히는 아니지만 조금씩 희석되고는 있다. 기업 내부도 분위기가 많이 달라졌다. 하지만 회사끼리는 아니다. 본청이냐 하청업체냐에 따라, 정규직이냐 파견직이냐에 따라 간단한 사과조차 하지 않으려는 사람은 선명히 구분된다. 하더라도 두 집단의 어휘 수준이 완전히 다르다. 한쪽은 애써 사과하고, 한쪽은 무릎이라도 꿇을 자세로 사과한다. 웃긴 건, 그 사과를 활용하는 방식도 다르다는 거다. “사과했잖아요!”라고 오히려 역정을 내는 건 절대 균등하게 드러나지 않는다. 늘 한쪽이다.

요즈음은 이해관계조차 없음에도 권력관계가 나뉜다. 희한하게도 비싸다는 아파트일수록 괴상한 모습이 많다. 그러면 안된다고 언론이 다뤄도 막무가내다. 집값이 비싸면 그래도 된다는 투다. 인플루언서도 비슷하다. 사과할 일에 자신이 오히려 피해자랍시고 부연 설명을 하기 바쁘다. 정치쪽은 말할 것도 없다. 사과는 곧 패배라고 생각하는지, 한번 우긴 걸 다시 우긴다. 더 과하게.

머리 한번 긁적거리면 된다. 장애인의 삶을 목격하면, 비장애인은 그전의 본인 생각이 편견이었다고 인정하고 앞으로 달라지면 된다. 운동을 못하는 사람의 인생을 접하면, 운동 안 해서 저런 거라고 말했던 자신의 생각이 짧았다고 빨리 말하면 된다. 가난의 본질을 느끼면, 가난을 노력의 결과라고 치부했던 논리를 부끄럽게 여기면 된다. 인생이 원래 그래, 자본주의가 다 그렇지 따위의 말을 안 하면 된다. 그러면, 관계가 유지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