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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평] 할리우드의 오래된 유산 - 김병규 평론가의 <디스클로저 데이> <마티 슈프림>

<마티 슈프림>의 도입부, 신발 창고 좁은 틈에서 유부녀인 레이첼과 관계를 나누는 마티 마우저의 얼굴 위로 1984년에 발표된 알파빌의 노래 <Forever Young>이 흐른다. 그가 거짓말을 속삭이며 야만스럽게 사정하면 꿈틀거리는 정자의 행렬이 보이고 한 마리의 정자가 동그란 난자와 수정한다. 조시 사프디는 1952년을 배경으로 삼은 영화의 도입부에 80년대에 나온 음악을 삽입한다. 도입부에서만이 아니다. 정신없는 속도감으로 채워진 이 영화의 화면 위로 80년대 라디오에서 유행한 트랙들이 여러 차례 흘러나온다. 그 시작을 알리는 곡의 제목은 ‘영원한 젊음’이다. 위대한 젊음. 늙지도 부식되지도 않는 절대적인 젊음의 세계. 사프디는 미국영화의 황금기였던 시대를 배경으로 삼은 뒤 할리우드 고전주의의 영화적 유산을 발굴해 고스란히 감싸 안는다. 그것은 탄생도 끝도 없는 영원한 젊음의 시간이다. 이는 <마티 슈프림>이라는 영화에게 있어 거부할 수 없는 축복이자 형벌이다. 이 영화를 준비하는 긴 시간 동안 조시 사프디는 오래전에 기억나지 않는 누군가 건네준 말을 떠올렸다고 말한다. “20세기를 수집하라.”

<마티 슈프림>, 도착지 없는 망상

<마티 슈프림>

과거의 음악을 빌려 더 오래된 과거를 소환하는 <마티 슈프림>의 시간 감각은 어딘가 시대착오적으로 어긋나 있다. 조쉬 사프디의 말에 따르면 이 영화를 기획하던 단계에서 영화의 구조는 노년이 된 마티가 손녀에게 과거의 이야기를 들려주는 형태였으며 회상을 마친 마티의 모습으로 돌아오는 결말을 구상했다고 한다. 하지만 완성된 <마티 슈프림>에는 과거를 돌아보는 회고와 추억의 감각이 존재하지 않는다. 2차 대전 직후의 50년대를 살아가는 마티는 영화가 시작하자마자 문제에 직면한 인간으로 다가온다. 그가 마주하고 해결해야 할 문제는 현재 진행형이다. 유대주의와 가족, 자본과 수치심, 남성성과 명성, 외로움과 유혹, 계획의 실패와 거듭되는 추락, 그리고 무엇보다 망상이다. 할리우드는 내부의 망상으로 충전되고 또 망상으로 인해 부서지는 체계다. 영원한 젊음의 대변자인 할리우드는 망상하는 인간을 위한 무대였고 그 불안정한 망상을 경이로운 현실로 실현하는 장소였다. 도저히 불가능해 보이는 계획을 세우고 거기에 투신하는 사프디 영화의 망상가들은 할리우드의 환경과 조건이 사라진 자리에서 할리우드의 꿈을 꾸는 존재들이다. 조시 사프디는 할리우드가 아니라 뉴욕의 영화감독이고 선대의 뉴욕 영화감독 시드니 루멧에 따르면 뉴욕에서 영화를 찍는 일의 특권은 그곳이 할리우드처럼 영화를 위해 만들어진 도시가 아니라는 점에 있다. 그들이 만드는 뉴욕 영화는 영화를 위한 장소 바깥에서 태어난 사생아의 영화이며 집을 잃어버린 이민자의 영화다.

1950년대를 되살린 화면에 80년대의 음악을 덧씌워 제시하는 것은 특정한 역사 해석의 관점에 서는 선택이다. 80년대란 미국의 시간이 역행하기 시작한 분기점이기 때문이다. 영화배우 출신인 레이건 시대의 미국은 50년대 할리우드가 약속한 낙원의 기억을 복구하고자 했다. 병적인 증상에 사로잡힌 인간들이 벌이는 범죄 행각과 포르노그래피적 표현으로 파괴된 뉴 아메리칸 시네마의 망상적 세계를 거슬러 고전기 할리우드의 보수적 가치를 되돌리려는 또 다른 반동적 망상의 경향이 생겨났다. 조시 사프디는 이중으로 겹쳐둔 시간의 렌즈를 통해 세계를 바라본다. 영원한 젊음을 과시하는 50년대의 망상을 바라보면서 그 이상적인 시대를 복권하려 드는 80년대의 망상을 겹쳐둔다. <마티 슈프림>의 한 장면에는 서로 다른 시대의 기획이 편집증적으로 뒤엉켜 있다. 그리고 뒤엉킨 과거를 되돌아보는 시각은 20세기가 남긴 유산에 기대 그것을 재건하고 복구하는 몸짓으로 움직일 수밖에 없는 초라한 ‘현재’에 다다른다.

망상가에게 눈앞의 현실은 아직 도래하지 않은 미래를 위해 지워져야 할 대상이다. 그런데 역설적으로 마티의 주변에는 지워지지 않고 과거에서 찾아온 인간들로 득실거린다. 홍보를 위해 일본 선수 엔도와의 탁구 경기를 주선한 잉크 재벌 록웰은 시합 도중 뜬금없이 자신이 영원히 사는 뱀파이어라고 말하며 패배를 종용한다. 그의 아내인 나이 든 할리우드 배우 케이는 젊은 마티의 몸을 깨물고 핥는다. 그들의 반대편에는 또 다른 과거의 이야기들이 있다. 마티의 동업자인 클레츠키는 아우슈비츠 수용소에서 겪은 이야기를 들려준다. 숲에서 벌집을 발견한 그는 온몸에 꿀을 바르고 돌아가 수용소의 사람들에게 핥아 먹였다고 한다. 무엇보다 이집트에 출장을 간 마티는 피라미드의 조각을 떼어내 어머니에게 전하며 우리의 조상이 이걸 만들었다고 말한다. 영원히 죽지 않는 자본으로 채워진 뱀파이어의 삶, 강제수용소에서 돌아온 생존자의 이야기, 유대 계통의 오래된 신화가 끝나지 않는 이야기를 형성하고 마티의 현재를 에워싼다. 정치적 도덕적 비판과 교정의 대상이 되었음에도 과거의 계율을 지워지지 않는다. 그 앞에서 현재는 외롭고 고통스러운 거짓말의 세계가 된다. 마티 마우저가 마주하는 현실은 연극 소품용 목걸이와 가짜로 칠해진 피멍으로 눈을 속이는 어설픈 모조의 세계다.

마티가 탁구 경기를 하는 장면에서 <마티 슈프림>의 화면은 짙은 어둠으로 채워져 있다. 이것이 마티 마우저가, 사프디가 창조한 남성들이 거주하는 장소다. 깊은 어둠 속에 단독자로 선 남성의 장소. 그곳은 남성의 망상이 충전되는 원형의 장소이자 동시에 현실의 압력으로 인해 부풀어 오른 망상이 파괴되는, 고독하고 불안한 장소다. <마티 슈프림>의 어둠은 인물의 과도한 충동을 일으키기 위한 전제조건이다. 마티는 망상을 떠올리고 그것을 현실에 옮기려고 애쓴다. 이 과정에서 사프디가 활용하는 장치는 닫힌 공간을 향해 빛을 드리우는 ‘창문’과 더 깊은 어둠을 향해 뚫려 있는 ‘구멍’이다. 케이에게 전화를 건 마티는 창밖의 건너편 방을 바라보면 식탁 위에 탁구공이 떨어질 거라고 말한다. 그녀가 창문을 바라보면 마티의 말이 그대로 실현된다. 그렇게 유혹한 케이와 헤어지고 만나기를 반복하던 마티는 화장실에서 관계를 나누며 그녀의 목걸이를 끊어 하수도에 버려둔다. 마티는 창문을 향해 새어나갈 것이고 하수도의 어둠으로 도망칠 것이다. 모든 곳이 창문의 틈과 하수도의 구멍으로 연결되어 있기에 이 영화엔 물리적인 장소와 풍경이 존재하지 않는다. 이 장치의 단면들은 목적지에 다다르지 못하고 필연적으로 추락하는 마티의 운명을 기록한다.

고전기 할리우드 영화의 주인공은 소속된 공동체와 함께 임의의 목적지에 도착하는 이상을 실현할 때가 있다. 반대로 뉴 아메리칸 시네마의 주인공들은 목적지에 도착하지 못하는 여정의 패배를 겪는다. 마티 마우저는 그 누구도 아니다. <마티 슈프림>의 엔딩에서 조시 사프디는 할리우드 고전의 유산과 뉴 아메리칸 시네마의 모호한 불안이 뒤섞인 듯한 미묘한 결말을 그려낸다. 표면적으로는 해피엔딩이다. 보잘것없는 이벤트 경기에서 엔도를 꺾고 돌아온 마티는 레이첼이 입원한 산부인과를 찾는다. 그리고 도입부에서 생겨난 아이를 만난다. 그는 아버지가 되어 눈물을 흘린다.

하지만 이 엔딩은 너무나 갑작스럽고 통속적이라 장면이 품고 있는 세부를 충분히 신뢰하기 어렵다. 이 영화의 결말은 차라리 장면이 담아내는 내용과 반대 지점을 암시하는 것처럼 보인다. 마티는 아버지가 되었지만 어디에도 도착하지 못했다. 그는 어딘지도 모르는 산부인과에서 태어난 아이를 바라보며 눈물을 흘리지만 둘 사이에는 유리창이 가로막고 있어 우는 아이를 직접 만나지도 못한다. 그는 여전히 갇혀 있고 문틈의 빛과 어둠 속의 구멍을 찾고 있다. 이는 가족주의로 회귀하는 보수적 결말이 아니다. 마티가 마주하는 것은 도입부에서 노래하던 영원한 젊음이 끝나는 순간이기 때문이다. 끝나지 않는 망상을 꿈꾸던 남자는 평범한 아버지가 되어 미래의 시간을 살아가야 한다. 그는 오래된 할리우드의 주인공처럼 가정을 이루지만 뉴 아메리칸 시네마의 주인공처럼 어찌해야 할지 모르는 혼란에 휩싸인다. 이 장면에서 마티의 눈앞에 놓인 현실은 다른 무언가로 대체되는 대상이 아니다. 그는 사라지지 않는 현실 앞에서 미래로 향해야 한다.

조시 사프디는 결말에서 그가 오랜 시간 존경을 바치고 교류한 뉴 아메리칸 시네마의 뉴욕 영화감독 제리 샤츠버그를 만나는 것 같다. 이 영화에 깊이 그림자를 드리운 것은 <허수아비>의 결말이다. <마티 슈프림>의 티모시 샬라메처럼 왜소하고 마른 몸과 거친 피부로 화면을 누비는 알 파치노는 출소한 뒤에 아내에게 전화를 건다. 하지만 이미 다른 남자와 재혼한 아내는 오래전에 아들을 유산했다고 거짓말한다. 알 파치노는 아버지가 되어 집으로 돌아가지 못한다. 헛된 유혹에 사로잡혀 잘못된 판단을 거듭하고 결국 통제할 수 없는 상황에 내몰려 삶의 중대한 가치를 포기하는 샤츠버그의 주인공들처럼 사프디 영화의 인간들도 외로움과 후회에 시달린다. 하지만 샤츠버그가 가족을 잃어버린 남자를 위해 비극적인 정조의 결말을 마련해주던 것과 달리 조시 사프디가 건네는 것은 고작 한 남자가 꿈꾸던 망상의 ‘끝’이자 그가 직면해야 하는 삶이다. 해피엔딩인 것처럼 포장되어 있지만 무척이나 미심쩍고 불안정한 삶의 분기점이다. 마티는 가족에 대한 애착과 신뢰를 찾지 못한 채로 아버지가 되어야만 한다. 그는 지금 눈물 때문에 앞이 제대로 보이지 않을 것이다. 그는 마지막까지도 단단히 발을 내디딜 현실의 장소를 찾지 못한 눈먼 남자다.

<디스클로저 데이>, 군중 없는 믿음

<디스클로저 데이>

비슷한 시기에 도착한 또 다른 유대인 연출자의 영화에서도 할리우드의 오래된 유산이 되돌아온다. 하지만 보고 듣는 사람들의 감각이 완벽하게 뒤바뀐 시공간에 어색하게 돌아온 유산은 그의 영화를 전례 없는 부조리함으로 뒤튼다. 스티븐 스필버그의 새로운 SF인 <디스클로저 데이>는 외견상 1970년대 영화를 지탱하던 영화의 구조를 다시 바라보는 시도다. 이 영화에서 스필버그는 타자를 향한 순진한 믿음과 환대로 충만하던 SF와 국가와 비밀조직이 결탁한 음모론적 스릴러의 분위기를 빌려와 새로운 환경에 이식하고 있다. 젊은 시절 스필버그의 영화적 야심을 폭발시키던 구조가 아직도 한 편의 영화를 지탱하는 구조로 작동하는지 다시 돌아보는 것이다.

낯선 일은 아니다. <스파이 브릿지>부터 <더 포스트>와 <레디 플레이어 원>, <웨스트 사이드 스토리>와 <파벨만스>로 이어지는 말년의 스필버그 영화들은 오래된 할리우드의 기억을 소환하면서 과거의 믿음과 규칙을 교정하는 작업이었다. 냉전 시대의 스파이 교환, 신뢰성 있는 저널리즘의 판단, 화려하고 웅장한 뮤지컬, 대중문화의 캐릭터, 그리고 어린 시절의 필름 촬영. 그것들에는 군중의 몰입과 흥분, 착오와 오류가 모두 깃들어 있다. <레디 플레이어 원>에 나오는 기억의 박물관처럼 스필버그는 20세기 공동체의 흔적이 남아 있는 소재와 장르를 찾아 현대의 장소에 이식했다. 그는 군중의 소란스러운 감정과 집단적 공동체가 마주하는 경험을 영화에 투사하는 마지막 미국인이다.

<파벨만스>에서 주인공이 만든 영화를 보는 관객들처럼, 스필버그가 묘사하는 군중은 똑같은 대상을 눈으로 지켜봤다는 공통의 경험에 근거해 만들어진다. 그의 이미지 체계에서 전쟁의 끔찍한 살육과 인류의 거대한 사랑과 영화를 보는 일이 비슷한 강도의 체험으로 묶일 수 있다면, 이는 스필버그의 영화에서 그 행위들이 모두 수많은 사람이 같은 대상을 지켜보는 공통의 경험으로 만들어지기 때문이다. 그런데 <디스클로저 데이>에서 여러 사람이 같은 것을 보는 공동의 감각은 믿을 수 없는 사태로 간주될 만큼 희박해진다. 첫 장면은 바닥에 누운 레슬링 선수의 시점 숏이다. 그 위로 시점의 주인을 내리치는 발이 카메라의 시선을 짓뭉갠다. 바라보는 자의 시각을 거칠게 파괴하는 이미지로 영화는 시작된다. 스필버그는 이미지를 바라보는 체험에 새겨진 취약성을 안고 이 세계를 마주한다. 세계를 본다는 것은 아름답고 매혹적이며 그만큼 위태롭기 짝이 없는 행위다.

공교롭게도 <디스클로저 데이>에는 보는 사람과 보지 못하는 사람의 차이가 선명하게 드러나 있다. 외계인의 선택으로 ‘눈’에 특별한 능력을 주입받은 마가렛과 켈너는 평등한 시선의 체계를 흐트러트린다. 그들은 다른 사람들이 보지 못하는 세계를 보고, 사람들의 시선 앞에서 모습을 감추거나 혹은 바라보는 사람의 사적인 기억이 담긴 모습으로 나타난다. 이 영화에서 대상을 바라보는 시선과 반대편에 머무는 세계는 쉽게 일치하지 않는다. <디스클로저 데이>는 숏과 리버스 숏이 결합할 수 없는 환경을 직시하는 영화다.

스필버그는 그들의 불가능한 시선이라는 규칙을 매개로 영화사의 오래된 양식을 불러들인다. 마가렛은 보이지 않는 안내를 따라 어린 시절 집을 복제한 스튜디오에 도착해 과거의 진실을 마주한다. 유년기의 마가렛이 홀로 마주한 동물 모습의 외계인은 스필버그가 “내게 꿈꾸는 법을 알려준 최초의 애니메이션”이라고 말한 월트 디즈니 애니메이션의 동물 우화를 떠올리게 한다. 외계인의 진실을 은폐하려는 조직의 요원들은 마가렛을 추적해 그녀가 있는 스튜디오에 도착하지만, 마가렛은 이미 특별한 능력으로 모습을 감춘 뒤다. 요원들은 보이지 않는 적과 무대장치 앞에서 우스꽝스러운 무성영화 풍의 슬랩스틱을 연출한다. 그리고 이 모든 것은 현실을 복제한 비밀스러운 스튜디오에서 일어난다. 누군가는 보지 못하는 세계를 본다는 은밀한 경험. 이 규칙에 근거해 한 편의 음모론적 스릴러는 스튜디오에서 제작된 유년기의 동화로 변모하고 소명을 부여받은 초월적 인간의 드라마가 되며 도망과 추격의 천진한 슬랩스틱 코미디가 된다. 스필버그는 시선의 불일치라는 규칙이 20세기의 영화의 양식들을 창조해왔다는 사실을 하나씩 되짚는다.

20세기 영화를 지탱하던 시네마의 의제와 규칙은 모두가 같은 것을 보지 못한다는 시선의 차별에 기반을 둔다. 그런데 스필버그가 믿는 이미지의 힘은 모두가 한자리에서 같은 대상을 지켜보는 경험에서 온다. <디스클로저 데이>는 두 명제의 충돌이자 폭발이다. 마가렛과 켈너는 폭로의 수단으로 은폐된 외계인의 자료를 TV 뉴스로 송출하는 것을 선택한다. 스크린과 수많은 디스플레이 화면 위에 동영상이 재생되고 사람들은 그 이미지를 바라본다. 공개된 기록은 외계인을 상상한 20세기 대중문화의 이미지를 답습한 결과물이다. 그토록 익숙하고 범용한 이미지일지라도 스크린이 제공하는 시선의 경험으로 모든 군중을 통합할 수 있다는 전제조건이 이 순간에 작동한다. 이것이 세계를 바라보는 경험에 깃든 스필버그의 믿음이자 불안이다. 송출된 이미지는 순식간에 모든 인류를 설득하며 일말의 의심 없이 진실의 위상을 획득할 것이다. 이것이 이미지를 향한 스필버그의 믿음이다. 나머지 절반의 불안은 이미지와 진실에 대한 일관된 믿음이 훼손되어버린 시대에 동등한 시선의 경험으로 통합된 군중을 묘사하는 일이 불가능하다는 데 있다. 스필버그가 송출한 20세기의 이미지는 그 자체로 믿음과 불안으로 뒤섞인 모순이다. <디스클로저 데이>는 이미지로 통합되는 세계를 창조한다. 그러나 이미지로 통합된 군중을 묘사하지 못한다. 이 영화가 이미지를 바라본 군중에게 말을 거는 마가렛의 숏 뒤에 어떤 리버스 숏도 덧붙일 수 없이 끝나버린 이유다.

<디스클로저 데이>는 공통의 감각이 희박해진 세계에 도착한 군중의 영화다. 집단과 군중의 현상을 가리키지만, 집단과 군중이 나오는 장면을 담아낼 수 없는 영화다. 폭로할 진실이 없는 시대에 은폐되었던 진실을 송출하는 영화다. 송출의 형식으로는 사람들을 설득할 수 없는 환경에서 송출의 형식을 선택하는 영화다. 공동체의 장소가 존재하지 않는 곳에서 허구적으로 상상한 공동체의 장소를 복구하는 영화다. 이상한 기분에 사로잡힌 마가렛이 읊조리던 한 마디는 전염병처럼 이 영화의 모든 장면을 떠돈다. “내가 가야할 곳이 어디인지 알 것 같아.”

오래된 것과 새로운 것

할리우드는 무엇을 꿈꾸고 있을까? 끝나지 않는 장난감들의 세계인 <토이스토리 5>에서 픽사는 시리즈의 근간이 되는 오래된 상상력의 세계가 태블릿 기기로 표상되는 새로운 놀이의 형식과 경합하는 상황을 서사의 축으로 삼는다. 장난감은 낡고 유치한 것으로 취급되지만, 장난감을 손에 들고 가상의 세계를 상상하하는 놀이의 방식은 아직 유효하게 남아 있다. 보니의 친구를 찾아주기 위해 낯선 모험에 나선 카우걸 제시는 여전히 상상력을 발휘해 장난감 놀이에 몰두하는 블레이즈가 적합하다고 느낀다. 기묘한 것은 장난감을 가지고 노는 블레이즈의 놀이가 중단되고 현실로 돌아오는 순간, 그 놀이의 형식이 태블릿 기기에 몰입한 아이들의 모습만큼이나 이상해 보일 수 있다는 사실이 폭로되는 것이다. 태블릿 기기에 몰입하는 놀이의 형식을 부정적으로 비추는 순간, 역설적이게도 혼자 상상력을 발휘해 실행되는 장난감 놀이의 형식 또한 대단히 도착적으로 보인다. <토이스토리> 시리즈는 언제나 세계에 주어진 규칙의 위계를 흔들었고 놀이의 형식과 자의식을 스스로에게 질문하곤 했다. 이번 속편에서 질문의 대상이 되는 것은 주어진 사물로 눈앞에 없는 세계를 창조하는 놀이의 상상력 그 자체다. 영화가 설정한 상반된 두 가지 놀이의 경계는 명확하게 나뉘지 않고 당연해 보이던 시리즈의 유산은 위태로운 것이 된다. <토이스토리 5>는 그토록 이상한 경합의 세계에 속해 있다.

<마티 슈프림>, <디스클로저 데이>, 그리고 <토이스토리 5>의 첫 장면은 모두 누군가의 시점 숏으로 시작한다. 그들의 시선에 비치는 세계는 거짓말과 위장(<마티 슈프림>)으로 채워지고, 외부의 공격에 불안하게 흔들리는 시선(<디스클로저 데이>)을 표상하며, 새로 탄생해 낯선 세계를 바라보는 장난감의 혼란스러운 시각(<토이스토리 5>)을 가리킨다. 다시 말해, 미국영화의 시점 숏에서 세계는 다른 것으로 급격히 변형되고 있다. 바라보는 시선은 그대로인데 주어진 세계의 외형이 뒤바뀌고 있을 때, 영화는 오래된 것과 새로운 것이 뒤섞여 만들어낸 이질적인 접속면으로 기능한다. 한때 영화의 다른 이름이었던 할리우드는 이때 시대착오적 유산과 뒤바뀐 현실의 경합 속에서 생겨나는 불가피한 파열음의 장소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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