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두 감독의 장편 데뷔작인 <지구 최후의 여자>의 출발점으로 이번 스틸을 꼽았다. 밖에서 구한아와 송철이 철의 작품 <달콤한 해바라기>의 수정을 두고 논쟁을 벌이는 장면이다.
염문경 내가 각본도 썼다. 인터넷에서 싸우는 사람들이 실제로 만나도 그럴 수 있을까라는 생각에 오래전부터 꽂혀 있었다. 그런 의문을 담아 <현피>(2019)라는 단편을 찍기도 했다. 원류가 된 초기 아이디어가 있다면 초등학생 때 친구다. 흔히 말하는 여성스러운 성격과 이름을 가진 남자아이였는데, 그 친구의 엄마가 그래선 안된다며 여자 친구들과 놀지 못하게 했다. 친구는 결국 이름도 바꿨다. 그 친구가 송철에 녹아 있다. 강요받는 남성성 안에서 자기혐오를 품고 자란 남자들과 강요받는 여성성 안에서 분노를 키운 여자들. 사회적으로 적대 관계로 보이는 이들이 만나서 서로를 이해할 수 있을까. 이런 궁금증은 여전하다.
이종민 <현피>의 배우이자 스태프로 염문경 감독과 작업을 시작했다. 공동 연출은 <사람들은 왜 바다를 보러 갈까>(2023)부터다. <지구 최후의 여자> 시나리오를 읽는데 정말 좋았다. 밝고 유쾌하면서도 ‘힙함’이 묻어나는 게 문경 감독 글의 색깔인데 이번에도 여지없었다. 주인공을 시켜달라고 했고, 함께 연기와 연출까지 하게 됐다.
- 그렇다면 어떻게 영화하는 사람들의 이야기로까지 이어졌나.
염문경 자연스러웠다. 이야기를 만드는 사람으로서 이야기의 역할과 필요에 대해 습관적으로 생각한다. 이야기는 잘 정제된 방어기제라고 생각한다. 도피처로서 이야기를 택했다 해도 그 안에서 우리는 타인을 만나고 치유받기도 한다. 그런 점 때문에 내가 영화를 사랑하는 것 같다.
- 한아의 무성 SF영화 <지구 최후의 여자>로 문을 연다. 무성영화를 비롯해 뮤지컬, 누아르, 애니메이션, 다큐멘터리 등 무수한 장르가 등장한다. 상당히 모험적인 시도다.
염문경 영화의 역사를 훑는 의도가 있었다고 관객과의 대화에서는 멋지게 말하곤 했지만, 사실은 재밌게 만들고 싶었다. 비디오 가게의 딸로서 어릴 때부터 많은 영화를 보고 자랐다. 그만큼 시대를 가리지 않고 다양한 장르의 문법을 자연스럽게 익혔고, 배운 것들을 영화 안에서 적재적소에 활용해 변화를 주면 재밌을 것 같았다. <지구 최후의 여자>는 거대한 패러디이자 농담 같은 영화다. 담론을 진지하게 다루는 줄 알았을 때쯤 “짜잔, 농담이야” 하며 관객에게 장난을 치고 싶었다.
- 어릴 때 어떤 영화를 보고 자랐는지 궁금해지는 답변이다.
염문경 무한 반복한 영화는 <인어공주> <미녀와 야수> 같은 애니메이션이다. 아빠가 그 시절의 명작들을 집에 가져와 온 가족이 함께 봤던 기억이 난다. <올드보이>급의 청소년관람불가 영화들도 많았는데, 충격받으면서도 시선을 떼지 못했다. 그때의 매혹이 이번 작품에 자연스럽게 쏟아져 나온 게 아닐까 싶다.
이종민 나는 TV드라마가 더 익숙한 세대인데, 영화에 대한 최초의 기억은 극장에서 본 <우뢰매>다. 내용은 기억이 안 나도 그 영화가 준 신기함과 극장 경험의 감각은 남아 있고, 어릴 때 본 작품들이 연출할 때 알게 모르게 영향을 미치는 것 같다.
- 다양한 극중극을 만드는 데 예산에 대한 우려는 없었나.
이종민 “도대체 얼마를 들여 찍을 생각이냐”는 말을 많이 들었다. 우리가 연극하던 사람들이라 오히려 극중극이라면 돈을 많이 들이지 않고도 만들 수 있겠다고 생각했다. 소품을 적극 활용해 연극적으로 풀어내자는 방향으로 접근했다.
- 감정적으로 가장 짙은 신은 극장에서의 신이 아닐까 싶다. 끈질긴 노력 끝에 철은 극장에서 한아와 재회하고, 둘은 울며 ‘진짜 영화’를 만들기로 결심한다.
염문경 연기적으로 어려웠던 장면이다. 배우로서 ‘감정신에서 감정이 잘 안 올라오면 어떡하지’ 하는 두려움이 평소 있는데, 이날 현장에서도 그랬다. 그래도 잘하고 싶었고 잘 나와야 해서 욕심을 내 여러 테이크를 갔다. 그런데 신기하게도 집중이 잘됐다. 나를 믿어주는 스태프들의 지지가 느껴지니 위축되지 않을 수 있었다.
이종민 나는 평소 문경 감독만큼 감정신에 대한 부담을 크게 느끼지 않는 편이다. 감독으로서 가장 아쉬운 부분이 남은 장면이다. 이때 한아와 철이 보는 영화가 <오즈의 마법사>인데, 저작권 문제로 결국 들어가지 못했다.
- 두 사람이 만드는 진짜 영화는 ‘영화감독 이기탁’(윤상화)을 추적하는 페이크 다큐멘터리 ‘지구 최고의 영화’다. 이기탁은 송철의 시나리오를 가로채 명성을 얻고, 한아의 배우 커리어를 망가뜨렸다. 스틸 속 두 사람의 얼굴이 흙투성이인 건 이기탁의 지하실에 갔다가 지구 멸망으로 지진이 났기 때문이다. 정말 예측할 수 없는 전개다.
염문경 사실 이날 크게 싸우고 찍었다. (웃음)
이종민 그래서 저렇게 눈도 안 마주친다. (웃음)
염문경 이때 말고도 엄청 싸웠다. 팀원들에게 안 들키는 게 큰 목표 중 하나였다.
이종민 우리는 속도가 다르다. 문경 감독은 1분 1초의 낭비도 용납하지 않는 효율파고, 나는 잠깐 생각할 시간을 달라는 말을 달고 산다.
염문경 종민 감독과는 오랜 연인이자 작업 파트너다. 많이 싸우더라도 그렇게 토론하고 대화하지 않았다면 나는 훨씬 더 분노쪽으로 치우친 사람이었을 것이다.
이종민 이 지하실 시퀀스에는 내가 메시지적으로 중요하다고 생각한 컷이 들어 있다. 밖으로 나가기 위해 한아와 철이 맞잡은 손이다. ‘지구 최고의 영화’ 파트가 후반부인데, 누군가를 혐오하는 마음으로 끝내고 싶지 않았다. 용기를 내 조금이라도 서로를 이해해보자는 마음을 그 손에 담고 싶었다.
염문경 지하실에서 맞잡은 손부터 먼저 밖으로 나온 한아가 안에 있는 철에게 “같이 가요”라며 손을 내미는 순간까지 모두 중요하다. 좋든 싫든 결국 함께 살아가야 하는 세상이라는 걸 말하고 싶었다.
- 이렇게 진지한 상황에서 괴생명체로 등장하는 대형 외눈박이 푸른 불가사리가 어설퍼서 웃음이 났다. 이런 B급 감성이 이 영화의 매력이기도 한데, 불가사리는 어떻게 탄생했나.
염문경 ‘펭수 작가’(염문경 감독은 <자이언트 펭TV>를 기획하고 구성한 작가이자 <만약에 우리>의 시나리오작가다.-편집자)이기도 하다 보니, 인형 같은 존재와 인간의 공존은 내게 자연스럽다. ‘다음 세상의 존재’인 외계인을 등장시키고 싶었다. 그 미래를 지배하는 건 바다 생물이라는 이야기를 들은 데다 영화에서 별을 오브제로 쓰고 있었기 때문에 불가사리를 택했다. ‘핼로윈 스타피쉬’를 검색해 가장 예쁜 걸 직구로 샀는데, 나중에 누가 그게 <수어사이드 스쿼드>에 나오는 괴물이라고 하더라. <수어사이드 스쿼드>측에서 몰라야 하는데….
이종민 우리 불가사리는 발광 효과를 넣어서 달라. 괜찮을 거야. (웃음)
- 한아가 이기탁과 만나 대화하는 장면은 공분을 살 만하다. 이기탁은 한아와 철에게 상처를 준 것에 죄책감이 없어 보이고, “다 너를 위해서”라는 그의 말에도 진정성이 느껴지지 않는다. 이기탁을 사과하는 인물로 그리지 않은 이유는.
이종민 그가 “미안하다”라는 말을 입 밖으로 꺼내는 모습이 상상이 가질 않았다. 그가 악인이라서가 아니라 실제 경험을 비추어봤을 때 그랬다. 윤상화 배우님이 연기를 워낙 잘해주신 덕분이기도 하지만 <지구 최후의 여자>를 만든 뒤 계속 다시 보면서 처음보다 이기탁을 더 이해하게 됐다. 어디선가 이해와 용서를 동의어처럼 쓴다는 말을 듣고 공감했다. 그동안 사실 나는 용서하고 싶지 않아서 이해하지 않으려 했던 건 아닐까. 이해하지 않는 일이 오히려 내가 나를 괴롭히는 것처럼 느껴질 때가 있다. 나를 위해서라도 이해하려고 노력해야겠다고 생각하게 됐다.
염문경 이 대화 장면은 호흡이 길어지더라도 꼭 살리고 싶었다. 이것 또한 한아와 철이 만든 극중극이라고 본다면, 저 장면의 이기탁은 한아와 철이 그를 최대한 이해해보려고 노력한 결과물인 셈이다.
- <지구 최후의 여자>로 첫 장편 데뷔를 했다. 앞으로 따로 또 같이 어떤 계획을 갖고 있나.
염문경 한동안 종민 감독과 남녀 관계에 집중한 이야기를 하다 보니 요즘은 여자들끼리의 관계가 궁금하다. 남의 시선을 신경 쓰지 않는 자유로운 여성들을 부러워하고 질투한다. 그런 마음을 스릴러적으로 풀어보고 싶다. 곧 볼 수 있는 연출작도 있다. 단편 애니메이션이고, 내가 속한 여성감독네트워크에서 제작했다.
이종민 한국예술종합학교 연극원 연기과에 아동청소년연극 전공이 있다. 그곳에서 매년 열리는 청소년 희곡 페스티벌의 PD로 일하고 있다. 9월 개막을 앞두고 한창 준비 중이다. 12월 말에는 국립어린이청소년극단 공연도 예정돼 있어 9월부터 연습에 들어간다. 어린이·청소년극이라고 하면 마냥 밝고 귀여울 거라 생각하기 쉽지만, 오히려 심오하고 다양한 감정을 불러일으킨다. 큰 기대를 안고 하반기에는 어린이의 세계에 머물러보려 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