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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 그러나 그들만의 역사에 눈물지었다 - 역사· 정치적 맥락으로 본 <디스클로저 데이>
유선아 2026-06-26

*<디스클로저 데이>에 대한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미지와의 조우> <쉰들러 리스트> <더 포스트>와의 유의미한 연장선에 있다는 점에서 <디스클로저 데이>는 정치영화다. 다니엘 켈너(조시 오코너)가 폭로하려는 워덱스사의 비리는 외계인 생체실험과 고문을 촬영한 영상이다. 외계인이 등장하는 영상의 진위는 몇초 만에 지나가는 대사 외에는 조작 가능성의 의혹을 전혀 받지 않는다는 설정과 현대의 영상 제작 기술의 발전 양상을 고려할 때 이 영화는 도무지 그 너머의 미래를 그린 공상과학 SF영화로 보이지 않는다. 컨트롤타워의 벽을 메운 수백대의 스크린이 빼곡한 저 세상의 현실에서 한치의 의심 없이 기정사실로 받아들여지는 폭로 영상 속의 사건은 그래서 공상과학 서사이기보다 역사적 사건 그 자체로 받아들여진다. <디스클로저 데이>에서 지극히 전형적으로 묘사된 외계인의 모습이나 그것의 매장 장면은 다른 누구의 역사가 아니라 스티븐 스필버그의 영화 안에서 다시 호명된 홀로코스트의 알레고리로 읽힌다.

과거의 기억이 우리를 이끌어주리라

<디스클로저 데이>

진실 폭로 영상 속 사건이 실제로 일어난 사건의 역사성을 가리키는 그 첫 번째 이유는 마거릿 페어차일드(에밀리 블런트)가 기억하지도 못하는 과거에서 기인한 직감으로 움직이는 인물이기 때문이다. 마거릿이 따르는 직감은 현재의 선택을 앞으로 밀어붙이도록 만든다. 이는 막연한 예감처럼 보이지만, 실은 마거릿과 다니엘이 과거에 외계인과 접촉했다는 사실, 그리고 그 기억이 소실된 뒤에 남은 감각에서 비롯된다. <디스클로저 데이>에서 중요한 위상을 차지하는 것은 무엇보다도 과거, 특히 과거에 일어났던 어떤 사건이다.

그래서 이 영화에서 플래시백이 작동하는 방식은 주목할 만하다. 마거릿과 다니엘이 기억을 되짚는 과정은 인물의 특정 기억으로 잠시 회귀하는 플래시백 편집으로 드러나지 않는다. 워덱스사를 배신하도록 다니엘을 회유한 조력자 휴고 웨이크필드(콜먼 도밍고)는 어떤 세트장이 만들어지고 있는 현장에서 등장하는데 그의 지휘 아래 축조된 실내 공간은 어린 마거릿이 살았던 집이다. 초능력에 가까운 예감으로 휴고가 기다리고 있는 세트장에 도착한 마거릿과 다니엘이 사라진 기억을 되찾는 데 마치 기념비 앞에 서서 역사적 사건을 기리듯 현재의 공간성이 필요했다는 사실은 그 사건이 단순한 과거가 아니라 역사적 성격을 지닌 것임을 시사한다. 두 사람은 현재에 조성된 과거의 장소 안에서야 비로소 재생되는 플래시백을 두눈으로 다시 목격한다.

워덱스 수장 노아 스캐런(콜린 퍼스)이 세트장에 들이닥쳤을 때 마거릿이 외계의 장치를 새로운 방식으로 사용하는 장면은 보다 노골적이다. 장치를 손에 쥐자 이상하게도 노아와 그의 수하는 마거릿과 다니엘 일행을 볼 수 없게 된다. 쫓는 자로부터 모습을 숨겨 도망치는 장면에서 시선을 빼앗는 것은 사용자에 따라 가지각색의 기능을 발휘하는 외계인의 장치이기도 하지만 시퀀스 전체는 역사의 유령이라는 고전적 은유의 틀을 벗어나지 않는다. 오래된 은유로 점철된 시퀀스는 이미 <쉰들러 리스트>를 비롯해 할리우드에서 익숙하게 반복 재현되었던 홀로코스트를 일관적으로 지시하며 그 기억을 일깨운다.

낡은 오리엔탈리즘은 어떻게 다시 불려나오나

<더 포스트>

스필버그의 SF영화는 때로 역사나 정치와 무관하지 않다. <미지와의 조우>의 우주선이 지구에서 첫 번째로 벌이는 신묘한 일은 1945년의 전투기를 사막 한복판에 드러내는 것이었다. 마거릿이 일하고 있는 캔자스시티 방송국은 북한발 위기로 제3차 세계대전을 앞둔 국제 정세를 보도한다. 동시대 영화가 전쟁과 타자를 다루는 방식을 비교한다면 제3차 세계대전은 공교롭게도 <시라트>에서도 발발한다. 전쟁도, 축제도 모습을 감춘 사막 위에서 <시라트>는 대신 레이버의 몸을 폭파하고 또 폭파한다. 피난민이 가득한 열차에 몸을 실은 세명의 레이버가 모로코인의 얼굴과 함께 카메라에 잡힐 때 <시라트>가 강박적으로 해체를 거듭해 당도한 곳은 전쟁과 난민의 정치성이 흐릿하게 지워진 완전한 타자의 얼굴임을 알게 된다.

다시 <디스클로저 데이>로 돌아오면 이곳은 북한이 군사적 긴장을 유발하고 세계 안보를 위협하는 역할을 맡은 세상이다. 불현듯 이것은 9·11 이후 할리우드영화가 이슬람권 국가를 호출하던 방식과 다르지 않으리라는 불길한 예감을 불러일으킨다. 우리는 이미 할리우드영화가 서남아시아와 아프리카 대륙의 분쟁 지역과 그 얼굴을 어떻게 불러왔는지 알고 있으며, 또 그 반복이 만들어낸 어마어마한 편견과 공포의 스테레오타입을 오랜 시간 목도해왔다. 난민 아니면 테러리스트라는 이분법으로 납작하게 눌린 지역성, 그 낡아버린 오리엔탈리즘의 자리를 적어도 이 영화 안에서는 북한이 대신 떠안는다.

<디스클로저 데이>가 가진 진짜 문제는 여기서 드러난다. 9·11과 빈 라덴 축출 이후 중동의 자리를 대체할 대상으로 북한을 소환한다. 그런 다음 다니엘이 빼돌린 워덱스사의 영상을 보도하기 위해 북한이 일으킨 제3차 세계대전이라는 영화적 사건을 변두리로 밀어넣는다. 만천하에 공개되는 워덱스사의 만행은 앞서 말한 대로 생체실험과 사살 후 매장으로도 충분히 설명할 수 있는 유대인 학살을 암시한다. 다른 누구의 역사가 될 수도 있다는 가능성을 열어두지 않는 이유는, 이 장면이 묘사, 재현되는 방식의 지극한 전형성으로 인해 타자의 역사로 확장되고자 할 의지가 없었거나, 확장하는 데 실패한 것으로 보이기 때문이다.

바로 이 점이 이 영화의 불편한 이중성이다. 미래 공상과학의 외피를 입고 영화는 과거의 역사와 그 비극을 기억해야 한다고 설파한다. 그러면서 동시에 미국영화가 북한을 무대 위에 불러세운 이유는 한반도 역사가 품은 동족상잔의 비극에 있지 않다. 할리우드에서 북한은 지정학적 정치성의 표상에 불과할 뿐이다. 더욱이 북한은 할리우드의 제작 자본과 얽힌 이해관계 바깥에 놓여 있기 때문에 더할 나위 없이 안전하게 구도화할 수 있는 대상에 다름 아니다. 홀로코스트의 기억을 보편의 이름으로 호출하면서도 북한이라는 타자의 역사성은 지워버린다.

워덱스사의 영상이 전파를 타는 순간, 속보를 보도하는 앵커가 즉시 드러내는 감정적 반응은 <더 포스트>가 붙들었던 언론 보도의 존엄과 진실이라는 가치 확인을 단번에 감상적 승인으로 뒤집는다. 팩트를 의심하지 않고, 영상 조작의 진위 여부를 거의 문제 삼지 않는 영화는 그 장면을 보며 관객이 어떤 역사적 사건을 떠올려야 하는지 다시 한번 강하게 지시한다. 비극의 역사를 잊지 말아야 한다는 명제는 옳다. 다만 <디스클로저 데이>는 그 옳은 주장을 나쁜 방식으로 펼쳐 보인다. 그래서 묻고 싶은 질문은 이 영화가 경유한 홀로코스트의 알레고리가 우리가 살고 있는 바로 지금 얼마나 유효했는지다. 현실에서 지속되는 신냉전의 기류와 영화에서 눈앞으로 다가온 제3차 세계대전의 개전을 배경으로 깔아놓고도 영화는 북한이라는 현실의 타자를 지정학적 위협의 기호로만 사용한 뒤 중심에서 밀어낸다. 대신 홀로코스트의 재현을 외계인의 수난으로 옮겨놓고 그 이미지에 눈물짓기를 요구한다. 폭로 영상의 전형성은 보편으로 나아가기 위한 채비라기보다 스필버그 영화 안에서 보존되어온 장면의 재확인에 가깝다. <디스클로저 데이>는 안전한 정치영화의 자리에 있고 싶었던 나머지 역사를 환기하는 알레고리를 오늘의 세계와 다시 접속하는 데까지는 나아가지 못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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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제공 유니버설 픽쳐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