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룸>의 주인공 클라크(추이텔 에지오포)는 실패한 건축가로, 자기를 해적 캐릭터로 탈바꿈시킨 대형 가구할인점의 주인이 된 지 오래다. 심리치료사 메리(레나테 레인스베)는 클라크의 결혼 생활까지 파탄낸 지독한 좌절감으로부터 그를 구제하기 위해 애쓴다. 어느 날 클라크는 가구점 지하의 벽 한쪽이 어딘가로 향하는 불투명한 막임을 알아차린다. 그곳은 용도를 알 수 없이 불분명하게 분할된 노란 방들, 좁은 통로, 가구를 삼킨 바닥, 미로 같은 중정과 위험한 수영장으로 이루어진 미궁이다.
2019년 인터넷 게시판에서 시작된 <백룸>의 원류, 리미널 스페이스(인적 없이 텅 빈 채 시간이 멈춘 듯하고, 낯익으면서도 미묘하게 어긋나 불안과 향수를 동시에 자아내는 공간)는 처음부터 유통 방식이 곧 형식의 조건이었다. 그럴듯한 이미지 한장이 인터넷 게시판을 통해 무한히 섞이고 스크롤되어, 마침내 끝도 없고 값도 없어지는 밈(meme). 케인 파슨스 감독은 이를 2022년 자신의 유튜브 채널을 통해 일종의 웹 시리즈로 발전시켰다. <백룸> 연작 24편은 어싱크 연구소라는 가공의 조직이 거대하고 대체로 비어 있으며 서로 연결된 ‘실내 복합체’를 탐사하는 과정을 파운드 푸티지로 그렸고 2023년의 <가장 오래된 풍경>은 구멍과 계단을 통과해 들어갈 수 있는 무한한 지하상가를 무대로 삼았다. 그중엔 백룸을 새로운 자원으로 인식한 연구소가 초대형 물류센터로 탈바꿈시키려는 프로젝트를 보여주는 영상도 있다. 더 많이 적재하고 유통하고 노동시키려는 무시무시한 공간에 괴물이 돌아다닌다는 설정은 <백룸>을 호러 이전에 고약한 농담으로 느끼게 했다.
물론 알레고리보다 중요한 건 블렌더로 저화질 변환한 비서사적인 영상들의 특정한 느낌이었다. 마크 피셔가 정의한 으스스함(the eerie)을 백룸도 정확히 갖고 있었다. 피셔는 저서 <기이한 것과 으스스한 것>에서 현존의 실패 또는 부재의 실패를 그 원천으로 짚는다. 사람이 있어야 할 공간에 사람이 없고(현존의 실패), 동시에 있으면 안되는 어떤 존재가 그 공간을 지배하고 있는 듯한 기미(부재의 실패)가 느껴지는 것이다. 요컨대 백룸의 으스스함은 익숙한 공간을 다시 인식 너머에 두는 선택에서 발생한다. 그런데 A24가 야심차게 내놓은 영화는 그 물음에 너무 친절한 심리적 해설을 내민다. 우리는 자아를 실현하지 못해 생긴 폭력성을 아내에게 쏟아내다 버림받은 남자가 “남 탓만 하다가” 타인들에게 상처주는 패턴을 반복하는 것을 본다. 매체의 이주라는 도전 앞에서 약 2800제곱미터에 달하는 실물 세트를 지은 프로젝트에 최소한의 서사적, 감정적 개연성이 요구되었음을 추측 가능한 대목이다.
백룸 공간을 한 남자의 이혼과 직업적 실패의 은유로 환원한 영화라면 <백룸>은 실패작이다. 러닝타임이 흐를수록 우리 바깥의 기이함이 우리 안쪽의 익숙함으로 뭉개질 운명이므로. 이 지점에서 흥미롭게 반격해오는 것은 백룸과 클라크의 상호작용이다. 영화가 그를 백룸에 당하는 피해자가 아니라 ‘백룸 들린’ 인간으로 그리는 데 주목하고 싶다. 클라크가 기어코 두 직원까지 데리고 백룸의 입구를 통과했을 때, 우리는 그가 최초 발견 이후 이미 수일 동안 혼자서 미궁을 조사했음을 한마디 대사로 듣게 된다. 그는 위험한 존재가 있다는 걸 안 뒤에도 이를 감수하고 마침내 주변 사람들까지 끌고 들어왔다. 직원을 밧줄에 묶어 지하통로로 내려보내는 일련의 장면들에서 클라크는 거의 조증 상태로 보이기까지 한다. 클라크의 백룸은 폐장한 가구 매장의 지하층 벽면에서 열린다. 만약 그곳이 실재하는 공간이었다면 재고를 보관하는 창고 정도가 있었을 법하다. 소비하는 세계를 실제로 돌리지만 소비자에게는 보이지 않도록 설계한 후방 말이다. 자본주의의 후방은 클라크의 상상보다 훨씬 크고 빠르게 증식하며, 사람이 빠져나간 뒤에도 형광등이 윙윙대고 인간 없이도 작동한다. 가구 판매인의 삶을 실패로 정의하는 믿음은 어디에서 왔는가. 파슨스의 영화는 노동과 소비의 공간들을 기이하게 집약한 모습의 백룸을 가리킨다. 결코 불 꺼지지 않는 이 거대하고 뒤틀린 후방은 현실에서 클라크에게 왕창 과금된 전기세 고지서의 형태로 압력을 행사한다. 백룸을 장소화된 후기자본주의와 능력주의의 무의식이라고 부른다면, 이 체제가 패자에게 남기는 것이 무엇인지 확연해진다. 그곳엔 현실의 수용 범위를 초과한 원한들이 산다. 요컨대 백룸은 망가진 인간의 내면 세계인 동시에 그 뒤에 숨어 영향력을 지우는 외부 세계의 표상이기에 진정 리미널 스페이스다. 백룸의 공포는 안으로 향하는 동시에 바깥으로 향한다.
같은 맥락에서 <백룸>은 파슨스의 백룸 콘텐츠가 처음 등장한 2022년과 또 다른 시의성을 갖는다. 영화 속 백룸은 “개를 모르는 사람이 개를 그리는 것처럼” 현실을 반영하되 디테일을 틀리게 현현시켜 결과적으로 나쁜 것을 반사하고 증폭하는 영역이다. <백룸>에 접속한 동시대 관객이 생성형 AI의 기분 나쁨을 떠올리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AI 모델이 학습을 반복할 때 오류가 누적되고 다양성이 무너져 ‘열화된 것의 열화’를 낳는 현상을 떠올리게 하는 것이다. 한 연구는 이를 의미심장하게도 ‘자가포식’이라고 부른다. 물류 창고보다 더 크고 무서운 데이터센터 시대의 후방에는 열화될 결과물을 알면서도 프롬프트를 강박적으로 반복 입력할 수밖에 없는 노동자들, 그리고 소비자들이 비친다. 끔찍한 결과물 앞에서 때때로 인공지능에 원한을 쏟아붓는 인간들은 다시 원한을 갖지 않기 위해 그들에게 생산성을 주문하다가 지쳐버린다. <백룸>에서 클라크가 복제품들의 살을 퍼먹고, 다시 복제품이 진짜 클라크를 잡아먹는 자가포식으로 이어지듯이.
공간(생산성과 능력주의의 비장소), 주체(그 공간이 제조한 원한의 패배자), 그리고 이미지(자기를 무한 재생산하는 AI 복제)라는 세 층위에서 <백룸>은 신자유주의의 호러로 기이하게 엮인다. 분열된 백룸 속 존재들처럼 의미는 곧잘 조잡하거나 막다른 궁지로 치닫지만 그 안에 관객을 가두고 연상하게 만드는 영화의 설계도는 분명 오래 들여다보고 싶은 무엇이다. 자본을 향한 이 독특한 기세의 장르물이 A24 역사상 미국 내 최고 흥행작으로 등극했다고 한다. 밈과 유튜브 재생목록을 뚫고 노클립해 들어간 영화 <백룸>은 이미 자본에 의해 회수되었고, 어쩌면 나는 내 생각보다 더 오래 이곳을 떠돌고 있었던 것 같다.
*노클립: 게임에서 벽·바닥 같은 막힌 곳에 충돌하지 않고 맵 밖으로 빠져나가거나 다른 공간으로 이동하는 일종의 오류 현상.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