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쉬었음 청년’은 ‘특별한 이유’ 없이 구직활동을 하지 않으면서 경제활동을 하지 않는 청년을 말한다. ‘이유’에는 이런 것들이 포함된다. 육아나 가사, 진학 준비, 육체적이거나 정신적인 문제로 일을 할 수 없는 경우나 가족을 부양해야 하는 경우 등. 이 용어는 청년 주체의 구직 의사의 부재를 ‘쉰다’는 동사를 통해 전적으로 개인의 의지를 기준 삼는다는 점에서 문제적이다. 예술인 청년은 어떨까? 많은 이들이 창작 활동을 지속하고 생계를 유지하기 위해 별도의 겸업을 한다. 얼마 전 종영한 드라마 <모두가 자신의 무가치함과 싸우고 있다>(이하 <모자무싸>)의 황동만이 떠오른다. 케이터링 알바와 학원 강사로 성실히 노동해온 동만은 ‘쉬었음 청년’에 집계되지 않는다. 하지만 그는 명랑한 실패자로 스무해나 버티어서 끝내 하고 싶은 일을 하게 되는 인물이며 그의 일대기는 ‘쉬었음 청년’을 주요한 예상 독자로 삼는다.
황동만은 그야말로 비호감인 인물인데 여러 결점에도 불구하고 시청자가 그를 끝까지 애정한다면 그건 그가 시청자가 수행할 수 없는 무엇을 여러 난관 속에서도 일관되게 몰아붙이는 캐릭터이기 때문일 것이다. 상황과 맥락을 불문하고 강박적인 수다와 높은 충동성, 자주 휘발되는 감정과 즉흥성 등 역시 이해관계와 이기심으로 구성되는 ‘어른’의 사회에서 살아남기 힘든 자질이다. 순수함과 천진함, 악의 없는 이타심, 그러나 남발되는 실수와 허점은 황동만을 결점이 많은 인물일지언정 타인을 압도할 만큼 위력적인 인물로 그리지 않기 때문에 시청자는 그를 미워하지 않는다. 동만이 보여주는 ‘날씨’의 해맑음은 어쩌면 한국(인)이 바람직하게 생각하는 이상적인 실패자의 형상이다.
문제는 <모자무싸>가 황동만의 성공 서사이지 성장 서사는 아니라는 것이다. 서사는 오직 입봉이라는 동만의 결핍을 채우는 목표에‘만’ 가까스로 성공하며 끝난다. 그러나 욕망이 곧 결핍의 충족과 같을 때 삶은 다소 피폐해진다. 욕망과 결핍이 서로의 필요악이 되면 성공과 실패의 이분법이 강화되고 삶의 불확실성은 점점 위험으로 변한다. 성공이 결핍의 충족 유무로 판정된다면, 성장은 그 충족과 무관하게 결핍이 현재 삶 속에서 마땅한 자리를 배정받는 일이다. 모두가 성공할 수는 없어도 모두가 성장할 수는 있다. 끝내 성공에 실패하는 자들의 성장이야말로 동시대의 우리에게 필요한 서사다.
유일하게 성장을 통과한 것으로 추정되는 인물은 오정희다. 그녀는 되돌아온 자신의 과거를 부정하거나 부끄러워하지 않고 인정한다. 배우로서의 성공은 ‘딸’과 ‘가족’이라는 결핍을 대리 보충하지 않지만 적어도 그녀는 그것에 휘둘리지 않는다. 그래서 마치 결핍이 없는 듯 보인다. 비록 성장의 결과가 타인에게 다소 유해한 지점으로 가닿는다는 점에서 시청자의 미움을 살 수 있지만 그녀의 지성과 통찰력, 재력은 마땅한 곳에서 발휘된다. 우리가 살아가는 ‘날씨’는 바로 그런 것이다. 모두에게 좋은 날씨는 없다. 맑은 날에는 우산 장수가 한숨 쉴 것이고 비가 오면 나들이를 계획한 이들이 실망할 것이다.
실패자가 되지 않기를 최초이자 최후의 목표로 익혀온 근대적 성공에 대한 한국의 집단적 열망은 해맑은 실패자가 끝내 성공의 차원으로 진입하는 서사를 환영한다. 중·노년 세대가 이 드라마에 열광하는 것을 보면서 마음이 착잡해진다. 구직 의사가 있느냐 없느냐, 노동을 하고 있느냐 아니냐가 문제가 아니다. 모든 청년이 불안에 시달린다. 각자의 욕망을 추구하는 것이 아니라 실패라는 결핍으로부터 벗어나기 위해, 가까스로 얻은 기회를 떨구지 않기 위해 자신을 기꺼이 희생하고 소진한다. 이것이 과연 개인의 문제일까? ‘쉬었음 청년’이라는 용어도 문제지만 성장에 대한 사회적 상상력의 결핍은 더욱 문제적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