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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신록의 정화의 순간들] 마감 압박
김신록(영화배우) 2026-03-05

아침 6시30분부터 30분 간격으로 눈을 뜨다가 9시에 거실로 나와서 노트북을 켜고 앉아 있다. 뭐라도 써보려고 주리를 틀며 앉아있다가 김혜순 작가의 <여성이 글을 쓴다는 것은: 연인, 환자, 시인 그리고 너>의 ‘초판 책머리에’와 ‘개정판에 부쳐’ 부분을 읽고, 텍스트 기획자이자 영화 도서 전문 편집자인 임유청의 <까마귀의 모음: 스몰톡> 팟캐스트에 올라온 ‘살아있는 자를 수선하기_연극, 그리고 원작 소설’ 에피소드를 듣다가 바닥에 놓인 빈백에 누워 까무룩 잠이 들었는데 꿈을 꾸었다.

나는 30대 초에 국가에서 기금을 받아 유럽과 미국의 이런저런 극단이나 연극 페스티벌 등을 찾아다니며 워크숍이나 세미나에 참여한 적이 있는데, 어찌 된 일인지 내 외모는 거실 빈백에 누워 잠든 지금의 나인데, 나는 다시 런던의 2층 버스에 앉아 있다. 이른 아침에 마감 못한 <씨네21> 원고를 쓰겠다고 노트북을 들고 호텔 로비인지 에어비앤비 거실인지에 나와 앉아 있었는데 같이 워크숍을 듣기 위해 모인 유럽 친구들이 오늘 하루는 관광을 하자며 길을 나서는 걸 얼결에 따라나선 것이다, 손에는 노트북을 들고. 꿈속의 나는 그 로비인지 거실인지에 망부석처럼 노트북을 끼고 앉아 어제 저녁도 굶고 오늘 아침도 굶고 끙끙대는 중이었는데, 지금 아니면 혼자는 런던을 돌아다닐 시간도 용기도 없을 것 같아서 유럽 친구들을 따라나선 것이다. 이 와중에도 운이 좋아서 나는 2층 버스 맨 앞자리에 앉아 있다. 시간은 째깍째깍 가고, 원고는 오늘 오전까지 최최최종 마감을 하기로 했는데, 시계는 벌써 10시를 넘어서고 있다. ‘빠앙~~~~~.’ 우리 버스가 뭔가 운전이 서툴렀는지 옆 차선의 2층 버스가 긴 경적을 울리며 우리쪽으로 머리를 들이밀더니 기사가 창밖으로 얼굴을 내밀고 눈을 부라리며 뭐라 뭐라 항의하는데, 이상하게 그 버스는 기사석이 2층에 있어서 고개를 내민 기사가 나를 똑바로 노려보며 화를 낸다. 나는 당황한 티가 나지 않게 원래 졸렸던 사람처럼 스르륵 옆으로 고개를 돌리고 흠냐흠냐 졸기 시작한다.

그렇게 잠깐 졸다 깨다 겨우 한 정거장을 갔나, 몸을 살짝 옆으로 돌리고 머리를 외로 두고 한손으로 머리를 받치고 조는 모습에, 뒤에 앉은 네덜란드 남자애가 ‘아시아 여자는 어쩌면 이렇게 아기 같냐, 귀엽다’는 말을 이상하게 한국말로 친구에게 건네는데, 나는 김혜순의 책을 읽다 잠들었는데도, 이 나이에 아기 같은 얼굴로 보인다니까 갖은 방면의 약자 위치를 점해서 도움을 좀 받아볼까 하는 얄팍하고 교활한 마음이 뭉근히 올라오면서 인종, 나이, 젠더, 계급 등에 대한 모든 정치적 거름망은 개나 줘버리고, 더 아기같이 보이려고 좌석 등받이에 얼굴을 파묻으며 흠냐흠냐 앉아 있는데, 친구들이 내 옆을 지나치는 것을 봐놓고도 내 귀여운 얼굴을 더 보여주려고 계속 흠냐흠냐거리다 우연이 슬쩍 밖을 내다보는데 친구들이 가방을 메고 버스 옆을 지나가고 있는 게 보인다. 어? 나는 잠깐 어리둥절했다가 부랴부랴 노트북을 챙겨 1층으로 내려가서 버스 기사에게 ‘저기요 내릴게요!’를 한국말로 외치고는 출발하려고 슬슬 움직이기 시작한 버스에서 혼비백산 펄쩍 뛰어내리고 보니, 친구들은 이미 사라지고 없다.

내린 곳은 해변인지 강변인지 물가인데, 무책임하게 노트북과 가방만 들고 즉흥적으로 친구들을 따라나선 터라 일정이나 행선지도 전혀 모르고 숙소 주소도 모르는 데다 어제 도착한 탓에 이 도시도 전혀 모르고 언제나처럼 핸드폰 배터리는 거의 없다. 일단 돌아가기 위해서는 여기서 버스를 한번 되짚어 타면 될 텐데, 방금 친구들을 찾아 잠깐 자리를 이동한 바람에 다시 정거장으로 돌아가려 길을 더듬는데도 가슴이 콩콩거리며 불안이 엄습한다. 마침내 버스에서 내린 곳으로 되돌아왔더니 이상하게 도로변에 있어야 할 정거장이 지하철역처럼 변해 있다. 분명히 여기가 내린 곳이 맞으면서도 동시에 지하철 입구가 틀림없다. 저 아래 지하철을 타고 온 걸 내가 2층 버스로 착각했나? 그럴 리가. 이것도 맞고 저것도 맞는데 이상하게 둘 다 틀린 것도 같지만, 일단 핸드폰을 꺼내 역명이 나오도록 사진을 찍는다. 그런데 내가 상행을 타야 돌아가는 것인지 하행을 타야 돌아가는 것인지, 내가 어느 방향에서 와서 어느 방향으로 가야 하는지 알 길이 없다. 어쩌면 핸드폰 메시지나 이메일을 뒤져보면 이 여행에 대한 정보가 있을지도 몰라. 초청장이랄지, 예약 내역이랄지, 뭐든. 그래 일단 어디든 자리를 잡고 앉아 핸드폰을 뒤져보면 뭐라도 나올 거야. 호텔 이름 정도는 찾을 수도 있을 거야. 그래, 그럴 거야. 그리고 일단 마감을 해야 해.

나는 근처에 있는 카페에 들어가려고 하는데, 해변인지 강변인지 때문인지 이런저런 카페들은 많은데 다들 좀 어수선하고, 이 와중에 글을 쓰려면 조용하고 이왕이면 커피가 맛있는 곳이면 좋겠다고 생각하며 두리번두리번 골목을 가로질러 운하를 건너는데, 런던에도 운하가 있었던가? 여기는 베네치아 리알토 다리 같은데? 한국인들이 심심찮게 보인다. 누군가 불시에 ‘신록 배우님!’ 하고 불러서 휙 돌아보니, 벌써 여러 번 공연을 보러 와서는 편지를 주고 가고 다음 공연 때면 문 앞을 지키고 섰다가 ‘내 편지 읽었어요? 내 이름 알아요? 모르죠! 모르죠?’ 하던 팬과 닮은 젊은 한국 여자가 서 있다. 내가 ‘안녕하세요’ 인사하고 돌아섰더니, ‘오!’ 하며 같이 있던 친구에게 ‘거 봐!’ 하는데 나는 ‘거 봐!’가 좋은 뜻인지 나쁜 뜻인지 이런 뜻인지 저런 뜻인지 알 길 없이, 곧장 뭔가 잘못하거나 빚진 사람이 된 것처럼 위축된 마음이 들어 서둘러 마스크를 쓰고 자리를 뜨는데, 이번에는 어제 이곳에서 벌어졌던 살인사건을 현장검증하는 일단의 경찰과 살인범 무리와 마주친다. 살인범은 이상하게 오래된 홀로코스트 영화에서나 봤을 법한 회색 줄무늬 유대인 죄수복을 입고 손에는 밧줄로 된 포승줄을 찬 채로 계단 맨 아래 칸 층계참에 비스듬히 누워 뭔가를 재연하고 있는데, 나는 핸드폰 배터리가 없어도 이건 놓칠 수 없다며 핸드폰으로 사진을 찍는다. 가방에 케이블이 있으니 카페에서 핸드폰을 충전하고 커피를 한잔 마시면서 12시가 되기 전에 어서 빨리 원고를 마감해서 넘기자, 생각하며 다시 서둘러 카페를 찾아 나서는데, 해변인지 강변인지에 가까이 갈수록 펍이 많아지고 카페도 대형 카페 위주가 돼 마땅한 자리를 찾기가 어렵다. 어수선한 골목을 쭉 따라 들어가니 안쪽 끝에 작은 카페가 하나 눈에 들어온다. 손님은 한명도 없고, 창가쪽 자리가 그나마 눈에 드는데 바이브가 본때 없는 가성비 테이블을 들여놓은 한국 카페 같아 약간 아쉽다. 카운터 위쪽에는 가로로 길게 걸린 녹색 칠판에 분필로 메뉴들이 적혀 있고, 역시 분필로 ‘공연 후의 휴식을 위하여’ 정도의 문구가 영어로 적혀 있다. ‘세상에 나는 어떻게 외국에 와서도 이런 카페에 들어오게 되나.’ 신기해하면서 이상하게 손님이 아무도 없는 것으로 보아 커피가 맛이 없나보다 하며 살짝 아쉬운 마음으로 계산대에 서 있는데, 번뜩 눈이 떠지면서, ‘이걸 받아 적자. 이것이 원고다!’라는 생각이 들어, 나는 서둘러 빈백에서 일어나 비몽사몽간에 다시 거실 테이블에 앉는다.

일단 커피를 내리자. 커피를 마시면서 이 꿈 이야기를 쓰고 이걸 어제 공연 끝나고 집에 와서 써놓았던 원고 앞에 붙이자. 나는 커피를 내리러 주방으로 간다. 목이 따끔거린다. 잠깐 거실에서 눈을 붙이는 동안 감기가 들었나. 그렇다면 정말 망하는 거다. 오늘도 공연이 있고, 촬영 일정도 줄줄이고 주말에는 낮 공연, 밤 촬영 일정도 있다. 커피머신 켜지는 소리, 원두 가는 소리, 커피 빈 압착하는 소리, 커피가 머그잔으로 떨어지는 소리. 언제부터 커피머신 소리가 저렇게 컸지? 커피 향이 날아들기를 기다리는데 이상하게 아직이다. 혹시 코가 막혀서 그런가? 나는 몇 차례 킁킁거리며 얕고 빠른 심호흡을 해본다. 커피 향은 여전히 아직이다. 코가 막히면 끝장이다. 이미 무대에서 콧물을 얼마나 닦아내고 있는데 환절기라고 비염이라도 도지거나 코감기라도 걸리면 정말 절망이다. 커피가 다 내려왔다고 기계가 잉~ 하고 스스로 정비하는 소리가 들린다.

커피를 한 모금 마신다. 뜨거운 액체가 따끔거리는 목구멍을 훑고 지나간다. 아, 꿈속에서 커피를 한 모금이라도 마시고 눈을 떴다면 좋았을 것을. 어떤 향과 맛이 나는 커피였을까. 나는 또다시 커피를 홀짝이며 여러 날에 걸쳐 다급하게 뭐라도 휘갈겨놓은 글들을 훑어본다. 뭐라도 건져 올릴 것이 있을까. 홀짝. 이 부분은 어떨까.

“어떤 날의 공연은 마치 숨구멍이 난 빵 반죽처럼 기분 좋게 부풀어 오른다. 온도, 습도, 미생물의 움직임 등이 연합해서 내가 힘들여 빚는 것보다 훨씬 맛있게 수월하게 우아하게 부풀어 오른다. 오늘 공연이 그랬다. 사실 오늘은 공연이 있는 날치고는 이례적으로 바쁜 날이었다. 보통 공연이 있는 날이면 촬영은 물론 거의 모든 일정을 빼고 집에서 조용히 운신한다. 머릿속으로 공연의 세부와 대사를 짚어가며 런을 돌고, 책상에 올라와 있는 책들을 뒤적여 몇 페이지 정도를 읽어내면서 이미지와 상상과 사유의 길을 열고, 점심을 만들고 차리고 먹고 치우고 커피를 내리고 마시며 사물과 접촉하는 오감을 잘 열고 누리고, 정해진 시간이 되면 한 시간 음성 훈련을 하고 다음 한 시간 운동을 한 다음 콜 시간에 맞춰 극장으로 간다. 콜 시간 전후로 가볍게 저녁을 먹고 분장을 받고, 잠깐 무대를 밟으며 공간을 점검하고, 다시 분장실로 돌아와 마지막으로 몸을 풀고 의상을 입는다. 그러면 공연 시작 예비 종이 울리고, 최종 점검을 마친 나는 소대로 향한다.”

너무 이상적인, 표백된 배우의 모습 같은가? 그렇다면 이 부분은? 홀짝.

“이대로 가다가 어디에 가닿을까. 하루의 스케줄은 복잡다단하고 이 세계와 저 세계를 혼이 쏙 빠지게 왔다 갔다 하면서 발만 적시고 돌아다니느라 발은 늘 축축하고 무거운데, 무슨 일에든 머리까지 푹 담가본 적이 아득하니 얼굴은 속 건조가 심각하다. 피부과를 가야지.”

아니면 여기? 홀짝.

“오랜만에 광역버스를 타고 달리니 여행 가는 기분이 든다. 지방 소도시에서 혼자 버스를 타고 이동하는 가벼운 이방인이 된 기분. 날이 정말 좋다. 봄인가. 드디어 가뿐한 마음으로 산책할 수 있는 계절이 오는구나. 창밖으로 코끼리 베이글이 보인다. 한강을 끼고 달리는 기분이 좋다. 지금 상암에서 강남 가는 1시간 동안 버스 안에서 쓴 이 글로 마감을 해보는 건 어떨까, 하는 아이디어가 스치자 즉시 상념이 생각이 되고 생각이 의도가 되기 시작한다. 의도, 하기로 한 것, 계획, 설계, 그 모든 인식의 결과를 되돌려 스스로 구현되기 위해서는 혹은 반대로 설계가 피부를 입기 위해서 필요한 것은 무엇일까.”

윙~~~~ 커피머신이 꺼지면서 요란한 소리를 낸다. 12시35분. 악! 오전까지는 정말이지 마감을 했어야 했는데…. 지금이라도 마감하자. 담당자님은 점심 드시고 계실 거야. 점심 드시고 오시면 이 원고가 때늦은 생일 선물처럼 도착해 있을 거야. 이 원고를 최최최종고로 보내버리고, 다 잊고, 오늘 저녁 공연을 위해 이상적인 배우의 모습으로 돌아가자. 점심을 만들고 차리고 먹고 치우고 커피를 다시 내리고 마셔보자. 책상 위의 책을 다시 들춰보고 시간 맞춰 음성 훈련을 하고 운동을 하고 공연을 하러 극장으로 가보자. 오늘도 나는 이렇게 어수선하지만 공연이 나를 앞질러 스스로 알아서 맛있게 수월하게 우아하게 부풀어 올라줬으면. 부디. 그런데 그 골목 끝 카페의 커피에서는 어떤 향이 났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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