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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뷰] 영화가 요구하는 대로, <레이의 겨울방학> 박석영 감독
이유채 사진 백종헌 2026-02-26

<샤인>(2023)을 마친 뒤 박석영 감독은 지쳤다. 10년간 장편 5편을 쉬지 않고 만드는 동안 고비는 늘 있었으나 이번에는 일을 그만두어야 할 시점이라고 느낄 만큼 코너에 몰려 있었다. 첫 장편 <들꽃>부터 함께해온 이성은 촬영감독도 위태롭기는 마찬가지였다. 둘 다 휴식이 절실했다. 박석영 감독이 이성은 촬영감독에게 일본 여행을 제안한 건 그 때문이었다. 충분히 먹고 놀되 사실 다시 시작할 용기를 얻으러 간 타국에서 영화 친구들은 원하는 걸 얻었다. 박석영 감독이 여섯 번째 장편 <레이의 겨울방학>에 유독 깊은 감사를 표하는 이유가 바로 거기에 있다.

- 도쿄에 사는 일본인 중학생 레이(구로사키 기리카)와 일본에서 일하는 아빠를 보러온 한국인 고등학생 규리(정주은)가 친구가 되어가는 이야기다. 출발점은 구로사키 기리카 배우였다고.

구로사키 기리카는 미국에서 함께 공부한 내 베스트 프렌드이자 영화에서 레이의 아빠로 출연하는 쓰루타 고조의 딸이다. 처음 기리카를 본 건 아내와 고조 집에 놀러 갔을 땐데 그때부터 좀 놀라웠다. 기리카는 서툰 영어지만 매너 있게 먼저 말을 걸며 분위기를 편하게 만들었다. 자기는 엘리베이터 대신 뛰어올라간다고 하더니 먼저 도착해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는데 알고 보니 농구부였다. 볼수록 건강하고 자립적인 면모가 좋아 내 영화에 출연해보면 어떻겠냐고 제안했더니 재밌겠다고 하더라. 그로부터 1년 뒤에 두 소녀가 가까워지는 이야기를 가지고 진지하게 출연 의사를 물었고 가족의 동의를 얻었다. 현장 스태프는 이성은 촬영감독, 정대희 프로듀서, 남혜연 녹음기사, 나까지 해서 단 네명. 최소한으로 꾸렸다. 갈수록 규모를 줄이는 방식으로 영화를 만들게 된다. 마음 맞는 동료끼리 모여 각자가 할 일을 척척 하는 게 편하고 좋다.

- 구체적인 시나리오가 없었다고. 어느 정도의 계획을 세우고 일본을 다시 찾았나.

사실 내용이라고 할 것도 없었다. 겨울방학에 할 일이 없는 중학생 농구선수 레이가 규리를 만난다, 정도였다. <샤인>을 함께하며 내게 또 다른 놀라움을 안긴 정주은 배우가 기리카를 만나 가까워지는 모습을 카메라로 담고 싶은 마음이 더 컸다. 기리카 가족이 실제로 가는 공원, 농구 연습하는 곳, 놀이공원 등 리스트를 받아 그곳들을 돌며 중간중간 쉬면서 10일간 촬영했다. 레이의 집도 실제 기리카네 집이다. 첫 촬영날에야 이 영화가 어떻게 흘러갈지를 알았다. 초반에 레이가 자기 전에 누워서 ‘난 뭐가 되고 싶은 걸까’라고 오리 인형에게 묻는 장면이었다. 운동선수, 우주비행사, 선생님 등 직업을 하나씩 말하는 동안 기리카는 정말 자신의 미래를 머릿속에 그려보는 사람의 얼굴이었다. 그동안 어떤 배우에게서도 본 적 없는 연기를 보면서 이번 영화가 정말 훌륭해지겠다고 생각했다. 같은 날, 이성은 촬영감독도 비슷한 경험을 했다. 레이의 오빠이자 기리카의 친오빠인 히로키(오다 신이치로)가 아침에 일어나는 숏을 찍으면서 이 영화가 고정된 숏과 팬(pan)으로 이뤄질 것이라는 걸 알았다고 한다.

- 농구로 처음 만난 레이와 규리는 벤치에 앉아 서툰 영어로 대화를 한 뒤, 다음날 만날 약속을 잡을 만큼 친해진다. 영화의 목적이기도 했던 두 배우의 투숏을 실제로 지켜보니 어땠나.

현장에서도 편집실에서도 두 사람이 이야기를 시작하면 입 벌리고 보기 바빴다. 당연히 정해진 대사는 없었고 처음 얘기해 쑥스러운 상황에서 둘은 실제로 대화를 나눴다. 엄연히 인물 안으로 들어간 배우들의 대화였다. 서로를 향한 호기심이 얼굴에도 목소리에도 담기는 걸 보고 들으면서 이 순간이 정말 귀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릴 적 해질녘까지 놀다 친구와 헤어진 뒤 혼자 집으로 돌아가던 길의 아쉬움이 문득 떠올랐다. 그건 틀림없이 내 안에 있던 감정인데, 그 중요한 걸 살면서 스스로 지워버린 것만 같아 이상한 기분이 들었다. 무엇보다 연기란 본질적으로 무엇인가를 고민했다. 두 배우가 말 그대로 엉망진창, 영어 문법이 하나도 안 맞는 말을 하는데도 다 알아듣겠고 심지어 한마디 한마디가 감기듯이 마음에 들어오는 게 신기했다. 연출자로서 배우에게 시나리오 속 대사와 장면을 그대로 구현하라고 디렉션을 주는 게 맞나 싶더라. 그 결과가 잘한 연기일 수는 있어도, 진짜와는 거리가 있을지도 모른다. 앞으로는 배우에게 여유를 주고, 맡은 인물에 대해 함께 깊이 고민하는 시간을 반드시 확보하겠다고 마음먹었다.

- 후반부에 두 사람은 인근 가마쿠라로 놀러 간다. 지하철 안에서의 시간을 직접 보여주는 대신에 창밖 풍경을 넣었다. 만약 전자를 택했다면 러닝타임이 74분보다 더 길어졌을 텐데, 그러지 않은 이유는.

촬영 전에는 두 사람이 기차를 갈아타는 모습도 찍고, 이동하는 동안 무엇을 하는지도 담으려 했다. 그런데 막상 본 촬영에 들어가면서 나도 촬영감독도 생각이 바뀌었다. 여정을 구체적으로 보여주면 그건 분명 음악이 들어가는 시퀀스가 됐을 것이다. 흔들리는 기차 안에서 두 사람이 간식을 먹고 바다를 바라보는 장면 위로 음악이 흐르는 순간, 영화는 귀여운 아이들이 놀러 가는 여행영화가 될 게 뻔했다. 그건 우리가 원한 방향도 아니었고, 그동안 견지해온 두 사람을 바라보는 시선과도 달랐다. 지나치게 아름다운 것은 찍지 말자는 생각을 그래서 했다.

- 가마쿠라에 도착한 두 사람의 첫 모습을 보고 싸운 줄 알았다. 규리는 고개를 숙이고 있고 옆에 앉은 레이는 표정이 좋지 않다.

그건 둘 다 졸려 가지고…. (웃음) 꽤 고단한 일정이었을 것이다. 구상할 때는 가마쿠라에서 서로에게 선물을 주고받거나, 무언가를 잃어버려 함께 찾아다니는 장면도 생각했었다. 그런데 막상 촬영에 들어가니 아이들도 지쳐 있었고, 이 여행은 시작과 동시에 끝나야 한다는 예감이 들었다. 두 사람이 바닷가에서 추억을 쌓아 한층 가까워지는 건 원치 않았다. 우연히 어느 시기에 만나 서로 좋은 것을 주고받다가 나중에 다시 만날 수도, 그저 한때 좋은 기억으로 남을 수도 있는 사이. 그 정도의 거리를 둔 관계가 인간에게 필요하다는 걸 영화를 찍는 동안 깨달았다.

- 그간 다양한 연령대의 여성 캐릭터의 삶과 그들의 관계를 비쳐왔다. 차기작의 주인공도 여성인가.

자매가 주인공이고 <세상의 끝>이라는 가제를 붙였다. 남성주인공은 내가 같은 남자로서 잘 안다는 착각에 자세히 들여다보지 못할까봐 잘 안 쓰게 된다. <세상의 끝>은 어느 날 갑자기 가족과 완전히 연락을 끊은 언니를 찾으러 동생이 카자흐스탄으로 떠나는 이야기다. 촬영이 끝나봐야 명확히 알겠지만 이 작품은 세상에서 사라지고 싶은 사람을 인정해주는 이야기에 가까울 것 같다. 언니는 우크라이나에 폭탄이 떨어지는 일을 자기 손가락이 부러지는 것만큼 아파하는 인간이다. 태생적으로 세상의 모든 고통을 자기 피부처럼 느끼기에, 스스로를 고립시킬 수밖에 없다. 갈수록 무감각해지는 시대에 그런 사람이 보고 싶어졌다. 지금 촬영 초반인데, 부지런히 찍어서 올해 안에 일곱 번째 장편영화를 내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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