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학 시절의 일이다. 살림이 조금 펴자, 작게나마 뒤뜰이 있는 개인 주택을 선택했다. 과일나무가 두어개 있었는데, 살구 종류였던 것으로 기억한다. 익을 때까지 매달려 있다가 떨어진 것들을 주워 먹으면 꽤 맛이 좋았다. 늘 부족한 타국살이에서도 잠시나마 풍족한 기분을 누리기에 충분했다. 문제는 그것이 필요할 때마다 잘 익어 떨어져주는 게 아니란 데 있었다. 풍요를 즐길 수 있는 시기는 끽해야 몇주 정도였다. 여기저기 잔뜩 떨어진 것들을 골라 담아서 냉장고에 넣어둔다고 한들 오래 갈 수 없었다. 겉보기엔 멀쩡했던 녀석들이라고 해도 그 안에 이미 자리를 차지하고 있었던 주인들이 이내 고개를 들었다. 옛사람들이 왜 그렇게 저장식품을 만들어두려고 했는지 이해가 갔다. 지천에 깔려 썩어나가는 것들이 아까워서, 또 당장은 입에 물리지만 조만간 아쉬워질 것임에 분명해서, 여차하면 잼이라도 만들어둘까 싶었다.
특정 시기의 풍요는 나 같은 인간뿐 아니라 동물들도 방자하게 만듦이 분명했다. 바닥에 널린 과일들을 집어 보면 작은 홈이 한두개씩 팬 것들이 많았는데, 필경 청설모들이 한두입 베어 물고는, 상대적으로 맛이 없어서든, 사치에 겨워서든 옆으로 던져둔 모양이었다. 하지만 가을을 지나 겨울로 갈수록 바닥에 떨어져 있는 것들이 나날이 줄어들었다. 낙과가 멈춰서이기도 했고, 벌레가 먹어치우거나 썩어서 사라지기도 했지만, 그제야 청설모들이 아쉬움을 느끼게 되어서였다. 녀석들의 입은 한때 흔하고 맛없게 느껴졌던 것들에게서조차 서서히 소중함과 맛남을 발견하게 되었을 테다. 거만한 몸짓으로 이것저것 건드리고 다니던 녀석들도 차츰 절박한 손놀림(아니, 앞발놀림이라 해야 할까?)으로 풀숲을 뒤지는 일이 잦아졌다. 친구에게서 배운 경상도 사투리로 말하자면, 실로 쭈굴시러워지는 순간이다. 멀찍이서 그걸 지켜볼 때마다, 어쩐지 놈들의 얼굴에서 회한이 스쳐가는 듯했고, 심지어는 짜증과 안타까움이 섞인 욕설을 뱉는 게 아닌가 싶은 착각마저 들었다.
물론 이것은 인간인 나의 감정이입에 불과할 게다. 많으면 누리고 부족하면 희구하는 것이 자연스러운 청설모에게 오만이니 비굴(혹은 쭈굴)이니 하는 건 애초부터 하나의 범주로서 존재하지 않는 태도일 수도 있다. 하지만 적어도 인간은 그렇다. 결핍은 우리를 애처롭게 만들고 풍요는 우리를 거만한 상태로 이끈다. 거만의 반대가 비굴이라고 한다면, 그것이 반드시 결핍에서 나오는 것만은 아닌 것 같다. 풍요를 경험했다가 추락했을 때, 혹은 남의 풍요에 견주어 나의 결핍을 새삼 강렬히 확인하게 될 때, 그러고 나서 어떻게든 풍요를 얻고 싶을 때 생기는 게 아닐까. 인간의 풍요와 결핍은 자연적인 것을 넘어 말 그대로 ‘인위적인’ 상태로서 부풀려져 있기 십상이라서 더 그렇다. ‘풍요’의 자리에 권력이나 부를 위치시켜보면 그 느낌이 더욱 뚜렷해질 테다.
그렇게 우리 인간은 애처로워졌다가 오만해졌다가 종종 비굴해진다. 최근 정치권이나 경제계, 그리고 그에 연루되어 있는 학계, 업계, 언론계 등등의 온갖 ‘계’들을 보고 있노라면 드는 생각이다. 지금만 그런 것은 아니니 새삼스러울 일도 없지만, 이제 반백이 넘은 나이로 관찰해본 바에 따르면, 점점 더 그렇게 되어가고 있는 것만은 또 분명한 것 같다. 입맛이 쓰다. 냉장고에 넣어둔 귤 한 조각 떼어 물면 조금은 달달해질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