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 중학생 레이(구로사키 기리카)의 고민은 겨울방학에 정말 할 게 없다는 것이다. 아빠(쓰루다 고조)는 일로 바쁘고, 엄마는 할머니 간병 때문에 집을 비운 지 한달째다. 오빠 히로키(오다 신이치로)는 독립해 살고 있으니 가족여행은 기대하기 어렵다. 동아리에서도 별다른 연락이 없는 상황에서 레이는 혼자 보내는 시간을 어떻게 채워야 할지 막막할 뿐이다.
레이는 만날 친구는 없지만, 친구를 만들 용기는 있다. 공원 농구장에서 누군가 자신의 농구공을 만지작거리고 있는 걸 보고 “같이할래?”라며 먼저 말을 건다. 상대가 일본어를 알아듣지 못하는 모습을 보고도 물러서지 않는다. 서툰 영어로 다시 말을 걸고, 그렇게 한국인 소녀 규리(정주은)와 즐겁게 시간을 보낸다. 재미의 여운을 안은 두 사람은 헤어지기 전, 다급하게 내일도 보기로 약속한다.
누군가와 가까워지고 싶어 하는 우리의 모습은 어떨까. <레이의 겨울방학>에는 이제 막 시작되는 우정의 반짝임이 고스란히 담겨 있다. 내 취향을 정성껏 설명하느라 멈추지 않는 입과 손, 내가 좋아하는 애니메이션을 상대도 좋아한다는 사실을 알았을 때 반가워 커지는 눈. 그 들뜬 얼굴은 기억 속 첫 만남의 기적을 끄집어낸다. 두 친구가 나누는 건 좋아하는 것만이 아니다. 바쁜 아버지에 대한 서운함, 적막한 공간에 홀로 남겨진 외로움, 되고 싶은 게 없는 미래에 대한 막막함은 두 사람의 심리적 유대를 깊게 한다. 레이와 규리의 말이 서로에게 한번에 정확히 전달되는 일은 거의 없다. 현재와 과거, 미래 시제가 뒤섞인 어설픈 영어 대화 속에서 하고 싶은 말은 자주 경로를 이탈하고, 되묻는 과정을 거치며 멈춘다. 그럼에도 대화를 이어가려는 의지가 끝내 상대에게 닿게 한다. 마침내 서로의 입에서 ‘understand’, ‘me too’라는 공감의 말이 터져나올 때, 진심이 거기에 있는 것만 같다. 갑자기 터져 나오는 웃음처럼 자연스러움이 살아 있는 <레이의 겨울방학>은 흘러가듯 완성된 프로젝트다. 박석영 감독은 일본인 영화 동료의 딸인 구로사키 기리카를 만난 뒤, 그의 단단한 면모에 깊은 인상을 받아 그를 주인공으로 한 영화를 구상했다. 전작 <샤인>에 출연한 정주은 배우와의 조합을 떠올리며, 두 소녀가 가까워지는 이야기를 품고 1년 뒤 촬영을 위해 다시 일본을 찾았다.
영화는 이제 막 친구가 된 소녀들에게 우여곡절의 사건을 던져 급하게 성장시키려 하지 않는다. 친구와 농구하고, 놀이공원에 가고, 한집에 모여 수다를 떠는 순간들은 어쩌면 밀린 방학 일기에 ‘재밌었다’라는 한줄로 끝날지도 모른다. 특별한 배움도, 분명한 깨달음도 없이 지나가지만 지금의 이들에게는 그런 시간이 필요하다는 영화의 수평적인 시선이 미덥다. 덕분에 <레이의 겨울방학>은 겨울을 배경으로 하고 있음에도 끝내 봄처럼 따뜻하게 남는다.
close-up
규리는 배가 고프지 않은데도 전화로 계속 밥을 먹으러 나오라는 아빠가 귀찮고 싫다. 이후 레이와 밖으로 나온 규리는 “너희 아빠는 어떤 분이셔?”라는 질문을 받는데 의외의 답변을 내놓는다. “베리 인조이.”(very enjoy) 아무리 아빠가 미운 상황에서도 ‘우리 아빠’를 좋은 사람으로 소개하고 싶은 딸의 태도가 애틋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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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이의 겨울방학>에 “같이할래?”가 있다면, <우리들>에는 “그러면 언제 놀아?”가 있다. 누나 선(최수인)이 동생 윤이(강민준)에게 널 때리는 연호에게 맞서 싸우라고 하자, 윤은 그렇게 서로 싸우다 보면 정작 놀 시간은 없어질 거라고 말한다. <레이의 겨울방학>의 대사 역시 버금가는 울림을 남긴다. 누군가와 가까워지고 싶을 때 필요한 말은 이런저런 미사여구 없이 ‘같이’라는 한마디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