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년, 배우 이희준은 소속 극단 ‘공연배달서비스 간다’의 공연을 위해 처음 <직사각형, 삼각형> 대본을 썼다. 직접 무대에 오르는 대신 작가로만 참여한 이 작품은 6년이 흐르도록 그를 따라다녔다. 영화로 남겨두지 않으면 후회할지도 모른다는, 찜찜한 예감의 형태로 말이다. 마음의 돌부리를 걷어찬 건 2024년이다. 그는 단편 <병훈의 하루>(2018) 이후 오랜만에 감독의 자리에 앉아 동료들을 불러모았다. 배우 진선규가 주연을 맡고, <살인자ㅇ난감>의 박세승 촬영감독이 카메라를 잡고, 이희준의 아내 이혜정과 <황야>의 허명행 감독이 카메오로 등장하는 46분의 중편 <직사각형, 삼각형>은 2025년 제26회 전주국제영화제를 거쳐 1월21일 개봉했다. “내가 보고 싶은 영화를 찍는” 연출자의 긴 여정이었다.
- 단편 <병훈의 하루>와 <직사각형, 삼각형> 사이에 7년 가까운 간격이 있다. 다시 연출을 결심하기까지 어떤 세월을 겪었나.
<병훈의 하루>를 3회차 찍고 5kg이 빠졌다. 제작, 연출, 연기까지 하니 쉴 시간이 없더라. 그만큼 깊이 몰입했지만, 촬영을 마치자마자 병원에 갈 정도로 건강이 상해 고생했다. 그럼에도 계속 창작을 하고 싶어 <직사각형, 삼각형>을 바로 써뒀다. 이 또한 영화로 찍어보려다 ‘재밌게 썼으면 됐지, 뭐 하러 더 고생하나’ 싶어 묵혀뒀다. 그러다 2024년에서야 문득 내가 6개월 뒤에 갑자기 죽게 된다면 무엇이 아쉬울지 고민해봤다. 아이와 시간을 많이 못 보낸 것, 그리고 <직사각형, 삼각형>을 영화로 찍지 않은 것이 딱 떠올랐다. 너무 늦어서는 안되겠다고 다짐한 지 두달 만에 촬영에 들어갔다.
- 희곡이 원작이자 영화로도 제작된 작품 <대학살의 신>(2012)을 보고 <직사각형, 삼각형>을 쓰게 됐다고.
나는 배우이다 보니 어떤 작품에서든 연기를 가장 중요하게 본다. <대학살의 신>은 한집에 모인 네 배우가 위기를 만들었다가 풀어가면서 고조를 이룬다. 연출도 연출이지만 연기의 매력이 크다. 내가 처음 영화 <대학살의 신>을 봤을 때만 해도 한국에 <완벽한 타인>(2018)이 나오기 전이었다. (웃음) 한국에도 이런 작품이 있으면 참 좋겠다는 바람을 품고 있다가 처가에서 식구들과 나눈 대화 덕에 순간 아이디어가 번뜩였다.
- 어떤 대화였을까.
설거지는 누구의 일인가! 제사는 누구의 일인가! 실제로는 우리를 이렇게 열심히 싸우게 만드는 주제인데, 연극이나 영화에서는 잘 들리지 않는 것 같더라. 마침 법륜 스님이 직사각형과 삼각형의 예를 들어 서로의 관점이 다를 수밖에 없음을 말하는 즉문즉설을 듣고 이 주제와 일맥상통한다고 느꼈다. 그렇게 스님 말씀에 귀 기울이며 수행해도, 행복해지는 법을 깨달은 것만 같아도, 그게 웬만큼 쉬운 일이 아니라는 것까지 말하고 싶었다.
- 직접 연기하고 싶은 배역을 염두에 두고 쓰기 시작했을 텐데.
당연히 (진)선규 형이 맡은 연예인 사위 준호 역할을 하고 싶었다. 전문 작가가 아니기 때문에 내가 아는 범위에서 인물을 상상하기 마련인데, 연예인 사위로서 경험하는 독특한 지점들이 있거든. 동서와 똑같이 추석에 고기 선물 세트를 해도 장모님이 내 선물을 더 맛있게 드신다든지, 내가 어떤 배우와 일하는지 관심을 보이신다든지. (웃음) 가족들의 그런 표현을 다 들어주고 너스레를 떨며 집안 자체의 연예인이 되어주는 것도 연예인 사위의 몫이라고나 할까. 그래서 마지막까지 내가 맡을지 말지를 고민하다가, 감독으로서 어린이와 고양이까지 하면 거의 10명의 생명체가 이루는 앙상블을 책임져야 하니 욕심을 내려놓았다.
- 결국 준호 역은 오랜 극단 생활의 동반자인 진선규 배우가 맡았다.
연기하기 쉬운 듯 어려운 역할이다. 준호는 가족들에게 아부도 잘하지만 그게 너무 가식적으로 보여서는 안된다. 관객에게만 속내를 들키는 수준의 수위를 원했는데, 그걸 해줄 수 있는 사람이 선규 형밖에 없을 것 같았다. 선규 형을 포함해 오의식, 권소현, 정연 배우 모두 오랫동안 공연을 함께한 사이라 서로를 너무 잘 안다. 내가 원하는 걸 그들이 알아듣기 쉽도록, 내가 이해하는 그들의 연기 방식에 맞춰 많은 이야기를 나눴다. 촬영 전 일주일간 연습실을 대관해서 연극 연습하듯 리허설했다. 컷 없이 한번에 연기할 수 있게 말이다. 그때 배우들과 캐릭터에 관한 디테일한 해석을 계속 주고받았다.
- 예를 들자면.
선규 형이 너무 착하다. 장모님과 장인어른에게 리액션하는 연기도 정말 착하게 하더라. 그래서 형에게 내가 바라는 건 그게 아니라고, 이 연예인 사위에게는 가족들에게 내가 꼭 필요한 사람이라는 걸 증명하고 싶어 하는 태도가 있다고 전했다. 모두를 이해하고 도와줄 준비가 되어 있다는 걸 보여주고 싶은 사람이라는 거지. 막내딸 윤정을 연기한 권소현 배우와도 비슷한 대화를 나눴다. 윤정은 경락 마사지숍을 그만두고 한식 술집을 열고 싶어 하는데, 가족들에게 지지받지 못하면서도 계속 그 얘기를 한다. 안 좋은 소리를 들을 걸 알면서도 왜 그러는 걸까. 한번쯤 진심어린 응원과 인정을 받고 싶은 게 아닐까. 그런 식으로 표현보다는 해석에 초점을 두고 인물의 내면에 관해 이야기했다.
- 영화의 주무대가 되는 윤정 부부의 집은 어떻게 구했나.
신혼부부가 살 법한, 서울 외곽에 있는 신축 빌라를 원했다. 마침 신혼이었던, 연극 <그때도 오늘>을 함께한 최영준 배우가 선뜻 집을 빌려줬다. 드라마 로케이션 빌리는 비용을 조사해서 그만큼 책정한 금액을 줬고, 최영준 배우 부부를 호텔에서 지내게 했다. 그 3일간 영화를 찍었다.
- 집 안 인테리어를 그대로 활용한 것처럼 생활감이 묻어나더라.
대부분이 최영준 배우 부부가 살던 모습 그대로다. 누수까지도! 누수 때문에 받쳐둔 물통을 치울 수 없어 당황하기보다는, 이 물 새는 상황을 영화에 한번은 언급해보고 싶더라. 배우들에게 좋은 아이디어 있으면 얘기해달라고 했다. 준호의 아내이자 뮤지컬 배우 민정 역의 정연 배우도 실제로 뮤지컬 배우이니 노래를 한번 꼭 했으면 했다. 타이밍은 직접 정하되 저작권 문제가 있으니 우리 극단에서 만든 뮤지컬 <거울 공주 평강이야기>에 나온 곡을 부르자고 했다. 이미 손녀 은서가 춤을 추는 장면에 STAYC의 을 쓰기 위해 큰 비용을 지불해서 어쩔 수 없었다. (웃음)
- 공간과 음악만큼이나 눈에 들어온 게 의상이다. 가족 중 대사가 많이 주어지지 않는 인물들이 옷으로 성격을 드러내는 듯하더라. 딸 집에 나들이 가는 심정으로 왔을 노부부가 유독 화려한 패턴의 상의를 입은 것처럼 말이다.
어르신들이 조그마한 소파에 마치 액자처럼 가만히 앉아 계시지 않나. 대화에 끼지는 못하지만 계속 그 자리에 있으려는 게 짠하기도 하고. 그 자체가 현대 가족 모임에서 두드러지는 모습이 아닌가 싶다.
- 노부부에게도 사연이 있어 보였다. 그들이 재혼하면서 큰아들과 두 자매가 가족이 된 건데, 관객 입장에서는 40여분간 이들의 가정사를 서서히 알아가며 퍼즐을 맞추는 기분이었다.
나는 영화나 드라마에서 쉽게 인물 전사를 설명해줄 때 좀 심심하더라. 대사 하나로 과거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 쭉 말해주는 건 매력 없다. 은근히 숨겨가면서, 자연스럽게 튀어나오게 하는 게 더 재밌다. 나는 전문적인 작법 교육도, 연출 교육도 받아본 적이 없어서 느낌 가는 대로 썼지만 나름대로 적절히 숨겨가며 쓴 것 같다. 다시 쓰라면 이렇게 못 쓸 것 같다.
- 오히려 전문적으로 배우지 않았기 때문에 해낼 수 있는 영역이 있었던 건 아닐까.
글쎄, 그건 잘 모르겠다. <직사각형, 삼각형>이 46분짜리 영화가 될 줄도 편집하면서야 알았다. 주변에서는 애매하다며 ‘1시간30분짜리로 만들어라, 1시간만 넘겨라’ 하는데, 내게 시간을 늘려서까지 하고 싶은 이야기가 없더라. 나는 가족끼리 말이 통하지 않는 상태만 딱 보여주고 싶은 거니까! 나로서는 작법과 연출을 공부하지 않아서 각본을 적절하게 늘리고 줄이는 걸 잘 못하는 건가 싶다. 그래도 배우이다 보니 대사 쓰는 맛은 좀 있는 것 같다. 의식의 흐름대로 막 얘기하는 대목을 잘 살린달까. 내가 특히 재밌어하는 게 한번에 서너명이 동시에 떠드는 거다. 7일간 연습하면서 오디오가 물리는 타이밍까지 정확해졌다. 물론 녹음기사님은 무척 힘들어했다. 나도 편집할 때가 돼서야 왜 촬영할 때 오디오를 물리지 않게 하는지를 깨달았다. 후반작업에서 대사를 수정할 수 있는 여지가 사라지더라. 허명행 감독까지 깜짝 출연해 현관문 앞에서 여섯 명이 동시에 얘기하는 신을 찍을 때 감독으로서 가장 쾌감을 느꼈으나, 후반작업에서는 만지기 정말 어려웠다. 개선할 수 있는 여지를 내가 다 없앤 거였더라. (웃음)
- 의식의 흐름을 따르는 대사가 쏟아져나올 수 있게 한 주제는 다름 아닌 가부장제다. 집안 남자들은 세상이 변했다는 걸 알아도 바꿀 수 없는 본성을 토로한다. 평소 해오던 고민을 반영한 건가.
심리학에서 말하는 배경자아(의식하지 않아도 작동하면서 정체성의 기저를 이루는 인식 주체로서의 자아.-편집자)라는 게 있다. 사람들에게는 자기가 살아온 역사, 부모로부터 물려받은 환경 때문에 자동으로 불쾌하게 느껴지는 무언가가 있기 마련이다. 이 영화 속 남자들도 직접 설거지를 하면 된다는 걸 알면서도 마음 깊숙이 그 일은 여자가 해주길 바란다. 어렸을 때부터 봐온 부모의 모습이 있으니 설명할 수 없는 불편함을 안고 있는 셈이다. 선규 형이 연기한 준호는 이걸 다 알고, 행복해지는 법까지 깨달았다고는 하지만, 결국 자신이 궁지에 몰리자 과하게 화를 내지 않나. 그럼에도 헤어지지 않고 사는 한국 가족만의 색깔을 영화에 담고 싶었다.
- 그런 남자들의 대화를 여자들이 한발 뒤에서 다 듣고 있다.
그것도 현장에서 만들어진 장면이다. 시나리오에는 남자들 대사만 있었는데, 내가 들어도 그들의 긴 이야기가 지루하더라. 귀 기울여 듣게 되지도 않고. 그래서 촬영감독과 카메라를 여자들쪽으로도 돌려보기로 했고, 정연 배우가 남편 이전에 만난 남자 이야기를 하는 애드리브를 짠 거다. 여자들이 키득키득대다가 누수까지 화두에 올리는 장면은 그렇게 탄생했다. 공동창작의 힘이 컸다. 우리끼리 너무 재밌어서 3일간 아침 9시부터 밤 9시까지 촬영을 마친 뒤 밤에는 그 자리에서 그대로 회식을 벌였다. 2박3일 MT를 다녀온 것만 같다.
- 후회를 남기지 않기 위해 각본을 쓰고 제작한 <직사각형, 삼각형>이후 연출을 향한 의욕은 또 어떻게 진화했나.
사실 연기하는 게 훨씬 재밌다. 배우로서는 감독이 원하는 것의 120%를 해주려고 노력하는 편이다. 내가 아닌 다른 배우가 생각나지 않을 정도로 감동할 수 있게! 반면 연출자로 임할 때는 내가 원하는 게 뭔지 잘 아니 딱 그 100%만 하게 되더라. 그럼에도 ‘이런 이야기를 왜 아무도 영화로 안 만들지? 나는 이런 영화를 보고 싶은데’ 하는 마음이 생기면 뭐라도 만들 것 같다. 연기가 돋보이는, 대사가 돋보이는, 관계가 돋보이는 영화를 만들지 않을까.
- 이미 시나리오를 많이 써둔 걸로 아는데.
그런 마음이 올라올 때마다 써놓았지. (웃음) 하지만 내가 정말 너무 못 쓰는 것만 같다! 도저히 1시간 반 동안 할 이야기가 없다! 작가들은 구조를 짠 다음 사건을 블록처럼 쌓아올리며 분량을 채운다고 하는데 나는 15분, 20분이 지나면 무얼 더 해야 할지 아직 모르겠다. 다음부터는 잘 쓰는 작가들과 협업할 생각도 있다. 배우로 참여하는 작품의 작가들과 친분을 유지하려고 노력 중이다.
- 어쩌면 이희준이 영화로 보고 싶은 건 애쓰며 사는 사람의 얼굴인 듯하다. <병훈의 하루>와 <직사각형, 삼각형>은 결이 많이 다른 작품이지만, 자기 한계를 부숴보려는 주인공이 분투하는 이야기다.
내가 정말 애쓰면서 살거든. 좋은 사람이 돼야 한다는, 좋은 배우가 돼야 한다는 목표가 생긴 뒤로 명상과 수행을 계속하고 있으니까. 아직 많이 부족하지만 덕분에 전보다 나은 인간이 된 것만 같다. 그런데 얼마 전 읽은 책 <마음챙김>에서 ‘인생은 자기계발 프로젝트가 아니다’라는 문장을 보고 또 울컥했다. 나조차 죽기 전까지 나라는 인간을 완성해내야 한다고 여겼나보다. 그런 시선이 <직사각형, 삼각형>의 인물들에게 배어 있지 않나 싶다. 연예인 사위뿐 아니라 모든 가족이 애쓰고 있다. 심지어 어른들 싸움에 상처받지 않고 싶은 아이, 인간들이 휩쓸고 지나간 빈자리만을 돌아다니는 반려묘들마저도. 그 모든 걸 <직사각형, 삼각형>에 구현해준 동료들에게 대단히 고맙다. 내가 앞으로 많이 갚아야 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