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존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에밀리 세인트존 맨델의 아포칼립스 소설 <스테이션 일레븐>에 등장하는 문장이다. 소설의 주인공 키어스틴은 독감 팬데믹으로 문명이 절멸한 디스토피아에서 위 문장이 적힌 트럭에 몸을 싣는다. 이 트럭은 유랑극단의 교통수단이다. 키어스틴과 극단의 구성원들은 폐허가 된 세계를 원상태로 회복할 수 있는 건 오직 예술뿐이라는 신념 아래 전국을 떠돌아다닌다. 소설 <스테이션 일레븐>은 2014년에 출판됐지만 2020년대에 이르러 그 진가를 인정받았다. 2014년의 소설이 예측한 감기 바이러스의 마수는 2020년의 지구에 창궐한 코로나19 바이러스의 살풍경과 다를 바 없었기 때문이다. 엔데믹 이후 이 문장을 다시 꺼내본다. 2026년 1월. 세계는 종말을 향해 기울고 있다. 기후 위기는 날로 사회의 가장 약한 고리를 사각지대로 내몬다. 강대국이 자임하던 평화 수호는 패권주의에 지나지 않고, 팔레스타인 가자 지구와 우크라이나 키이우, 이란 전역에선 지금도 무고한 시민들이 목숨을 잃고 있다. 생존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아니, 생존을 위한 수백개의 필요조건을 기껏 구비해야 단 하나의 충분조건, 삶을 겨우 달성할 수 있다.
레이브만의 생존 양식
영화 <시라트>또한 생존이 긴급한 세계를 그린다. 레이브 파티가 한창인 모로코 사막 너머에선 3차 세계대전이 발발했다. 무장한 군대는 파티를 강제로 해산시킨 뒤 EU 시민에 한해 대피를 돕는다. 군인들을 따돌려 또 다른 레이브 파티로 향하는 레이버 무리에 일렉트로닉 뮤직과는 거리가 멀어 보이는 루이스(세르히 로페스)와 그의 어린 아들 에스테반(브루노 누녜스 아르호나), 강아지 피파가 합류한다. 전쟁이 한창인 바깥세상에서 생존하려면 군인들의 명령대로 대피가 필수다. 이때 통신조차 터지지 않는 깊고 넓은 사막에 잔류해 파티를 즐기는 레이버들의 결정은 자멸에 가깝다. 하지만 이들 역시 죽음 대신 삶에 투항한, 생존을 최우선 가치에 둔 자들이다. 이들의 여정은 피난을 피한 또 다른 피난일 뿐이다. 루이스가 이 무리에 합류한 이유는 실종된 딸을 찾기 위해서다. 레이브 파티에 갔다 돌아오지 않은 딸의 생존 여부를 확인하기 위해선 종전(終戰)만큼 기약이 없는 레이버들의 순례에 동참할 수밖에 없다. 레이버들은 이미 관습이나 규범과 거리가 먼 자기만의 생존 양식을 체화한 이들이다. 통념에 항거해온 삶의 흔적이 신체와 정신에 전리품처럼 남아 있는 자들. 이들은 붕괴 직전의 세상에서도 살아 있음을 확인하고자 테크노음악에 스스로를 투신한다.
본래부터 레이브는 생존만으로는 충분하지 않은 이들이 반체제를 통해 개인의 실존을 유지하려는 정신에서 비롯했다. 1980년대 후반 마거릿 대처 정부의 보수 정책이 영국 사회 전반을 억압하자 청년들은 버려진 창고, 들판, 격납고 등 허가받지 않은 공공장소를 일시적 자유 구역으로 명명해 점거하며 밤새도록 일렉트로닉 뮤직 파티를 열었다. 레이버들은 인종, 계급, 성적 지향에 상관없이 헤쳐 모여 황홀경에 돌입하자는 ‘PLUR’(Peace, Love, Unity, Respect) 정신을 주창했다. 레이브 파티 안에선 신체적·정신적 상처를 입은 이들이 몇 시간, 혹은 며칠 동안 반복적인 비트에 맞춰 춤을 추고 육체를 극한의 피로에 몰아넣는다. 육체의 고통을 통해 비로소 생존의 감각을 재확인하는 셈이다. 이들이 개인과 공동체 모두의 자유를 달성하고자 만든 것이 불법 점거-무료 레이빙, 프리 파티(Free Party) 시스템이다. <시라트>의 오프닝 시퀀스에서 펼쳐지는 레이빙 한마당이 바로 프리 파티다. 그래서 영화는 레이버들의 삶을 규정하는 방도로 프리 파티의 준비와 연행 과정을 공들여 묘사한다. 등장인물에 앞서 음악을 먼저 소개하고, 마치 TV드라마의 오프닝 타이틀처럼 레이버 출신 배우들이 등장할 때마다 일일이 자막을 붙여 그들의 이름을 소개한다. 이어 군중은 (영화 후반 이들을 궁지로 몰아넣는) 암벽에 맞서 스피커를 연결한 채 무아지경 속에 몸을 흔든다. 세월의 풍파가 서린 얼굴의 주름, 피트니스가 아닌 생의 전장에서 가꾼 근육, 잘려나간 사지가 한데 뒤섞이고, 카메라는 지옥도의 세상에 생존을 넘어 실존으로서 투항하겠다는 레이버들의 의지를 함께 피력하듯 군중 사이에서 공회전한다. 이 무리 안으로 이방인인 루이스 부자가 영문도 모른 채 던져진다. 이 지난한 투쟁에 자신들이 동참해 시라트, 즉 천국과 지옥을 잇는 다리를 건널 줄은 꿈에도 모르는 채 말이다. 오프닝 시퀀스를 두고 감독 올리베르 락세는 “레이브는 인간이 수천년간 수행해온 행위”라고 설명했다. 춤은 “태곳적부터 오직 신체로 카타르시스를 느끼고 기도하는 의식”이므로 “오프닝을 통해 그 자체로 신성한 레이빙에 예를 갖출 수밖에 없다”라고 밝혔다.
생의 의미를 자각하는 오프로드
다만 삶은 수많은 선택으로 구성되고, 모든 선택엔 치러야 할 대가가 막중하다. <시라트>의 특수한 삶에도 예외는 없다. 루이스 부자와 레이버들은 스스로 선택한 생존 방식에 혹독한 책임을 진다. 레이버 무리와 군인 사이에서 갈등하는 아버지에게 “그래도 따라가자”라며 보챈 에스테반. 구덩이에 빠진 차를 빼내느라 아들과 강아지에게 “차 안에 있으라”라고 말한 루이스. 이들 부자는 어쩌면 평생 스스로를 자책할 법한 말로 상대를 이끈다. 무리에 앞장서 일을 도모하는 자드(자드 우키드)와 비기(리처드 벨러미) 또한 돌이킬 수 없는 길을 건넌다. 춤으로 얽힌 이들의 생존 여정은 결말에 이르면 삶보다 죽음을 향한 몸부림처럼 보인다. 춤은 재앙을 부르고, 이들은 갑자기 생과 사의 순환 속에 갇혀 자신의 선택이 배태한 무작위적 죽음에 좌절한다. 하지만 이들은 생존을 포기하지 않는다. 결말에 이르러 그 생존 방식이 이들이 고수하고자 했던 길을 우회할지라도, 온몸으로 거부하려던 그 길을 끝내 걷게 되더라도 이들은 일단 살아남아 그다음 삶을 채비한다.
다시 처음으로 돌아간다. <시라트>가 처음 공개된 2025년의 5월과, 영화가 한국에 도착한 2026년의 1월엔 모두가 작중 내용처럼 3차 세계대전을 염려 중이다. 극장 안도 극장 밖도 생존만으로 충분하지 않은 세계를 마주하는 나날이다. 그 속에서 <시라트>는 춤으로써 몸부림으로써 삶의 필요조건을 이룩하는 사람들이 달성하는 충분조건을 제시한다. 온몸을 울리는 음악에 맞춰 춤을 출 때 이들은 비로소 생존의 가치를 체득한다. 생의 의미를 자각하는 구도의 길. 글자 그대로 종말 앞일지라도, 이미지 그대로 벼랑 끝일지라도 영화는 그 길 위에선 생존만으로 충분하지 않은 세상 안에서 함께 실존할 수 있다고 말한다. 그렇게 <시라트>는 관객을 트럭에 동승시켜 종착지 없는 오프로드를 향해 달려나간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