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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자연의 해상도를 높이면] 우리는 어떤 승리를 바랍니까? <프로보노>
이자연 2026-01-29

<프로보노>

구약성경 사무엘상 17장. 작은 목동인 다윗은 2.7m에 육박한 블레셋 거인 골리앗을 처참히 무너뜨린다. 창과 칼, 갑옷과 투구로 중무장한 골리앗과 달리 양치기 소년에게는 오직 돌멩이 다섯개와 손에 익은 무릿매 하나만이 있다. 보잘것없는 무기로 생사를 뒤집은 오래된 역전극은 소시민이나 약자의 끈기로 자주 은유된다. 하지만 소년의 승리가 진정으로 확정된 순간은 골리앗의 이마에 단단한 돌멩이가 명중한 때가 아니라 연약한 다윗이 쓰러진 골리앗의 목을 베기로 결심한 순간이다. 다시 말해, 가차 없는 확인 사살. 두번의 기회를 주지 않는 것. 모든 여지를 메워버리는 것.

강다윗(정경호)에게 이기고 지는 문제는 생존만큼이나 중대하다. 극 중에서 그가 자주 하는 말도 “이해가 안 가면 외우세요, 내 사전에 패배란 없습니다”이다. 최연소 부장판사에 대법관 후보로 거론되고, 대중으로부터 국민판사라고 불리는 그가 로펌 공익 변호사로 ‘나락에 떨어진’ 것은 일종의 완패였다. 사실 공익 변호사로 전환하고 나서도 판사 자아가 비대한 강다윗이 이기고 지는 말들에 집착하는 것은 다소 부자연스러워 보인다. 승패는 그것을 결과로 받아들여야만 하는, 다소 수동적인 위치의 변호사(와 검사)의 몫이어야 하지 판결을 내리는 평가자에겐 그저 서로 다른 입장의 상태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는 본능적으로 승패의 의미를 잘 알았다. 정확히는 지는 삶이 어떤 형태를 띠는지 잘 알았다. 학연·지연으로 똘똘 뭉친 사법부에서 그는 외딴섬처럼 무소속(고졸이다)이었고, 가난한 노동자 부모를 일찍 여의었다. 기자들의 이름을 줄줄 외며 매체의 이목을 활용할 줄 아는 ‘관종’이었지만 동시에 어린 시절 충분한 관심을 받지 못하고 자랐다. 오직 대법관이 되는 것만이 자신의 삶을 가치 있게 만들어주리라, 그는 믿었다.

그러니까 우리가 만난 주인공은 단순히 성공 가도를 달리다가 삐끗하고 예정된 성장기를 보여줄 철부지 천재가 아니라 지금 벼랑 끝에서 떨어지면 패배자에게 어떤 현실이 몰아치는지 생생히 아는 결핍 경험자인 셈이다. 그럼에도 강다윗의 입장은 단번에 뒤바뀌지 않는다. 전형적인 드라마 문법으로 따지면 꽤나 이상한 일이다. 마음속에 상흔을 안고 있지만 주인공은 여전히 약자보다는 기득권, 변호인보다는 판사의 마음으로 사건을 내려다보고, 그의 기술 또한 설득이나 호소가 아닌 전략과 회유에 가깝다. 법정의 생리를 너무나 잘 알기에 자극적인 술수도 마법처럼 펼친다. 이상한 것은 강다윗만이 아니다. <프로보노>가 선별한 사건들은 공익 변호팀이 맡은 의뢰인을 계속해 의심하도록 불안한 파동을 준다. 첫 번째 유기견 사건에서는 학대 정황이 보이는 개를 구출한 선한 의뢰자로 이야기를 시작했지만 알고 보니 합법한 절차가 아닌 도난이었다는 사실로 제동을 건다. 두 번째로 자신을 태어나게 한 병원을 고소한 강훈이 사건은 청소년 시절 비행을 일삼았던 강훈이 엄마의 과거를 들추었고, 세 번째 사건 카야의 이혼소송에서는 의뢰인의 행실이 시골 동네에서 오해를 일으킬 법하다며 문제 삼았다. 무엇보다 카야가 미성년자 시절 감금과 성폭력에 의한 출산 이력이 있다는 것을 이유로 (도덕적 판단은 어렵지 않지만) 법리적 판단을 헷갈리게 했다. 다시 말해 <프로보노>는 이 세상에 순백의 피해자는 존재하지 않는다고 공표하듯, 극적 장벽으로 상대적 약자들의 문제점을 내세운다. 상대측 변호인의 화려한 언변이나 술수, 예측하지 못한 시련이 아니라 오직 의뢰자의 결핍이 변호사들의 해결 과제가 되는 것이다(오히려 허술한 상대측 변호사는 공포심보다 안심을 준다). 애초에 드라마의 소재가 공익 변호인 이상 유기견, 장애인 청소년, 외국인 이민자 여성, 가족에게 착취당한 아이돌 등 사회적 약자가 에피소드의 주인공으로 일어설 수밖에 없다. 자칫하면 선한 약자와 그들을 돕는 정의로운 변호사로 납작해질 수 있지만 <프로보노>는 도리어 그들의 다면성과 입체성을 부각하면서(심지어 피해자의 다채로움이 주인공을 난관에 빠뜨리게도 하면서) 모든 연민의 눈길과 동정의 가능성을 외면해버린다. 그저 어질고 착한 마음만으로 하나되는 동화가 아니라 ‘왜 이런 거 변호사한테 먼저 말 안 했어요?’ ‘말해야 하는 줄 몰랐어요’ ‘으이구 이걸 어떡해’ 하면서 지지고 볶고 싸우다 결국 하나되는. 지저분하고 번거롭지만, 우리 곁에 있는 ‘진짜’ 현실을 그린다.

이탈리아 마피아 변호사의 이야기를 다룬 <빈센조>에 이런 말이 나온다. “여러분이 왜 질 수밖에 없는지 아십니까? 우리 같은 변호사가 옆에 없어서입니다. 이기는 데 익숙하고 지치지도 않고 절대 흔들리지 않는 그런 변호사 말입니다.” 한때 우리는 호승심의 의미를 잘 아는 유능한 변호사의 세계를 만났다. 그리고 그 둘레가 넓어지고 다양해진 덕에 이제는 지는 게 두렵지 않은, 그러니까 지더라도 그것을 결말이나 이변처럼 받아들이지 않는 변호사들을 본다. “세상에는 늘 지기만 하는 사람들이 있다. 아무리 노력해도 세상과 싸우는 게 힘에 부치는 사람들. 그런 사람들 곁에 공익 변호사가 있다. 지더라도 같이 지기 위해.” 이 세상 어디에도 깨끗한 대리석 바닥처럼 평평하게 굴러가는 일은 없다. 타인과 함께라면 더욱. 법적 분쟁이라면 더더욱. 대형 로펌의 혜택에서 배제된, 공익 변호의 손길이 필요한 사회적 약자들은 당연히 앞으로도 순백이 아닐 것이다. 드라마처럼 극적으로 유리하지도, 판타지 같은 결말이 보장되지도 않을 것이다. 하지만 약자다움이나 소시민다움을 함부로 강요하지 않는 세계관을 통해 우리는 덜거덕거리며 끝내 앞으로 나아가는 방법을 익힌다. 성경에 기록된 양치기 소년의 이야기로 돌아가보자. 소년 다윗이 거인을 무너뜨릴 수 있던 이유는, 그러니까 적군의 목을 베어 제 손으로 끝맺음을 할 수 있던 이유는 무엇인가. 방어 태세로 온몸에 철갑을 두르느라 둔해진 거인만큼 몸집을 부풀리거나 제 능력을 다른 것으로 바꾸지 않았기 때문이다. 있는 그대로 자신에게 가장 익숙한 무기로 싸우면서. 이번엔 지더라도 그다음 돌맹이를 던질 방향을 생각하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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