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팝 파티를 준비하며 인연을 맺은 한 방송 PD는 파티가 끝난 지 한참 되었지만 지금도 얼굴이 가물가물할 때쯤 내게 안부 전화를 준다. 그의 적당한 살가움이 얼마나 고마운가? 하지만 나는 휴대전화 화면에 그의 이름이 뜨면 크게 긴장하는데, 그리 친밀한 사이가 아닌데도 불구하고 그와 대화를 시작하면 늘 이상하리만큼 끝을 맺을 수 없기 때문이었다.
“복길씨는 혼전 임신에 대해 어떻게 생각해요?” “헉. 임신하셨나요?” “아뇨. 그냥 평소 생각이 궁금해서요.” “글쎄요. 임신에 혼인 여부가 중요할까요… 그냥 계획되지 않은 임신 정도 아닌가요?” “만약에 계획을 했다면요?” “….” 보통의 대화라면 내가 답하지 않는 대목에서 본인이 꺼낸 주제인 ‘혼전 임신’에 대해 자신의 관점을 말하거나, 지금 둘이서 새로운 합의를 보자는 뉘앙스를 이어갈 것이다. 하지만 그는.
“엑소 멤버 첸이 혼전 임신으로 결혼한 거 알아요?” “아, 그 얘길 하시려고 했구나. 들었어요. 그럼 그분이 계획된 혼전 임신을 한 건가요?” “아뇨. 그건 모르죠. 근데 엑소 팬들이 그 사람을 ‘김종대디’라고 불러요?” “… 네.” “공교롭게도 본명이 ‘김종대’라서.” “공교롭게도?” “저는 근데 부모가 되면 아들, 딸 전부 갖고 싶을 것 같아요. 욕심이 많아서.”뭐랄까. 끝없이 ‘빌드업’만 이어지는 대화다. 하지만 탕수육 소스를 부어 먹냐, 찍어 먹냐, 하는 것도 상대의 철학을 따라가는 나는, 그쯤부터 맥락 찾기를 포기하고 그에게 속절없이 휘말린다.
“저는 아이돌도 혼성그룹을 좋아하거든요. 가요계에 혼성그룹이 지금보다 훨씬 많아져야 해요. 남자랑 여자가 섞이면 K팝 팬들도 이성적인 문제에 좀 덜 미치지 않을까요? ‘김종대디’ 케이스만 봐도… 결혼과 임신은 인간에게 굉장히 자연스러운 과정인데 그게 왜 보이콧 사유가 되는지….” “그게 그렇게 이어지는군요….”
“저는 아이돌도 혼성그룹을 좋아하거든요. 가요계에 혼성그룹이 지금보다 훨씬 많아져야 해요. 남자랑 여자가 섞이면 K팝 팬들도 이성적인 문제에 좀 덜 미치지 않을까요? ‘김종대디’ 케이스만 봐도… 결혼과 임신은 인간에게 굉장히 자연스러운 과정인데 그게 왜 보이콧 사유가 되는지….” “그게 그렇게 이어지는군요….”“남녀를 처음부터 섞어놓으면 일단 갈등의 장벽을 하나 허물고 시작하는 거니까.” “뭔가 남녀공학을 처음 제안한 교육부 직원의 결정 같네요.” “그리고 K팝 팬들은 멤버끼리 사귀는 걸 좋아하잖아요. 팬픽도 쓰고요. 씁, 근데 팬픽은 동성애 장르니까 아닌가? 갑자기 어려워지네요.” “….”
한 투자 전문가가 ‘엔터주’를 분석하며 말했다. “혼성그룹이란 K팝에 ‘주주’라는 단어가 등장하는 순간 사장된 모델”이라고. 하지만 저 전문가처럼 K팝을 ‘산업’으로 말하기 좋아하는 이들을 제외한다면, 혼성그룹을 싫어하는 사람은 세상에 없다고 생각한다. 긴 세월 한국인의 흥과 한을 책임져온 이들이 누구였나? 김종민이 메기고 신지가 받고 빽가가 추임새를 넣어야 풀리는 응어리가 있다. 그런가 하면 한반도의 찜통더위는 누구에게 맡겼었나? 더위란 이재훈과 유리가 투닥투닥 싸우면서 오고, 그걸 보던 김성수가 그만하라고 소리를 질러대야 물러가는 것이다. 박근혜 전 대통령이 그 질곡 많은 인생에서 고른 단 하나의 애창곡이 거북이의 <빙고>였단 사실도 잊지 마라…(아니… 이건 잊어도 된다…).
여신의 비밀스러운 사생활 같았던 그룹 ‘스페이스A’, 처음으로 K팝에서 ‘퀴어함’를 느끼게 해준 그룹 ‘UP’, 가장 많은 명곡을 남겼으나, 가장 안타깝게 와해된 그룹 ‘S#ARP’. 나열하는 것만으로도 벅찰 만큼 좋아했던 혼성그룹의 이름이 끝도 없이 생각난다. 하지만 아무리 많은 이름을 더해도 그 향수의 중심엔 단 하나의 이름만이 있다. 서태지와 H.O.T.가 90년대를 양분하며 ‘팬덤의 시대’를 구축하는 동안 압도적인 대중성을 안고 질주했던 감히 혼성그룹의 기원이라 불러도 될, 단 하나의 이름, 룰라.
느닷없는 ‘크라잉랩’으로 한국에 ‘레게 정신’을 심고자 했던 이상민의 별난 기개, 클레오파트라를 생각나게 하는 도발적이고도 시원한 김지현의 목소리, 예상치 못한 박자로 수상하게 꺾고 접히던 신정환의 몸, 기교가 하나도 없어 밋밋하게 들리지만 결코 대체할 수 없을 것 같은 고영욱의 주절거림, 그리고 내게 가수의 ‘끼’란 무엇인지 알려주었던 채리나의 재능 그 자체. <비밀은 없어>는 룰라의 1집 후속곡으로 특유의 느긋한 레게 비트에 사뿐사뿐한 멜로디가 특징이다. 그들은 관계를 시작하는 연인이 조심스레 믿음을 쌓아가는 노랫말을 마치 연인간의 대화처럼 불렀다가, 갑자기 인칭을 뒤섞어 속마음을 고백하곤 했는데, 이는 이후 혼성그룹의 노래에서 흔히 찾을 수 있는 특징이 되었다.
무대에서 생글생글 웃으며 ‘그대에게 비밀은 없다’ 말하는 20대의 룰라는 내가 겪지 못해 환상처럼 간직한 90년대의 풍요처럼 보이기도 한다. 여자들은 샐쭉하고 남자들은 악동 같은 시대의 캐리커처. 아, 자유롭구나. 이래서 혼성그룹이 필요하다는 건가? 데뷔 32주년을 맞은 올해는 멤버 전원이 50대가 된 해. 나는 검색창에 룰라를 적어넣는다. 이상민이 빚을 다 갚고 연예 대상도 받았어? 그런데 고영욱이 이상민은 대상 받을 자격이 없다고 저격했네? 아니 근데 고영욱이 지금 자기 의견을 낼 수가 있어? 신정환은 왜 엑셀방송에서 삐끼삐끼를 춘 거지? 채리나는 엔비디아 주식으로 800% 수익이 났다고 하네…. 아니 잠시만 근데 내가 혼성그룹이 필요한 이유 같은 걸 왜 찾고 있는 거지? 하여튼 그 PD랑 대화를 하면 이렇게 휘말린다니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