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내한하기 전 연극무대에 오른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어떤 작품이었나요.
<나를 찾지 마>라는 제목의 연극인데 판타지 장르의 미스터리한 작품이었습니다. 저는 실종된 한 여성을 연기했는데요. 제가 사라졌다고 생각하는 다른 인물들이 저의 환영을 보면서 벌어지는 이야기였습니다.
- 왠지 <여행과 나날>의 나기사가 떠오르네요.
저도 대본을 받았을 때 같은 생각을 했습니다. 나기사도 유령, 환영과 같은 분위기가 있다보니 묘하게 겹친다고 느껴지더라고요.
- 연이어 비슷한 역할을 맡게 되는 건 배우 본인의 선호가 반영된 결과이기도 할까요.
그렇진 않습니다. 우연일 수도 있고, 제가 관객들에게 비쳐지는 분위기와 인상 덕에 유사한 인물이 계속 주어지는 것이 아닌가 싶네요.
자유로운 바람처럼
- 사계절 중 어떤 계절을 좋아하시나요.
굳이 고르자면 겨울이에요. 제가 12월생이라 생일과 크리스마스, 곧 이어질 설날까지 즐거운 일이 가득하다는 이미지가 있거든요.<여행과 나날>의 겨울 편의 장소에도 기회가 된다면 꼭 가보고 싶습니다.
- <여행과 나날>의 경우 여름 편 시나리오를 먼저 받아봤다고 들었습니다.
맞아요. 각본을 받고 쓰게 요시하루 작가의 원작 만화도 함께 읽었는데요. 미야케 쇼 감독님이 만화를 그대로 옮긴 게 아니라 여러 요소를 적절히 더하고 덜어내서 여름 파트만으로도 잘 구성된 스토리라고 생각했습니다.
- 나중에 완성된 영화를 관람했을 땐 작품에 대한 이미지가 많이 달라졌겠습니다.
크게 바뀌었습니다. 겨울 편의 대략적인 내용은 알고 있었는데 그로부터도 많이 변화해서 완성된 영화가 무척 생경했어요. 겨울 편에선 강한 리얼리티를 체감했고 반대로 여름 편은 신비로운 스토리처럼 보였습니다. ‘이 부분은 픽션이구나’라는 게 극명히 드러나더라고요. 제가 촬영했을 때와 여러모로 달라져서 신선했습니다.
- 여름 편이 지닌 신비함에는 나기사의 영향도 적지 않았을 듯합니다. 나기사라는 인물을 어떻게 바라보셨나요.
죄책감, 자신에 대한 자괴감 같은 걸 안고 있는 사람이고 그로부터 도망치듯 여행을 간 것이라고 분석했습니다. 그런데 그것을 근거 삼아 연기하진 않았고, 촬영을 마친 후에 생각해보니 그런 인물이었던 게 아닌가 싶더라고요. 연기를 할 때는 나기사의 배경을 떠올리기보다 나기사가 존재하는 순간, 섬에 있다는 감각 자체를 중시했습니다.
- 죄책감, 자괴감을 지녔다고 해석한 이유는 무엇이었나요. 나기사가 나츠오(다카다 만사쿠)에게 불륜에 관해 짧게 언급한 게 떠오르네요.
(고개를 끄덕이며) 그 밖의 몇몇 대사와 장면이 편집됐지만 나기사가 자신의 연애 문제로부터 벗어나고 싶어 여행을 떠났다는 설정이 있었습니다. 다만 그것을 너무 참고하진 말라는 디렉션이 있었어요. 저도 나기사가 연애 문제를 깊게 고민하기보다는 자신의 부정적인 면을 회피하는 면이 있다고 받아들였습니다.
- 미야케 쇼 감독이 <여행과 나날>에 관해 ‘바람을 잘 찍고 싶었다’고 답한 바 있습니다. 여름 편, 특히 나기사가 숲을 지나 해변에 다다르는 장면에 그 의도가 잘 반영됐다고 느꼈는데요. 말없이 바다를 향해 걸어갈 때 어떤 기분이 드셨나요.
제가 여름 편에서 가장 마음에 드는 장면이 바로 그 숲에서 바람을 마주하는 신입니다. 아주 좋은 바람이 불어오고 있었거든요. 덕분에 작위적이지 않게, 순수하게 자연을 느낄 수 있었고 제가 바람을 느끼는 모습이 카메라에도 아름답게 담겼어요. 어떤 의미에선 바람이 우리를 도와주는 것 같았습니다.
- 해당 신의 지문도 기억나시나요.
정확한 지문은 잊어버렸지만 ‘바람이 분다’ 정도로 간단히 적혀 있었습니다. 그래서 이걸 어떻게 찍으려고 그러나 싶었어요. (웃음) 그외에도 ‘비가 내린다’, ‘흐리다’와 같이 날씨와 관련된 지문이 꽤 많았거든요. 매일 날씨의 신에게 기원하는 마음으로 촬영했습니다.
- 날씨 운을 논하자면 나기사, 나츠오가 바다를 등진 채 서 있던 순간을 빼놓을 수 없을 것 같습니다.
그 장면은 정말 여러 차례 리허설을 했어요. 둘이 격렬하게 대화를 하는 게 아니라 대사 한마디 한마디를 잘 표현하고 나츠오의 이야기를 경청하는 것이 중요했습니다. 말과 말 사이에 여백을 얼마나 둘지에 관해 리허설을 거치며 계속 연구했어요. 본촬영을 할 때는 해가 조금씩 저무는 매직아워 때 찍어야 했거든요. 그 마법 같은 순간의 적절한 조도가 30분 정도밖에 허락되질 않았어요. 감독님이 “우리에겐 최대 네번 정도 촬영할 기회가 있습니다. 5시 반이 되면 바로 촬영 시작하겠습니다”라며 안절부절, 왔다 갔다 하시던 게 떠오르네요.
- 수영을 하는 신은 어땠나요? 두 사람이 디저트를 먹을 때만 해도 로맨스의 설렘이 있었는데 바다 속으로 들어간 뒤엔 곧바로 스릴러의 공기로 전환되는 것이 인상적이었습니다.
감독님이 촬영 전에 자료를 주셨는데 거기엔 여러 키워드가 적혀 있었습니다. ‘생과 사, 로맨스, 관능, 호러, 코미디….’ 원작 만화에 그 모든 것이 담겨 있어서 빼놓지 않고 전부 담아내고 싶다고 하시더라고요. 나기사와 나츠오가 바다에 들어가기 전의 장면이 얼마나 가슴 설레는 섹시한 장면이 될 것인가, 바다로 들어간 후에는 분위기가 어떻게 반전될 것인가에 관한 균형에 감독님과 저 모두 무척 공을 들이며 촬영했습니다.
- 각본 자체를 중시하시나요, 아니면 작품에 표현되지 않은 외적인 면도 구축해두는 편이신가요.
각본에 없는 요소에 관해 골몰하는 시간을 아주 좋아하긴 합니다. 그래도 가장 중요한 설계도는 각본이니까요. 나름의 준비를 한 뒤 나중에 각본과 맞춰가는 식으로 해나가고 있습니다.
- 나기사의 대사 중 “여행을 왔다가 돌아가지 않고 다른 사람이 되든가, 다시 태어나서 아예 다른 사람이 되든가”라는 말이 여러 상상을 불러일으켰습니다. 내심 그러길 원하는구나 싶기도 했는데요. 혹시 여행을 떠났을 때 완전히 다른 사람이 되길 바라거나, 그런 경험을 해보신 적이 있나요.
개인적으로 여행을 정말 좋아합니다. 일로서 다른 나라를 방문하더라도 최대한 밖을 돌아다니며 그 지역을 즐기려는 편인데요. 배우가 업이라 저를 아무도 알아보지 못하는 곳에 가긴 쉽지 않더라고요. 대신 뉴욕에 갔을 때 유사한 경험을 했어요. 국민성도 있을텐데, 다들 타인에게 아무 관심이 없다보니 제가 완전히 다른 사람이 된 기분이었습니다. 자유롭고 즐거웠어요.
연기로 풀어내는 재미
- 지난해 일본 아카데미 최우수여우주연상을 수상한 <안이라는 이름의 여자>에 관해서도 이야기해볼까요. 연기한 ‘카와가 안’은 오랜 시간 가정폭력에 시달렸고 어머니의 강요로 화류계 여성이 됐지만, 독립해 새 삶을 꾸려나갑니다. 세상과의 접점이 넓어지며 안이 새롭게 느끼는 감정들에서 출발해 인물을 만들어가셨다고요.
언론에선 실존 인물인 안의 인생을 두고 ‘비참하다’는 표현을 자주 써요. 실제로 가혹한 환경에서 살아온 사람이긴 하죠. 그렇지만 안은 뭔가를 쟁취했을 때 느끼는 행복을 돋보이게 하고 싶었어요. 돌이켜보면 <안이라는 이름의 여자>는 제 필모그래피 중에서도 특별한 경험이었습니다. 만약 제가 안과 대면할 일이 있다면 보다 당당하고 자랑스럽게 그의 앞에 설 수 있도록 정말 열심히 연기하려고 했습니다. 그의 삶을 존중하며 작품에 임하고 싶은 마음이 강했습니다. 관객들이 영화를 본 뒤에 안이 힘든 상황에도 불구하고 노력하고 열심히 사는 모습이 인상적이었다는 리뷰를 많이 남겨주었는데 그런 후기를 접할 때마다 굉장히 기뻤습니다.
- 인생을 바꾼 영화로 야마나카 요코 감독의 <아미코>를 언급한 적이 있죠. 이후 야마나카 요코 감독과 <나미비아의 사막>의 카나 역으로 함께하게 되었는데요. 아미코와 카나가 비슷한 아우라를 지녔다는 인상을 받았습니다. 두 영화가 서로 영향을 주고받은 부분도 있을까요.
일본에서도 그런 평을 들은 적이 있습니다. 뒤늦게 겹치는 구석이 있구나 싶긴 했지만 연기할 당시엔 아미코를 크게 의식하진 않았습니다. 그런데 야마나카 요코 감독이 그리는 여성 캐릭터가 지닌 성품과 에너지, 그것을 연기로 풀어내는 재미에 관해서는 확실히 <아미코>가 제게 가르쳐준 게 많죠. <나미비아의 사막>각본을 읽을 때도 <아미코>의 톤을 떠올리면서 읽었습니다. 카나가 꽤 흥미로운 여자아이가 되겠다고 직감했습니다.
- <아미코>를 보고 배우의 길로 들어섰고, 야마나카 요코 감독에게 편지를 전해준 뒤 SNS로 감독에게 직접 캐스팅 제의를 받아 <나미비아의 사막>에 합류하셨죠. 이 영화로 칸영화제 비평가 주간의 레드카펫을 밟기도 했는데 이 일련의 과정을 통해 새롭게 결심한 바가 있다면요.
연기는 <아미코>를 봤을 때부터 제가 계속해서 열망해온 일이었어요. SNS로 섭외 연락을 받은 것도 세상의 모든 감독과 그런 식으로 이어질 순 없는 것이니 결과적으로 제겐 잊지 못할 경험이 됐습니다. 제 보물 상자에 담아두고 싶을 정도예요. 또 새로운 분들과 각자 다른 형태로 만남이 이루어지더라도 매번 진실된 태도로 임해야겠다고 다짐했습니다.
- 하야카와 지에 감독의 영화에도 연이어 출연하셨죠. <플랜 75>의 요코가 국가의 안락사 정책 상담원이었다면 <르누아르>의 쿠리코는 가족을 잃은 사람이란 점에서 죽음과 좀더 가까이 결부된 캐릭터였습니다. 두 작품을 통해 죽음에 관해 생각이 바뀐 지점도 있나요.
<플랜 75>가 75살 이상의 노인들에게 죽음을 권장하는 가상의 정책이 테마였다면 <르누아르>는 한 여자아이가 어떻게 죽음과 마주할 것인지를 관찰하는, 훨씬 내밀한 작품이었습니다. <플랜 75> 예고편의 코멘트를 확인하고 무척 놀란 적이 있습니다. 감독님은 이런 미래가 펼쳐져선 안된다는 취지로 영화를 만드셨지만 정작 작품의 코멘트엔 ‘플랜 45’여도 괜찮다, 이런 제도가 생긴다면 나도 당장 해보고 싶다는 분들이 많았습니다. 상당히 큰 충격을 받았습니다. 일본의 현재를 확인한 것 같았달까요. 저로선 사회가 간접적으로라도 약자를 죽음으로 몰아가는 시스템은 절대 있어선 안된다고 보거든요. 다만 안락사에 관해선 이야기가 달라지겠죠. 최근에 <은중과 상연>을 재밌게 봤습니다. 보면서 소중한 사람이 안락사를 바란다면 어떻게 도와줄 수 있을지 고민해보게 됐습니다. <플랜 75><르누아르>와는 전혀 다른 관점으로 죽음을 바라보게 된 셈이죠.
영화를 인생처럼
- 학창 시절에 무대를 기획해 올리는 게 정말 즐거웠다고 이야기한 적이 있던데, 직접 연극이나 영화를 연출하고 싶은 마음은 없나요.
현재로선 어렵지 않을까 싶네요. 연출자는 정말 다양한 공부가 필요하다는 걸 느꼈거든요. 다만 스토리를 만드는 쪽엔 관심이 많습니다. 연기자의 입장에서도 여러 사람의 의견을 반영하면서 밸런스를 맞춰가는 일을 할 수 있다는 걸 새삼 깨달았습니다.
- 제작자, 혹은 감독으로서 활약하는 가와이 유미를 만나볼 수 있을지도 모르겠네요.
(잠시 고민하다) 네! (웃음)
- <안이라는 이름의 여자> <플랜 75>와 같이 현실과 밀접하게 관련된 출연작이 다수 있고 예전 인터뷰를 보면 작품이 사회에 미치는 반향에 관해 여러모로 고려하는 것 같습니다. 영화의 영향력에 관해선 어떤 입장을 갖고 있나요.
영화로 세상을 바꿀 수 있다고 믿진 않아요. 다만 관객의 마음에 작은 씨앗을 심을 순 있겠죠. 나중에 그 씨앗이 꽃을 피우면 누군가의 마음을 조금은 바꿀 수 있을지도 모릅니다. 어릴 때 영화가 내게 가르쳐준 것이 이런 것이었다는 걸 성인이 되어 깨달았어요. 모든 영화가 사회와 이어져 있다고 생각하고, 가능한 한 세상에 선한 영향력을 미칠 수 있다면 좋겠죠.
- 일본에서 가장 많은 작품에 출연하는 배우 중 한명이신데요. 다작의 원동력은 무엇인가요.
인터뷰에선 주로 영화를 만드는 의의에 관해 말하곤 합니다. 그렇지만 역시 영화를 사랑하는 마음이 근간에 자리한다고 오늘은 말하고 싶네요. 제 몸을 활용해서 여러 사람들과 함께 무언가를 만드는 과정 자체를 정말 좋아합니다. 그걸 위해 살아간다고 느낄 정도예요.
- 배우님이 생각하는 성공은 “지금 내 인생이 행복에 도달했구나”를 체감할 때라고 들었습니다. 근래 그런 순간이 있었나요.
최근까지 일본에서 <앙팡>이라는 아침 드라마에 출연했습니다. 1년간 촬영이 이어진 대작이었는데 그렇게 촬영 기간이 긴 작품에 참여해본 게 처음이었습니다. 제가 세 자매 중 둘째로 나왔는데 언젠가부터 자매로 나오는 두 배우를 동료가 아닌 가족으로 보게 됐어요. 단순히 연기가 아니라 그들이 진심으로 잘 됐으면 좋겠고 계속 응원해주고 싶고. 그런 마음이 자연스럽게 우러난 게 처음이라 무척 행복했습니다.
- 2026년에는 어떤 목표를 세워두었나요.
지난해엔 여러 작품을 촬영하느라 바쁜 시간을 보냈는데요. 올해는 따로 공부하고 운동하는 시간을 넉넉히 확보하고 싶습니다. 그리고 지금까지 거의 해본 적 없던 OTT 작품이 나올 겁니다. 기대해주세요. (웃음)
- 메모를 자주 하는 편이죠? 연초는 새 다이어리를 꺼내는 시기이기도 하니 배우님의 펜과 노트 취향을 묻고 싶습니다.
펜은 그렇게까지 따지지 않는데요. 노트는 롤반이란 브랜드의 제품을 자주 씁니다. (직접 적어주며) 꼭 이 브랜드가 아니더라도 페이지 수가 많은 노트를 즐겨 쓰는 편이에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