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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뷰] 무엇이든 감행한다는 것에 대하여, <광장> 김보솔 감독
정재현 사진 최성열 2026-01-15

- 영화과 졸업 후 다시 한국영화아카데미(KAFA)에 들어가 애니메이션을 전공한 것으로 안다. 애니메이션을 선택한 이유는.

상상력에 제한을 두지 않아도 된다는 점에 큰 매력을 느꼈다. 무엇보다 그림이 좋았다. 그림 시험이 전형에 포함된 영화과를 졸업했는데 입시 때부터 그림 그리기가 즐거웠다. 그런데 아직 애니메이션을 잘 모른다. KAFA에서 애니메이션만 20, 30년씩 연구한 분들의 진심을 안 이상 애니메이션을 좋아한다고 고백하기가 주저된다.

- 그렇다면 <광장>이 애니메이션이어야 했던 이유는.

배경이 북한이지 않나. 1억원의 예산 내에서 북한을 표현하려면 애니메이션이어야 했다. (웃음) 같은 이야기여도 애니메이션이라면 관객들이 보다 손쉽게 접근한다. <광장>으로 여러 영화제를 다니며 확신했다. 이런 질문을 종종 받는데 아마 스토리라인이 실사영화로 만들어져도 크게 이질적이지 않은 내용이라 그런가 보다.

- 숏 구성이 실사영화에 가깝다는 느낌을 받았다. 숏과 리버스숏으로 캐릭터들이 시선을 교환하는 순간도 빈번하게 등장하고.

할리우드 고전으로 처음 영화를 공부했고, 학부 시절에 촬영 보조를 자주 나갔다. 그때 습관이 몸에 남아 있는 듯하다. <광장>의 레이아웃을 전부 내가 짰다. 실사영화라면 촬영감독이 도맡는 일인데, 다시 보니 실사영화를 촬영할 때의 감각 그대로 레이아웃을 짰더라.

- 감시, 관찰과 같은 감각이 서사적으로 중요한 기능을 하는 작품이라 고전적 숏 구성이 영화와 어울렸다.

염두에 둔 부분이다. 감시자인 명준이 등장하지 않는 장면에서도 보리가 끊임없이 관찰의 대상인 듯한 느낌을 주려고 했다.

사진제공 스튜디오 디에이치엘

- 총 5년11개월이 걸려 작품을 완성했다. 긴 시간 한 작품에 매달리며 여러 부침이 뒤따랐을 텐데.

예산이 적으니 내 노동력을 전부 갈아넣어야 했다. 누구의 도움도 구하지 못하고 홀로 8개월을 작업하던 때도 있었다. 번아웃도 2번 왔는데 그럴 때마다 나를 일깨우는 순간이 존재했다. 한번은 영화의 자문을 담당한 오진아 감독님께 북한에서 외로웠던 적은 없었냐고 물었다. 감독님이 곧바로 “매일이 불안했기 때문에 외로울 새가 없었다”라고 하셨다. 그 말을 듣고 번개를 맞은 듯 정신이 들었다. 2022년엔 오유진 감독(<광장>의 조연출, 미술감독이자 김보솔 감독의 아내.-편집자)의 <유니크 타임>작업을 병행했다. 체력도 돈도 떨어진 때라 얼른 <광장>작업을 마무리하고 싶은 마음이 컸다. 그러다 <유니크 타임>이 안시국제애니메이션페스티벌(이하 안시영화제) 단편 경쟁부문에 진출하게 됐다. 막상 안시에 가니 경쟁작들에 비해 우리 작품의 완성도가 미흡한 것 같아 부끄럽더라. 그날 오유진 감독과 디즈니에서 개최하는 바비큐 파티도 포기하고 호숫가 선착장에서 술잔을 기울이며 다짐했다. <광장>은 기필코 잘 만들어서 다시 안시에 오자고. 꼭 <광장>으로 설욕하여 오늘처럼 17번 보트 앞에서 술을 마시자고. 그렇게 <광장>의 후반작업을 불살랐다. <광장>으로 안시영화제 경쟁부문에 진출했고, 수상도 했으며 17번 보트 앞에서 술도 마셨다. 이번엔 바비큐 파티도 참석했다. (웃음)

- 앞서 평양에 주재한 외교관의 인터뷰를 통해 영화를 구상했다고 밝혔다. 구체적 이미지를 상정한 이후 시나리오를 써갔나.

보리와 복주 이야기는 처음부터 명확했다. 취재를 위해 북한에 관련된 여러 영상을 찾아봤는데 외국인이 북한 시민에게 말이라도 걸려고 하면 의문의 남성이 다가와 둘을 떼어낸다. 그런 곳에서 외국인이 연애를 한다면 어떤 이야기가 나올지 궁금했다. 결국 <광장>은 남북 관계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 싶었던 작품이다. 그래서 남한을 상징하는 보리와 통일을 의미하는 복주, 그리고 북한을 상징하는 명준을 구상했다. 남북 관계에 대한 은유는 작품 곳곳에 녹아 있다. 미음자 구조의 관사에서 보리와 명준이 창을 통해 마주 보는 건 남북의 대치 상황을 빗댄 장면이고, 보리의 할머니가 남한 사람인 점도 핏줄로 이어진 한민족을 은유한다. 관객들에겐 <광장>의 주인공이 명준으로 기억되길 바랐다. 그래서 초반 15분이 지나면 영화의 무게중심이 명준으로 옮겨간다고 전제한 후 이야기를 써갔다.

- 왜 명준이 주인공이어야 했나.

오진아 감독님과 이야기를 나눌수록 내가 하려는 이야기는 명준의 고독과 닿아 있겠다는 판단이 섰다. 보리의 외로움은 아무래도 보편적이다. 보리처럼 자신의 쓸모를 인정받지 못할 때 밀려오는 외로움은 현대인이라면 누구나 공감할 테니 말이다. 반면 명준은 외로움이 어떤 감정인지 평생 모르고 살았을 남자다. “외로워서 그런가 봅니다”라는 명준의 대사는 “자유를 느꼈습니다”와 같은 의미다. 명준이 여러 속박에서 벗어나 비로소 불안과 고독을 곱씹는다면, 그리고 그 지점이 관객에게 울림을 준다면 더할 나위 없이 좋을 것 같았다.

- 아무래도 한국의 관객들은 영화를 보며 최인훈 작가의 동명 소설을 떠올릴 터다. 주인공의 이름도 이명준으로 같다. 소설 <광장>을 각색한 영화가 아님에도 최인훈 작가의 작품과 연결고리를 만든 이유가 궁금하다.

중학생 때 소설 <광장>을 접했던 기억만 붙들고 시나리오 집필을 시작했다. 주인공의 이름이 이명준이어야 한다는 비전은 처음부터 명확했다. 소설 속 이명준이 진리를 구도하는 젊은 청년이듯, 영화 속 명준도 진리를 찾아 자기가 선택한 옳은 길로 걸어가길 바랐다. 시나리오를 탈고할 즈음에야 소설 <광장>을 한번 더 읽었다. 마침 그때 국립현대미술관에서 소설 <광장>과 관련된 전시 <광장: 미술과 사회 1900 2019>가 열렸다. 전시장에서 최인훈 작가의 아들인 최윤구 칼럼니스트의 강연을 들었다. 그 강연을 잊을 수 없다.

- 어떤 내용을 들었길래.

소설 <광장>의 초판본 서문에 다음과 같은 문장이 쓰여 있다고 한다. “인생을 풍문 듣듯 산다는 건 슬픈 일입니다.” 그 문장을 듣자마자 소설 <광장>의 초판이 나온 때를 떠올렸다. 어쩌면 소설 <광장>은 이데올로기에 따라 목숨이 경각을 오가는 시대의 한중간에 선 어른이 울분을 토하듯 세태를 응시한 작품일 것이다. 영화 <광장>은 내가 쉽게 접하기 어려운 세계를 그렸다. 이때 아무리 영화 속 배경과 인물들로부터 거리를 두고자 해도, 재현의 과정에선 필수적으로 창작자의 관점이 개입할 수밖에 없다. 나의 객관성을 의심하던 때에 소설 <광장>의 서문이 스토리텔러로서 갖추어야 할 자세를 바로잡아주었다.

- 보리는 여러 위험을 감수하며 복주와의 사랑을 이어간다. 사랑하는 여자 때문에 모든 걸 포기한다는 멜로 라인의 당위성은 어떻게 세웠나.

당위성은… 솔직히 말하자면 결여됐다. (웃음) 제작 당시부터 프로듀서가 보리가 맹목적으로 복주를 사랑하는 이유를 물었다. 그때 자료 조사 중 알게 된 실화 하나를 떠올렸다. 북한도 외화벌이를 위해 해외에 식당을 많이 연다. 이때 북한 음식점에 근무하는 북한 출신 종업원과 남한의 사업가가 눈이 맞은 것이다. 아무리 해외라 해도 보위부 요원들이 상주하며 북한 시민들을 감시 중이다. 어느 날 경비가 느슨해졌을 때 두 사람은 모든 걸 내팽개치고 남한으로 도주했다고 한다. 이전에 계획한 적 없는 위험에 본능적으로 뛰어든 것이다. 그러니까 사랑에 눈이 멀면, 뭐든 감행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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