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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 또각또각 성실하게, 디자인 스튜디오 ‘또각’ 윤자영 작가
남선우 사진 오계옥 2026-01-15

2025 제21회 미쟝센단편영화제 배지.

학년이 바뀌고, 반이 달라져도, 교실에는 늘 이런 친구가 존재했다. 교과서 한구석에 수준급의 낙서를 남기는, 공책 한권을 자기 그림으로 가득 채우는, 가끔은 아무렇지 않게 한장을 툭 뜯어 짝꿍에게 선물하는 친구. 윤자영 또각 대표가 그런 아이였다. <포켓몬스터>와 <디지몬 어드벤처>, 그중에서도 불을 뿜는 겁쟁이 포켓몬 ‘브케인’을 가장 좋아한 어린이는 이런저런 캐릭터를 따라 그리며 재능을 다듬었다. 미술을 꿈꿨으나 집안의 반대로 도전해보지 못했다는 부모님이 당신들의 딸만큼은 전폭적으로 지원한 덕분에 예술고등학교에도 진학했다. 미술대학 전공은 동양화. 선택은 소거법으로 해냈다. 윤자영 대표 왈, “서양화는 하고 싶어 하는 학생이 많았고, 조소는 내가 너무 못했고, 디자인은 수학을 잘해야 했는데, 동양화과는 수능 수학 점수를 보지 않았다.” 다행히 디자인은 복수전공으로 배울 수 있었다.

그 후 영화 굿즈 제작의 길로 향한 윤자영 대표의 여정을 설명하기 위해서는 고등학교와 대학교 사이의 1년을 먼저 말해야 한다. 그가 영화와 가까워진 것은 재수를 하면서였기 때문이다. 당시 아침부터 밤이 되도록 공부만 하다가 자정이 되면 라디오를 듣곤 했던 그는 매주 영화를 소개하는 코너를 접했다. “<해리 포터> 시리즈 정도만 챙겨봤는데, 세상에 이렇게 다양한 영화가 있나 싶었다!” KBS 쿨FM <유희열의 라디오천국>이 열어준 신세계였다.

두 번째 입시를 마치고, 윤자영 대표는 새벽마다 궁금해하던 세계를 직접 여행해보기로 했다. 마침 캠퍼스에 아트하우스 모모가 있는 이화여자대학교에 들어갔겠다, 모험이 한결 쉬워졌다. 개봉하는 독립·예술영화를 챙기며 영화와 친해진 그는 영사실에도 발을 들였다. CGV 압구정점, 여의도점 영사실에서 아르바이트를 한 것이다. 그가 맡았던 업무는 한때 CGV 아트하우스가 운영한 큐레이터 프로그램이 진행될 때마다 자료 화면 띄우기. 평론가가 관객들 앞에서 마이크를 잡고 방금 상영한 영화에 관해 해설할 때, 그는 영사실에서 책장을 넘기듯 슬라이드를 넘겼다. 아르바이트를 마치고 나올 때마다 CGV에서 주는 영화 관람권이 쌓였다. “그걸 다 써야겠다는 생각으로 영화를 엄~청 보러 다녔다.” CGV 바깥에서는 고전영화에 빠져들었다. “로베르 브레송 영화 속 인물들은 죽고 싶다는 말도 참 문학적으로 하더라. 그것마저 멋있어 낙원상가에 있는 서울아트시네마를 자주 들락거렸다.”

토끼 귀, 코끼리 코를 달고 극장으로

2021 제47회 서울독립영화제 배지.

감상은 기록으로 이어졌다. 휴학 후 애니메이션 스튜디오에서 배경 작화 인턴 생활을 하던 중 윤자영 대표의 페르소나와도 같은 캐릭터 ‘토끼리’가 탄생했다. “일하다가 힘들 때면 노트에 낙서했다. 하루는 토끼 귀에 코끼리 코를 가진 괴생명체를 그려 페이스북에 올렸는데, 친구가 그걸 보고 나와 닮았다는 거다. 그래서 토끼리 이미지를 인스타그램 프로필 사진으로 썼다. 토끼리를 주인공 삼아 그림도 그렸다.” 그 그림은 영화 리뷰가 되었다가 영화 본 날의 일기도 되었다. 때로는 영화를 같이 본 친구들과 수다를 나눈 후기도 남겼다. 그렇게 100편이 넘는 영화에 관한 짧은 만화가 모인 책이 바로 <어제 극장에서 토끼리를 만났어>. 2016년 독립출판한 이 책은 자연스럽게 윤자영이라는 사람의 관심과 장기를 대변하는 포트폴리오로서 이곳저곳에 파고들었다. 부산의 서점이자 편집숍인 샵메이커즈는 이 책을 본 뒤 부산국제영화제와 함께하는 기념품 제작 프로젝트에 그를 초대했고, 인하우스 디자이너를 구하고 있던 한 배급사는 그를 직원으로 채용했다. 영화가, 토끼리가, 진로를 개척해준 것이다.

2018년 샵메이커즈와 협업한 부산국제영화제 기념품 배지가 관객들에게 큰 호응을 얻고 나서부터 굿즈 제작자 ‘토끼리’로서의 항해도 순풍을 탔다. 수년째 서울독립영화제 기념품 배지로도 선보인 바 있는 그의 킥은 말풍선. 졸업 작품으로 고전영화 속 대사들을 아카이빙해 책과 애니메이션으로 내놓았을 만큼 “영화를 볼 때 말의 뉘앙스에 민감한 편”이라는 그는 ‘언니는 정말 독립영화 같은 사람이야’, ‘어떻게 겨울까지 사랑하겠어, 독립영화를 사랑하는 거지’ 같은 문구를 배지에 박아넣어 독립영화 팬들의 소장 욕구를 자극했다. 배지를 넘어 엽서, 포스터, 에코백까지 다종의 굿즈를 만져온 그는 “디자이너로서 나의 관점을 강조하기보다 클라이언트의 요구에 귀 기울이려 노력해온 것”이 장수의 비결일지 모른다고 답했다. “백지상태에서 굿즈 아이디어를 부탁하는 클라이언트도 있고, 모든 것이 정해진 상태에서 시안과 똑같이 구현만 해달라는 클라이언트도 있다. 완전히 자유로운 프로젝트도, 가이드가 무척 빽빽한 프로젝트도 한다. 원래 일을 많이 갖고 있는 걸 좋아한다. 모든 작업이 각자의 이유로 힘들면서 재밌으니까!”

또각또각 성실하게

2020년 배급사에서 퇴사한 뒤에는 출판사에서 일했다. 퇴근하고서야 토끼리로 돌아와 프리랜서로서 굿즈를 구상할 수 있었다. 조금 지쳐 있던 차에 한 멀티플렉스로부터 스카우트 제의를 받고 고민에 빠졌다. “그곳에 가도 언젠가 지치지 않을까? 낮에도 한 일을 밤에도 하기 위해서는 나만의 스튜디오가 필요할 것 같았다.” 2023년부터 전업에 나선 윤자영 대표는 마침내 ‘또각’이라는 이름을 찾았다. ‘세상에 없는 것’을 뜻하는 단어인 토각(兔角)을 강하게 발음한 느낌도 주는 사명이라고 한다. 토끼리의 귀여운 어감을 보다 중립적으로 계승하고 싶은 욕심도 있었다.

간판을 내걸자 “어디서 소문이 퍼진 건지 일의 규모가 점점 커졌다. 굿즈로 먹고살 수 있을 거란 확신 없이 시작한 사업이었는데 말이다!” 디즈니 굿즈 패키지는 물론 예능프로그램이나 가수 공연을 위한 공식 굿즈를 만드는 등 분야도 넓어졌다. “적응할 새도 없이 현장에서 깨지며 단기간에 배웠다. 미팅에서 클라이언트가 레퍼런스를 보여주는데, 무슨 소재를 쓴 건지, 어떻게 이런 효과가 나는지 전혀 모르겠는 거다. ‘지금은 모르겠다. 하지만 일주일 만에 알아오겠다’고 말한 뒤 을지로와 파주의 인쇄소를 하루에 몇개씩 찾아다녔다. 이제 그만큼 많은 인쇄소 거래처가 생겼다. 그들이 도와준 덕분에 작업이 수월해졌다.”

지난해 창립 2주년을 맞은 또각의 소식을 알리며, 윤자영 대표는 인스타그램에 이렇게 썼다. “성실함의 가치, 즐거운 마음을 잃지 않고 나아가는 스튜디오가 되겠습니다.” 다른 무엇보다도 일을 성실히 해내는 것, 영화를 즐겁게 대하는 것만큼은 약속할 수 있어서였단다. 고군분투는 계속되고 있다. 그래서 “클라이언트가 생각하는 것과 내가 생각하는 것의 괴리를 줄여가는 게 당장의 바람”이다. 언젠가는 그림을 통해, 더 나아가 이야기를 할 수 있는 매체라면 뭐든 창작해보고 싶은 소망도 있다. “영화 <지옥만세>, 소설이자 연극이 된 <단명소녀 투쟁기>를 무척 아낀다. 그렇게 엉망진창이어도 살아보자고 의지를 다지는 이야기를 좋아한다. 그게 내가 생각하는 이상적인 이야기다.” 그런 작업을 통해서도 세상에 말을 걸어보고 싶은 윤자영 대표는 앞으로도 지금처럼 또각또각 걸음을 내디딜 작정이다. 그가 사랑한 이야기 속 주인공들처럼, 헤맬지언정 재미나게!

디자이너의 감각을 자극하는 영화들

<이반의 어린 시절>

감독 안드레이 타르코프스키, 1962

“서울아트시네마가 낙원상가에 있던 시절에 봤다. 내가 태어나서 본 영화 중 제일 아름답다고 생각하는 작품이다. 전쟁으로 황폐해진 풍경을 담담하게 그려 슬프지만, 아이들이 바닷가에서 뛰노는 장면만큼은 같은 흑백 화면 안에서도 너무나 따뜻하고 찬란하다. 그 온도차가 마음에 남았다. 촬영도 그렇다. 소년의 심리에 따라 다양한 구도를 보여줘 아주 멋있었다.”

<비틀쥬스>

감독 팀 버튼, 1988

“<비틀쥬스>도 보지 못했는데, <비틀쥬스 비틀쥬스>가 개봉한다는 소식을 들었다. <비틀쥬스>부터 보고 <비틀쥬스 비틀쥬스>를 보러 가야 할 것 같아 OTT로 보기 시작했는데, 너무 재밌는 거다! 미친 상상력을 시각적으로 뻔뻔하게, 조악하게, 극단적으로 표현해내는 에너지에 빠져들었다. 기개가 느껴지는 영화였달까. 과잉될지언정 밀어붙이는 힘이 좋았다.”

<로타리의 한철>

감독 김소연, 2025

“단편으로는 지난해 많은 영화제와 시상식에서 주목받은 <로타리의 한철>을 꼽고 싶다. 낡은 슈퍼를 배경 삼아 특별할 것 없어 보이는 일상을 보여주는 영화지만, ‘낡아간다’는 감각 자체를 특별하게 포착해내는 영화라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굿즈를 제작하는 사람으로서 영화도, 인쇄도 사양산업이라는 말을 들으며 일해왔다. 그런데 막상 그 세계에서 일하는 사람들은 하루하루 열심히 살아간다. 멸망을 기다리며 지내지 않는다. <로타리의 한철>을 보면서 내 주변 영화인들, 인쇄소 기장님들이 떠올랐다. 영화를 통해 그럴 수 있었다는 게 좋은 기억으로 남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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