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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 상실과 치유의 지리학, 이성관 감독·배우 권오중이 함께 떠난 <마사이 크로스> 스토리
김소미 2025-11-27

요섭(권오중)은 투병 중인 딸에게 뜻밖의 부탁을 받는다. 후원 결연 중인 마사이족 소녀 나쉬파에(메리스 텐키아)가 강제 조혼 위기에 처했다는 편지를 받은 직후, 딸은 병상에서 일어설 수 없는 자신을 대신해 요섭에게 나쉬파에를 구해줄 것을 청한다. 요섭은 결국 1만km 떨어진 케냐로 향한다. 영화가 주목하는 것은 단순한 물리적 거리가 아니다. 이성관 감독은 상실감을 안고 살아가는 이들의 아픔에 주목했다. 앞서 사고로 작은딸을 잃은 요섭은 이제 하나 남은 큰딸마저 병마와 싸우는 과정을 지켜보고 있다. 요섭의 케냐행은 표면적으로 딸의 소원을 이뤄주려는 행위지만, 이미 한 차례 겪은 상실의 무게에 짓눌린 인간이 스스로를 회복해나가는 순례에 가깝다. <마사이 크로스>가 띠는 유쾌한 기색은 마사이족 소녀들이 처하는 조혼과 할례라는 문제적 풍습을 조명하되 이를 무겁지만은 않은 이야기 속에서 살피고자 한 시도에서 비롯됐다. 원주민의 풍습과 전통, 기아 위기의 고통을 다루면서도 영화는 도덕적 우월감이나 피상적인 연민의 함정을 피하려 애쓴다. 대신 요섭과 마사이족 소녀 사이의 담담한 만남을 통해 상실이라는 보편적 감정의 결을 더듬어간다.

배우 권오중은 6년 만의 스크린 복귀작으로 이 작품을 선택했다. 권오중의 참여는 애초 이성관 감독이 회당 5~10분 분량의 웹드라마 형태로 계획했던 작품을 장편영화로 바꾸어 극장 개봉작의 꿈을 품을 수 있도록 했다. 배우의 지지 속에서 이성관 감독은 2개월 만에 장편 분량의 시나리오를 새로 써내려갔다. 신앙심이 깊은 감독과 배우가 만나 기독교 영화가 극장 개봉작으로 이어지기 힘든 시장 상황에 작은 이변을 만들어보기로 협력한 것이다. NGO 단체 함께하는 사랑밭, 기독교 영화 제작사 파이오니아21의 지원을 받아 이성관 감독은 선교 다큐멘터리 <파파 오랑후탄>에 이어 장편 극영화 <마사이 크로스>까지 제작하게 되었다. 초저예산 작업 환경에서 약 12회차의 케냐 로케이션에 동원된 영화 전문 인력은 감독을 포함해 5명. 이성관 감독은 환경적 제약 속에서 자신의 이력을 돌아봤고 2016년부터 기독교 복음방송을 통해 8년 이상을 매년 1~2차례 케냐 취재를 오갔던 경험을 밑거름으로 삼았다. 그곳에서 일찌감치 강제 조혼, 할례로 고통받는 아이들, 이를 피하려고 도망치거나 탈출 과정에서 다치는 아이들의 이야기를 보고 들어온 그였다. 이성관 감독은 “이 영화는 흥행이 아닌 사람을 살리기 위한 것이다. 마사이족의 현실을 알리고 후원을 독려하는 목적도 분명히 있다. 그와 동시에 이것은 상실에 관한 이야기”라고 전했다. 어린 나이에 공부하고 꿈꿀 기회를 잃어버린 아이들과 가족을 잃고 슬픔에 잠긴 한 남자가 만난다. 상실과 상실이 만나는 이야기로 봐주시면 좋겠다.”

이성관 감독의 포토 코멘터리

요섭이 케냐에 도착해 그를 반기는 마사이족 추장과 청년들에게 다짜고짜 침을 맞는 장면이 있다. 서로 침을 뱉는 행위는 이성관 감독도 일찍이 케냐를 드나들 때 접한 것으로, “낯선 외지인에게 대한 거부감과 반가움에 대한 표시”였다고 그는 회상한다. 이 기억을 되살려 이성관 감독은 요섭의 환영식 장면을 제대로 살리기 위해 유독 애썼다. 귀국 후 “서로의 침과 침이 이동하는 공중 장면을 따로 옥상에서 클로즈업 촬영할 정도”였다. 침은 계란 흰자로 만든 소품을 활용했다. “무거운 주제를 코믹하고 발랄한 톤으로 전하는 작품의 컨셉이 효과적으로 드러나는 순간이란 판단했다.” 추장 역을 맡은 인물은 현지 마을에서도 가장 나이가 많았는데, 흔쾌히 촬영에 동의했지만 침을 뱉고 맞는 테이크가 여러 번 반복해야 하는 상황이 감독을 긴장하게 만들기도 했다는 후문이다.

케냐 배우 앨리스 왕가리는 과거 함께하는 사랑밭 한국 지부에 면접을 본 적 있는 독특한 이력의 소유자다. 한국 드라마, 가요를 사랑해서 한국어를 독학했고, 지금은 유창한 한국어 실력을 자랑한다. 이성관 감독의 호출로 현지 코디네이터 역에 기꺼이 참여한 왕가리는 케냐 현지 배우 8명을 소개하며 작품의 톡톡한 가교 역할을 했다.

조혼을 피해 도망친 마사이족 소녀 나쉬파에 역은 캐스팅이 관건이었다. 이성관 감독이 케냐 나이로비에서 전문 아역배우들을 오디션했지만 적역을 찾지 못해 고심한 시간도 길었다. “실제 마사이족과 협업하고자 했다. 중요한 역할이라 처음엔 전문 배우를 찾았지만 마땅한 친구를 만나지 못해 포기할까 하는 순간에 예배를 마치고 나오다가 우연히 만난 소녀가 눈에 들어왔다.” 연기 경험이 전무한 12살의 현지 주민이었다. “연기를 잘하지는 않지만 눈빛에서 희로애락을 읽었고 촬영을 거듭할수록 연기를 더 배우고 잘하고 싶어 하는 의지가 빛났다. 존재 자체로서 편안하고, 과장된 부분이 없이 자연스럽게 참여할 수 있도록 신경 썼다.”

함께하는 사랑밭의 케냐 사무국이 수도 나이로비에서 3시간 이상 떨어진 깊은 시골에 있었고, 이성관 감독은 그곳을 <마사이 크로스>의 배경으로 삼았다. “사무실, 숙소, 학교, 저수지, 소똥집이 모두 근처에 있었고, 학교를 다니는 아이들이 모두 마사이족 아이들이라 그들의 실제 경험을 듣고 담아낼 수 있었다.” 그가 오래 지켜본 현실 중에는 주변 환경이 극도로 건조해 물 부족으로 아이들이 갈증에 처하는 상황도 있엇다. “아이들이 목이 마르면 고여 있는 흙탕물을 마시는 모습을 보아왔다.”

 외부인 출입이 금지된 곳이었지만 어렵게 나쿠루 쓰레기 마을의 촬영 동의를 얻었다. 아이들이 생계를 위해 쓰레기를 줍는 곳이다. 쓰레기장 외에도 이성관 감독에게 적나라한 풍경을 얼마나, 어떻게 보여주는 것이 좋을지 고민하게 한 또 다른 요소는 할례 과정이었다. “마취도 안 하고 면도칼을 사용하는 탓에 패혈증에 걸려 죽는 아이들이 많다. 다만 고민 끝에 그 고통을 적나라하게 보여주지 않기로 했다. 한편 영화에 직접 담지는 않더라도 함부로 상상하지 않으려 했다. 조혼 결혼식 시연을 부탁하는 등 원주민들을 취재해 정확한 내용을 숙지하고자 했다.”

한국에서 촬영한 컨테이너 장면이 요섭의 상실감과 죄책감, 그것이 치유되는 과정을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요섭은 종종 꿈을 꾸는데, 주로 둘째 딸 예영과 다시 만나 오붓하게 마주보고 대화하는 상황이 펼쳐진다. 그런데 장소가 특이하다. 일반적인 카페나 레스토랑이 아니라 컨테이너 안에 놓인 테이블 하나, 정체를 알기 힘든 바리스타가 전부다. “사람의 손길이 닿지 않고 빛이 들어오지 않는 해저 2만리와 같은 공간으로도 보이길 바랐다. 도저히 사람이 들어갈 수도 없고 닿을 수 없는 내면의 세계다. 바리스타는 일종의 영적 안내자 같은 존재다.” “한국으로 돌아가지 않고 쓰레기장에 가서 칼을 맞으면서까지도 나쉬파에를 구하려 할 때 요섭의 마음속에서 무언가 다시 살아난다.” 나쉬파에의 삶에도 요섭이 비슷한 역할을 할 수 있을까. 이성관 감독은 상실을 구원으로 가는 과정의 연료로 바라본다. “요섭이 예영을 떠나보내는 마지막 순간을 촬영할 때 갑자기 해가 뜨더라. 신비로움을 느꼈다. 어두컴컴한 장면이었는데 조명 없이도 갑자기 빛이 들이쳐서 영화 속에 자연스럽게 희망이 자리 잡는 것만 같았다. ”

 권오중의 존재가 <마사이 크로스>의 톤 앤드 매너를 결정했다. 이성관 감독은 “권오중 배우가 키플레이어다.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시트콤, <순풍 산부인과>속 캐릭터를 최대한 살리기로” 했다. 그는 <마사이 크로스>를 두고 “권오중이 없으면 쓰디쓴 한약일 수 있지만 그가 설탕 같은 존재가 되어주었다”고 표현했다. “마사이족의 삶 속에 들어가 소똥으로 집을 짓고 환영식에서 침을 주고받는 등 슬픈 상황에서도 빛나는 것이 웃음이라는 점을 보여주고 싶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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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제공 문제없는영화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