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종 한장의 이미지, 한 소절의 음악이 영화 전체보다 오랫동안 기억에 남을 때가 있다. 윤가은 감독의 <세계의 주인>을 본 뒤 계속 떠오른 이미지는 태권도장 벽의 그을음이다. 관장님(이대연)은 미도(고민시)가 태권도장에서 삼겹살을 구워 먹다가 사고 친 흔적을 지우지 않는다. 얼핏 상처와 흔적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인다는 도식적인 상징으로 설명할 수 있는 장면이지만, 내내 잊히지 않은 이유는 관장님의 태도 때문이었다.
아마도 관장님은 미도의 사정을 속속들이 알진 못할 것이다. 그럼에도 특별한 일인 양 호들갑 떨지 않고 덤덤히 기다린다. 참 좋은 어른이다. 대개 이해와 공감은 실과 바늘처럼 세트로 따라오지만 실은 꼭 연결되어야 할 필요조건도, 인과관계도 아니다. 상대의 사정을 꼭 다 알지 않아도 마음을 나누는 방법은 얼마든지 있다. 일일이 캐묻지 않고, 입을 닫고, 그저 그럴 수 있다고 기다려주는 걸로도 충분하다. 때론 침묵하는 다정함이 느리지만 더 은근한 온기로 우리를 감싼다.
지금 와 돌이켜보니 상대가 먼저 걸음을 디딜 때까지 기다려주는 것만큼 어려운 일도 드물다. 티를 내지 않고 인내하는 것이야말로 먼저 경험해본 선생, 먼저 자란 어른이기에 할 수 있는 특별한 능력이다. 아이를 키우면서 제일 먼저 배우고 훈련하는 것도 기다리는 일이었다. 얼른 달려가 안아주고, 고쳐주고, 도와주고 싶지만 꾹 참고 기다릴 줄 알아야 한다. 요즘엔 나의 규격, 나의 세계, 내 품에 굳이 욱여넣는 대신 독립된 하나의 세계를 존중하면서 애정하는 법을 매일 배우는 중이다. 너를 좋아하는 마음에는 너무 춥지도 뜨겁지도 않을 거리가 필요하다. 다만 거리는 조정해도 양까지 조정할 필요는 없다. 다다익선. 다정(多情). 정이 많다는 표현을 참 좋아한다.
영화를 통해 다양한 종류의 다정을 마주한다. 목소리를 높여 잘못된 세상을 뒤집는 뜨거운 열정이 있는가 하면, 침묵하며 자리를 마련하는 배려심도 있다. <원 배틀 애프터 어나더>의 세르히오(베니치오 델 토로)처럼 여유와 평온함으로 기회를 제공해주는 선생(영화의 뉘앙스를 살린다면 ‘센세’)이 있는가 하면, 켄 로치의 영화처럼 뜨거운 웅변으로 세상을 바꿔야 한다고 호소하며 선두에서 길을 개척하는 선생도 있다. <주토피아>의 닉과 주디처럼 서로의 생긴 꼴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기까지 얼마나 지난한 과정과 에너지가 필요한가. 나를 고백할 용기와 상대를 똑바로 직시할 결심. 그 모든 마음들은 다정을 토양 삼아 피어난다고 믿는다. 꽃의 형태는 달라도 결국 정(情)이라는 양분, 서로를 향한 마음의 작용이 세상을 구한다.
소외된 이웃에게 다정을 전해온 NGO ‘함께하는 사랑밭’에서 올해부터 작은 영화제를 시작한다. ‘문제없는영화제’라는 타이틀은 희망과 지향을 담은 표현이다. 아마도 세상에 문제가 사라지는 일은 없을 것이다. ‘문제 삼지 않으면 문제가 안된다’는 무서운 말처럼 우리 사회는 문제가 없는 척, 보이지 않도록 미뤄두는 데 더 익숙하다. 반대로 영화는 그렇게 지워진 것들을 복원하고 드러내는 데 특화된 매체다. ‘여기 이런 문제가 있습니다’라는 카메라의 외침 속에서 또 다른 다정함을 느낀다. 언젠가 정말 문제없는 세상이 올 때까지 이 영화제가 지속되길 희망하며, 여러분의 다정을 기다리며, 문제없는영화제의 첫발을 디딘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