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디!
새벽 2시, 비 오는 홍콩 거리를 레커차에 실린 자동차 운전석에 앉아 달린다. 예상에 없던 비가 부슬부슬 내린 탓에 제작부 스태프 한명이 레커차에 올라타서 몸을 낮추고 숨어 있다가, 컷 소리가 나면 일어나 손걸레로 부리나케 차창을 닦는다. 잠시라도 비가 잦아드는 틈을 타 바로 슛을 가기 위해, 적당한 타이밍을 노리는 수완 없이 그냥 컷과 다음 레디 사이 동안 우직하게 계속해서 비를 닦는다.
“컷! ○○ 야, 안되겠다. 잠깐 쉴게. 잠깐 닦지 말고 대기.”
비가 좀처럼 잦아질 기미가 보이지 않자, 무전기를 타고 감독 목소리가 들린다. 그래도 ○○는 걸레질을 멈추지 않는다. 앞 유리, 옆 유리, 뒤 유리, 다시 앞 유리… 나는 괜히 미안하고 안쓰러운 마음에 운전석 창문을 열고,
“○○씨, 해외 촬영 이번이 처음이에요?”
“아니요, 세 번째요.”
“와! 뭐 뭐 했는데요?”
“<중증외상센터>랑 <당신의 맛>삿포로 분량이랑 이거요.”
“<중증외상센터>는 사막 촬영이었겠네요? 염소 몰고 가서 잡아먹고 그랬어요? 저는 전에 단체 사막 투어를 간 적 있는데 그때 셰르파들이 염소 한 마리를 몰고 와서 다음날 아침에 그놈을 잡아서 스튜를 끓여줬어요”
“아뇨, 그런 건 아닌데, (사이) 재밌었어요.”
그가 웃는다.
다시 무전기 소리,
“자, 다시 슛 갈게요. ○○야, 창문 닦아줘. 레디, 자, 준비할게요, 레디!”
정적.
다시 무전기 소리,
“컷! 아, 안되겠네요, 잠깐 다시 대기.”
“선배님, 어떻게 이렇게 레디만 하면 비가 와요?”
이번에 나는 뒷좌석에 앉은 상대 배우에게 이야기를 건네본다.
“이럴 땐 그냥 남기남 감독님 스타일로 가야 돼. ‘날씨가 왜 이래?’ 이렇게 그냥 대놓고 해버려야 된다니까.” 우린 함께 킬킬거린다. 예보에도 없던 비가 오면서, 홍콩 스태프들과 한국 스태프들, 레커차와 도로 통제와 지원 차량 섭외가 달린 비싼 촬영 회차가 흔들린다. 이어지는 긴급회의와 촬영 순서 변경과 장소 이동을 거듭하는 사이, 오락가락하는 부슬비 속에서 무전기를 타고 흐르는 음성이 레디와 액션과 컷과 오케이를 오가며 방황하는 사이, 하룻밤이 꼬박 넘어간다. 어스름 해가 뜨고, 이어지기로 예정되어 있던 오전 촬영이 급기야 비 때문에 취소된다. 모든 배우와 스태프들이 고생스럽고 허탈하겠지만 특히 제작자는 얼마나 피가 마르고 감독은 얼마나 속이 타들어갈까.
그런데 이 와중에 허투루 외치는 오케이 사인이 없다는 사실이 떠오른다. 잠깐 멈춘 빗속에서 겨우 한 테이크씩 촬영을 이어가면서도 무전기에서는 ‘이렇게 해보면 어떨까요, 저런 건 어떠세요?’ 같은 디렉션이 이어졌다. 속으로 감독님의 집념이 대단하다고 생각하면서 나 역시 어수선한 와중에 집중을 이어가려고 애를 쓴 밤이었다. 그럼에도 이날 못 찍은 분량은 다시 다른 날로 분산배치되었고, 어떤 신들은 한국 가서 다시 찍을지도 모른다는 흉흉한 소문이 돈다.
촬영 없는 하루를 내리 푹 쉬고, 다음날 서구룡문화지구에 있는 M+ 갤러리를 방문했다. 사실 나는 다른 배우들에 비해 홍콩 촬영 분량이 많지 않아 생각보다 잉여 시간이 많다 보니 오히려 마음이 갈피를 못 잡고 산란했는데, 갤러리에 들어서서 전시 작품들을 보자마자 마음이 착 가라앉는다. 나는 새삼, 왜일까, 왜 지금 내 정신이 이렇게 새롭게 명료해지는 걸까, 궁금해졌다. 그러다 문득 ‘선택’이라는 단어가 떠올랐다. 내가 보고 있는 조각 작품의 작가는 이런 재료로, 이런 모양을, 이렇게 구성하고 배치하기 위해 얼마나 많은 실시간의 선택을 감행했을까. 스스로에게 그리고 창작을 돕는 주변인들에게 레디와 액션과 컷과 오케이를 외치는 수많은 선택의 순간을 거쳐왔겠지? 지금 내가 보고 있는 결과물에는 작가의 취향, 기질, 감각, 사유, 시대 감성, 사회의식 등등 자신의 모든 것을 담보한 오케이의 순간이 전제되어 있겠지? 한마디로 작가는 자신의 전 존재를 걸고 ‘이것이 지금 저의 오케이입니다’라고 배를 까고 누운 것이다, 작품이 작가를 대리하고 있기는 하지만.
예술 작품 앞에서 내 산란한 정신이 자연스럽게 그러모아지는 것은 어쩌면 작가가 거쳤을 그 수많은 선택의 순간에 대한 본능적인 공감과 이해 때문이 아닐까. 한 인간이 자신의 선택을 사람들 앞에 내놓기 위해 거쳤을 모든 정제의 순간들, 벼려진 기술과 마음들, 숨 쉬듯 자연스러웠을 불안과 그 불안을 이겨낸 담대함을 이해하는 것이 아닐까. 게다가 작가는 자신의 작품이 누군가에게 보여질 것이고 기왕이면 보는 사람의 삶을 뚫고 들어갔으면 좋겠다는 열망을 품었을 것이다. 작품을 보는 나는 결과물뿐만 아니라 작가의 선택의 순간들과 열망의 시간을 함께 본다. 그리고 인간으로서 다른 한 인간의 고독과 집념과 열망의 시간에 본능적으로 공감한다.
홍콩 오기 얼마 전에 ‘국립현대무용단 무용×기술 융합 프로젝트’의 일환으로 공연된 <넌댄스 댄스>렉처 퍼포먼스를 보러, 지금은 운영되지 않는 ‘소극장 판’을 찾았다. 한때 국립극단이 자리하고 있던 극장 터는 관리되지 않고 낙엽이 쌓여 날씨처럼 뒤숭숭했다. <넌댄스 댄스>는 미디어 아티스트 신승백, 김용훈과 무용가 정지혜, 강승룡이 협업한 작품으로 2022년 9월에 초연된 후 전시, 공연, 렉처 퍼포먼스 등 다양한 형태로 소개되었다. ‘인공지능이 춤으로 인식하지 못하는 춤’을 찾으려는 시도에서 출발한 이 작품은, 구글 비디오 AI와 연동된 카메라 앞에 선 무용수들이 AI로부터 ‘넌댄스’라는 판단을 듣는 움직임을 찾는 과정을 보여준다.
극장으로 들어서니 카메라가 빈 무대를 비추고 있고, AI 음성이 카메라에 포착되는 환경들(무대 벽 등), 카메라 앞을 지나치는 사람들 등을 실시간으로 포착해 약간의 시간차를 두고 ‘연극연기’, ‘연극연기’, ‘댄스’, ‘댄스’, ‘넌댄스’ 등의 음성 판단을 내린다. 시간이 되면 퍼포머들이 자신들이 움직일 위치에 카펫을 까는데, 여지없이 ‘카펫 깔기’라는 AI 음성이 들린다. 그리고 곧이어 다시 ‘연극연기’, ‘연극연기’. 무대처럼 보이는 공간에 사람이 서 있으면 주로 ‘연극연기’라고 인식하는 것이 웃기면서도 ‘AI는 연극연기를 뭐라고 생각하는 걸까?’라는 질문이 자연스럽게 떠오른다.
세명의 퍼포머가 돌아가며 자신이 생각한 넌댄스 댄스를 시도한다. AI가 쉬지 않고 댄스, 댄스, 댄스, 하다가 가끔 넌댄스, 라고 하면 우리 모두 잠깐 안도한다. 첫 번째 퍼포머는 넌댄스를 찾기 위해 AI가 애초에 다른 활동으로 인식하는 움직임에서 출발하기로 했다면서 섀도복싱을 한다. AI가 한참을 연극연기, 연극연기하다가 복싱, 이라고 인식하더니, 그 후로 복싱, 복싱, 복싱, 이때쯤 퍼포머가 “저는 움직임에 리듬과 질감을 넣으면 춤이라고 생각합니다”라고 말하고는 휘두르는 팔과 다리의 리듬과 반경을 변경한다. AI 음성이 복싱, 복싱에서, 연극연기를 거쳐 드디어 ‘넌댄스’ 그러더니 얼마 지나지 않아 바로 다시 ‘댄스’.
관객 중 몇몇이 ‘AI는 넌댄스라고 인식하지만 본인에게는 여전히 댄스로 인식될 수 있는 움직임’을 제시해 달라고 요청받는다. 퍼포머는 관객이 말로 제시하는 명령어를 몸으로 수행하고 우리는 모두 함께 AI의 실시간 판단을 듣는다. “최대한 천천히 앉았다가 일어나주세요”, “가만히 선 채 발가락만 움직여주세요’ 같은 관객의 주문이 이어지고, AI에 의해 아주 가끔 ‘넌댄스’라는 판단이 내려졌다가 곧바로 ‘댄스’로 수렴하는 일이 반복된다. 무대와 객석에서는 “왜 이런 주문을 하셨나요?”, “춤이 뭐라고 생각하시나요?”, “AI는 넌댄스라고 했지만 본인은 댄스라고 생각하신다면 그 판단의 근거는 무엇인가요?” 같은 과정에 대한 문답들이 오간다. <넌댄스 댄스>는 어느덧 AI가 인간의 움직임을 읽고 해석하고 구현할 수 있는 시대에 인간만이 할 수 있는 움직임이란 무엇일까, 라는 질문을 넘어 춤을 춘다는 행위, 춤을 본다는 행위가 무엇인지, 우리가 춤을 감상할 때 보는 것이 과연 무엇인지를 사유하게 한다.
AI가 영화산업의 거의 모든 부분을 사람보다 훨씬 더 효율적이고 저렴하게 수행해낼 수 있게 될 때 영화산업은 결국 AI로 대체 될 것인가. 사람이 만든 영화, 사람이 출연하는 영화라는 것이 언제까지 존재할 것인가. AI가 활성화된 시대에 영화는 어떤 가치 혹은 의미를 갖게 될 것인가. 누구도 선뜻 답할 수 없는, 하지만 곧 당면할 질문 앞에서 나는 역시 ‘선택’이라는 단어를 떠올려본다. 우리가 어떤 예술 작품을 접할 때, 그것이 한 인간의 불안과 오해받을 각오와 소통할 수 있다는 기대와 인정받고 싶은 욕망과 그 이상의 모든 것을 걸고 내놓은 선택의 결과물이라는 것을 관객이 직관적으로 느낀다면, 관객은 단지 ‘AI가 구현한 모래언덕이 더 진짜 같다’는 식의 리액션 대신, 이 모래언덕을 구현하겠다고 결정하고 수많은 레디와 액션과 컷과 오케이를 거쳐낸 감독과 스태프와 배우들의 불안과 담대함을 바라보고 싶어 하지 않을까. 그것이 세상 속에서 자신들이 느끼는 불안과 담대함과 연결되기를 바라지 않을까, 라는 나이브하지만 절박한 생각을 해본다.
세계가 들이닥친다. 옛 국립극단 터에는 낙엽만 쌓이고, 누구는 현금은 다 종이 쪼가리가 될 거라고 하고, AI가 일자리를 대체할 것은 자명하고, 나는 침사추이에 있는 유명한 일본 라멘집에 갔다가 큐알코드로 주문을 해야 하는데 내 휴대폰에서 큐알코드 링크가 계속 접속이 안돼 결국 라멘은 구경도 못하고 그냥 나왔다.
열흘간의 홍콩 촬영이 끝나고 스태프들과 배우들이 모여 함께 저녁 식사를 한다. 한두잔씩 술잔이 오가고 이 장면 저 장면에 대한 이야기가 오간다. 여기 모인 모두가 스스로와 그리고 서로와 레디, 액션, 컷, 오케이를 주고받은 사람들이다. 각자 자신의 전 존재를 걸고 자신의 선택을 내보이는 사람들이다. 어쩌면 우리 모두 매 순간 이렇게 살고 있는 게 아닐까. 스스로에게 그리고 누군가에게 매 순간 나의 선택을, 나의 전 존재를 내보이면서. 오해받고 미움받을 위험을 무릅쓰면서. 그리고 우리 모두 누군가의 떨리는 선택을 마주하며 위안을 받는 게 아닐까. 그 위안에 힘입어 나 역시 비바람 속에서도 한번 더 레디, 액션, 컷, 오케이를 외쳐보는 게 아닐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