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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다은의 RECORDER] 세계의 주인, 세계의 역동성

<세계의 주인>

주인(서수빈)은 동급생 수호(김정식)가 아동 성범죄자 출소를 반대하는 서명문을 들이밀자 책상에 엎드린 채 심드렁하기만 하다. 수호의 거듭된 다그침에 그는 서명문 속 한 문장이 사실과 다르다며 사인을 거부한다. “피해자의 삶을 완전히 파괴한다. 이게 맞아?” 수호는 주인의 반문에 담긴 의미를 전혀 이해하지 못한다. 주인이 더는 참지 못하고 일어나 외친다. “나도 성폭행 피해자야. 내 인생이 망가진 것 같냐?” 왁자지껄하던 교실에 침묵이 내려앉는 순간, 주인은 농담이었다고 멋쩍게 웃으며 자리를 뜬다. 씩씩함과 연약함이 한몸으로 출렁이는 이 대목에서, 우리 중 누구도 주인의 말에 눌러 담긴 사실과 진실을 거짓으로 흘려듣지 못할 것이다. 그러나 영화는 이 장면이 교실에 불러올 여진에 머물 틈 없이 어느 가을날의 한적한 풍경으로 성큼 이동해버린다. 카메라는 어느새 땅과 아주 멀리 떨어진 공중에서 테니스 코트를 명랑하게 가로지르는 여고생들을 바라보고 있다. 이후 영화가 반복 소환할 <양들은 한가로이 풀을 뜯고>(바흐)의 선율이 이 풍경을 감싼다. 저 밝은 아이들 사이에는 주인도 끼어 있을까. 더없이 평범해서 평화로운 오후의 빛은 앞선 교실 장면에 새겨진 생채기에 흔들리지 않는다. 이 평온함은 무심해서 강하다.

교실의 소란을 근경에서 관찰하던 카메라의 눈이 탁 트인 자연 속 아이들의 움직임을 원경에서 응시하는 시선으로 단번에, 이행한다. 이처럼 대범한 전환으로 영화가 의도한 단절은 도전적인 연결의 가능성을 희구한다. 이는 주인의 소망과 태도에 응답하는 영화의 마음이기도 할 것이다. “내 인생이 망가진 것 같냐?”고 교실에서 거세게 항변하던 주인공은 티 없는 웃음을 터뜨리며 가을날을 즐기는 익명의 여학생 무리 중 하나가 될 수 있다. 두 장면을 잇는 힘은 기적 같은 허상이 아니라, 우리의 통념보다도 훨씬 질긴 삶의 운동성과 일상성이라고 <세계의 주인>은 과장 없는, 어쩌면 가차 없는 편집으로 보여준다. 한낮 테니스 코트 장면의 활기는 그 위를 흐르던 바흐의 음악 안에서 한밤 노래방으로 이어지고 춤추며 노래하는 아이들의 광경에 이른다. 카메라는 그들 안으로 비집고 들어가지 않은 채, 노래방 창밖에서 그 광경을 물끄러미 쳐다보며 주인과 친구들이 최선을 다해 누리는 현재성을 보존한다.

<세계의 주인>은 더러 완급 조절이 되지 않는 주인의 낙천성으로 추동되면서도 인물의 도저한 생기에 접속한 영화의 힘줄이 ‘툭’ 하고 맥없이 꺾이는 순간의 필연성도 외면하지 않는다. 주인의 세계에는 주인만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요컨대, 노래방 장면을 이루는 외화면 음악과 아이들의 활동성은 팽팽한 고무줄이 불시에 끊기듯 주인의 엄마 태선(장혜진)이 차 안에서 홀로 술 마시는 모습으로 넘어간다. 핸드폰 영상통화에 비친 친구들은 태선을 향해 왜 이렇게 늙었냐며 놀란다. 어느새 처량한 알코올중독자가 되어버린 엄마는 딸이 그날 학교에서 무슨 일을 겪었는지 짐작도 하지 못할 것이다. 이 장면에는 딸의 장면에 닿을 힘 없이 비좁은 공간에 숨어 겨우 버티는 한 여성의 메마른 형상이 자리한다. 주인의 장면을 긍정한다면, 이곳에 붙박인 엄마의 장면도 인정해야 한다. 영화는 여기 섣불리 우울과 고독의 서정을 불어넣지 않으며 주인의 장면과 연결하려는 시도를 무릅쓰지 않는다. 주인도, 엄마도 어찌할 수 없는 각자의 몫이 있는 것이다.

이러한 영화의 태도는 후반부에서도 느낄 수 있다. 병원 입원실에서 엄마와 딸이 침묵 속에 손을 잡는 장면은 어김없이 영화에 스며든 바흐의 선율과 함께 할머니(변중희)와 동생(이재희)이 전통시장에서 장을 보고 절로 향하는 장면으로 이어진다. 열심히 언덕을 오르는 노인과 소년의 걸음을 카메라는 원거리에서 담는다. 이 영화에서 예외적으로 안온한 숏의 연쇄는 가족이 공유하는 상처를 멀리서 바라볼 때만 성립되는 것이지만, 이 또한 이들이 일군 풍경이라고 말하지 않을 이유는 없다. 영화는 그 풍경의 감흥을 부정하지 않는다. 그러나 이 대목을 흐르던 음악 <양들은 한 가로이 풀을 뜯고>는 또다시 불시에 멈추고 ‘언니들’의 봉사활동 장면이 끼어든다. 구성원들은 쓰레기가 즐비한 비좁은 공간에서 화기애애하게 청소하며 수다를 떠는 중이지만, 대화의 내용은 이들이 겪은 성폭력 피해와 끝나지 않은 재판에 대한 것이다. 앞선 장면에서 주인의 가족에게 잠시나마 허락된 풍경의 ‘한가로운’ 리듬은 그 바깥의 현실로 쉽게 전이되지도, 현실의 따가운 상흔을 봉합하지도 못한다. 언니들은 일견 과하게 쾌활한 웃음을 터뜨리지만, 이 장면은 그 웃음으로 울고 있다. 다만, 장면의 끝에서 <세계의 주인>은 이 여성들 각각이 여태껏 괴롭고 허망하게 제자리걸음만 한 건 아니라고, 공동체에 살며시 일어난 작지 않은 변화를 기쁘게 맞이한다. 새로운 생명이 태어났다는 소식이 이 공동체에 천진하게 스며든다.

<세계의 주인>

<세계의 주인>이 시야와 시점을 운용하는 방식에는 한 가지 원칙이 신중하지만 굳건하게 작동하는 것 같다. 그건 인물의 트라우마나 그가 지켜낸 활기 모두 영화가 선취할 수 없는 영역임을 되새기는 일이다. 영화가 창조했을지라도 ‘이주인’의 주인은 영화 자신일 수 없다는 사실을 윤가은 감독은 잊지 않으려고 한다. 요컨대, 영화는 주인의 해사한 얼굴을 신뢰하면서도 그것이 그의 전부가 아님을 알고 있다. 주인이 친구들과 떠들썩하게 노는 모습에 생동감 있게 다가가던 카메라는 그가 복잡한 속내를 숨기지 못할 순간에는 정작 마음껏 움직이지 못한다. 그가 현관 앞에 쭈그려 엄마가 남긴 토사물 잔해를 치우며 동생에게 아빠의 소식을 물을 때, 그의 웅크린 등에는 차마 내뱉지 못하는 내면의 사연이 무겁게 내려앉는다. 그가 교실에서 자신에게 남겨진 쪽지를 발견하고 주위를 살피다 가만히 들여다볼 때, 우두커니 앉은 그의 등은 망망대해에 홀로 남은 섬 같다. 그가 가장 의지하던 미도(고민시)가 봉사활동에 데려간 주인의 남자 친구를 문전박대한 날, 그는 집 화장실 문을 굳게 걸어 잠그고 동생과 엄마의 성화에도 꿈쩍하지 않는다. 우리도 문밖에서 주인이 나오길 기다릴 수밖에 없다. 어떻게 해도 포착할 수 없거나 포착을 거부하는 얼굴도 있는 것이다.

많은 이들이 언급하는 세차장 장면은 주인의 감정이 유일하게 폭발하는 대목이지만, 우리는 그의 뒤통수만을 주시할 뿐이다. 윤가은은 자동차 뒷좌석 공간이 협소한 탓에 카메라와 배우들만 실은 차를 세차장으로 들여보낼 수밖에 없었다고 밝힌다(<씨네21>, 1529호). 말하자면 이 장면을 뒤흔든 파고는 얼굴의 감정에 밀착하려는 카메라 뒤 인간의 욕망이 애초 차단된 상황에서 빚어진 것이기도 하다. 주인이 엄마에게 “내 얼굴만 보고도 알았어야지!”라고 울부짖는 순간에도 영화는 그 말을 하는 주인의 얼굴을 담지 못한다. 일련의 대목들에서 주인의 가려진 얼굴은 균열이 일어나 더없이 나약해진 상태겠지만, 카메라의 시선을 밀쳐내는 저력 또한 지닌 것이다. <세계의 주인>은 그 얼굴의 다면성을 존중하며 카메라의 역량을 과신하지 않는다.

이 영화에 종종 발랄하게 삽입되는 거친 질감의 작은 화면은 그런 맥락에서 기능한다. <세계의 주인>은 자신의 커다란 카메라가 닿을 수 없는 지평을 고민하며, 카메라의 확정적인 구도로 인해 세계의 잠재성이 뻣뻣하게 규정될 한계 또한 염려한다. 앞선 노래방 장면에서 카메라는 아이들과 분리된 곳에서 그들을 구경하지만, 이제 친구 손에 들린 핸드폰 카메라는 교실 안에서 흥겹게 춤추는 이들의 몸짓과 함께 논다. 주인과 남자 친구가 데이트하는 모습을 담은 셀프 영상, 주인의 단짝 유라(강채윤)가 여느 날처럼 복도를 오가는 수많은 학생 중에서 주인을 발견하는 영상도 마찬가지다. 이들이 찍은 화면은 대상의 움직임과 상황의 즉흥성에 적극적으로 반응하며 흔들리길 주저하지 않는다. 이들의 카메라는 가볍고 솔직하고 거리낌없다. 물론, 당연히, 이 또한 윤가은이 의도하고 설계한 장면들일 따름이지만 그가 아이들의 핸드폰 카메라를 경유한 방식은 납득할 만한 것이다. 그는 10대의 자유로운 운동성을 동경하면서도 그것을 ‘어른’의 카메라로 신비화하거나 모방하려는 움직임을 조심스럽게 경계한다.

<세계의 주인>은 사회가 함부로 전제하는 ‘피해자성’에 저항하는 영화지만, 피해자가 세상의 중심이라고도 말하지 않는다. 세계를 죽음과 삶, 절망과 희망, 사건과 해결의 경계로 나눠 후자를 향한 변화를 맹목적으로 꿈꾸기에 우리의 현실은 너무도 복잡하며 그렇게 수월하게 흐를 리 없다. 영화도 ‘이주인’의 주인이 될 수 없지만, ‘이주인’도 언제나 장면의 주인이 될 수는 없다. 주인에게 날아든 비밀스러운 쪽지는 묻는다. ‘너의 의도가 뭐야, 계속 바뀌는 네 말을 어떻게 믿으라는 거야, 넌 정말 아무렇지도 않아? 그렇게 믿고 싶은 거야? 넌 진짜로 뭐야?’ 화면 가득 채워진 쪽지의 내용은 어느 날 주인에게 닥친, 주인이 통제할 수 없는 목소리다. 그는 ‘나는 성폭행 생존자지만, 내 삶은 망가지지 않았다’며 자기 삶의 자율성을 당당히 선언해왔으나 발신자 없는 쪽지 앞에서 그의 눈빛은 한없이 불안하다. 그것은 누군가의 비난 섞인 물음이기도 하지만, 이 인물의 가변성을 보호하고 입체성을 고심하며 윤가은이 수도 없이 자신에게 던진 질문이기도 할 것이다. 무엇보다도 그것은 주인이 오랜 시간 묻어둔 채, 제대로 보살피지 못해 가엽게 되살아나는 자문일 것이다. 나는 정말 아무렇지도 않은가. 나는 정말 괜찮은가. 나는 왜 자꾸 괜찮다고 다짐하는가. 영화 후반, 주인에게 도달한 마지막 편지가 ‘너를 영원히 기억’하겠다고 화답할지라도, 앞선 쪽지의 문구는 답을 요구하지 않는 날카로운 물음으로 주인 앞에 불쑥불쑥, 언제든 출몰할 것이다.

<세계의 주인>

영화도 이를 환상으로 덮지 않는다. 주인이 엄마를 찾아 유치원을 방문했다가 책상 밑에 숨은 누리(박지윤)를 내려다보는 장면에서 둘 사이에 어떤 일이 일어나는지 영화는 보여주지 않는다. 이후 태선이 돌려보는 CCTV 화면에서 주인이 누리의 팔을 꼬집는 모습이 나온다. 때마침 태선 곁에 있던 누리가 그 상황을 재연하듯, 태선의 팔을 꼬집으며 말한다. “이래도 안 아파요? 아프면 아프다고 하랬는데.” 주인의 행동이 기록된 저화질 화면에서는 그의 말이 들리지 않는다. 누리가 아니었다면, 주인의 아픔은 여전히 세상 밖으로 나올 문을 찾지 못했을지도 모른다. 이 대목을 기점으로 주인의 음성은 간접적으로나마 세상에 닿고, 태선의 고통도 결국 발화한다. 이윽고 이어지는 병원 장면에서는 모녀의 마음이 어느 때보다 고요히 충만하게 담긴다. 그들이 맞잡은 손의 평안한 형상은 그러나, 누리의 목에 난 멍 자국의 그림자를 잊고 있다.

영화 도입부, 수호는 욕실에서 동생 누리를 챙기다 목에 난 멍을 발견한다. 아이는 별말이 없는데, 수호의 얼굴에 근심이 서리던 찰나, 남매의 아빠가 도우미와 통화하는 소리가 들린다. 엄마 없는 어느 가정의 어수선한 아침 풍경으로 범상하게 지나갈 수도 있겠지만, 이 대목의 구도에는 다소 눈여겨볼 구석이 있다. 아빠와 수호가 욕실 밖을 오가며 누리를 맡아줄 이에게 도움을 요청하는 동안, 이 가족의 막내는 목에 멍인 든 채, 변기에 덩그러니 그대로 앉아 있다. 아빠의 얼굴은 프레임에 잘려 나오지도 않는다. 그의 분주함은 말하자면 이 장면의 핵심인 누리의 상처를 놓치고 있다. 화면 전경의 요란한 움직임은 후경의 문제를 직시하지 못한다. 카메라는 누리가 위치한 후경의 욕실, 문제가 도사린 장소를 화면에 각인해 지워지지 않는 얼룩처럼 쳐다본다. 그 얼룩을 어른들은 인지하지 못하거나 회피한다. 유치원 원장인 태선의 모호한 눈길은 종종 누리에게로 향할 뿐이고, 누리의 아빠는 딸의 상처가 벌레에 물려 생겼을 거라고 대수롭지 않게 단정한다.

유사한 구도의 장면이 영화 후반부에도 나온다. 주인은 동생 해인에게 마술 도구를 가져다주러 방에 들어갔다가 매트리스 밑에서 편지들을 발견한다. 성폭행 가해자 삼촌이 교도소에서 보낸 편지들 사이에 해인이 그에게 보내려던 답장이 있다. “우리 누나한테 편지 보내지 마세요.” 우리는 이 아이가 엄마와 누나가 없는 집에서, 그들 몰래 편지를 읽고 답장을 쓰려 안간힘 쓰던 장면을 본 적 있다. 동생 혼자 삼키던 지난 시간의 무게와 슬픔이 주인 앞에 우르르 쏟아진다. 주인은 울지 않는다. 때마침 방 밖에서 들리는 엄마의 부름에 주인은 아무 일 없다는 듯 응하고 이제 화면 전경에는 거실 한자리에 선 카메라 앞에서 부산하게 오가는 세 식구의 동선이 흐릿하게 맺힌다. 이때, 프레임에는 이들의 얼굴 대신 화면 후경에 위치한 텅 빈 사각의 틀이 마치 세계의 구멍처럼 우리를 주시한다. 카메라는 움직이지 않는다. 동생이 편지를 숨기고 누나가 결국 그 비밀을 마주하던 곳, 끔찍하고 애통한 과거의 시간이 살아나는 곳, 헤아릴 수 없을 남매의 마음이 묻힌 곳. 엄마는 이번에도 문이 열린 이 방의 사연을 알지 못한다. 해인의 마술로도, 주인의 꿋꿋함으로도 쉽게 돌파할 수 없을 깊은 동굴이 남매에게 남겨진다.

그럼에도 시간은 아랑곳하지 않고 흐를 것이다. 주인이 태권도를 수련하기 위해 자주 방문하던 체육관에서 남자아이들이 모여 놀고 있다. 이들은 관장이 사다준 간식거리에 한껏 흥이 오른다. 그간 이곳을 제집보다 편히 드나들던 주인과 미도가 보이지 않아도 체육관의 풍경은 기운차고 생기롭기만 하다. 영화는 체육관에 웃음을 퍼뜨리는 이름 없는 아이들의 활력을 소중히 공들여 찍는다. 체육관 한쪽에서는 인부가 벽면에 새로 페인트를 바르는 중인데, 관장은 벽 한구석의 그을음은 그대로 두라고 부탁한다. 그것은 오래전 가출한 미도가 체육관에서 숙식하다 불을 내 생긴 흔적이다. 고통의 장소는 즐거움의 장소로 변모할 수도 있다. 누군가가 떠난 자리에서 누군가는 기억한다. 완전히 잊히는 시간은 없다. 적어도 여기서만큼은 그 사실을 의심하지 말고 기꺼이 낙관해도 된다고, 영화는 이 장면에 없는 주인과 미도에게 전해주려는 것 같다.

<세계의 주인>

<세계의 주인>은 주인만이 세계의 주인공은 아니라는 사실을 거듭 환기하지만, 한 장면에서만큼은 그가 명백한 ‘주인’이다. 어떻게든 찍어야 하는 단 하나의 얼굴이 있다면, 바로 이곳이 그 얼굴이 화면의 중심축으로 살아나는 장소다. 주인과 수호가 다툰 뒤 교무실에 불려간 대목에서 주인은 서명을 거부하는 이유를 설명하며 자신이 성폭력 피해자라고 밝힌다. 둘의 싸움을 아이들의 무의미한 자존심 대결 정도로 여기던 어른들이 시선을 어디 둘지 몰라 하나같이 땅만 쳐다볼 때, 주인은 맞은편에 앉은 수호를 정면으로 바라본다. “내 인생 아직 망가지지 않았어. 함부로 말하지 말아줘.” 당당하게 고개를 든 주인의 얼굴이 예의 바르게 수호의 반응숏을 요청한다. 수호는 어른들과 달리 주인을 마주 본다. 당황한 표정이지만, 그는 주인의 말을 제대로 듣고 주인의 얼굴을 똑바로 보고 있다. 비겁하고 소심한 어른들 대신 적막한 교무실 장면을 바로 세우는 건 잠시나마 연결된 주인과 수호의 숏이다. 다시 주인에게 돌아온 장면에서 그가 서명란에 적어가는 이름이 화면을 채운다. 이주인. 이 순간, 그의 이름을 깊은 존경을 담아 한 글자 한 글자 또렷한 발음으로 불러주고 싶다.

영화의 결말, 주인에게 도착한 마지막 쪽지의 발신인은 여전히 알려지지 않지만, 여러 명의 목소리가 되어 빛나는 행성들처럼 주인을 감싼다. 카메라가 비춘 그의 등은 더이상 외롭지 않다. 그러나 편지 속 목소리의 위로가 영화의 끝은 아니다. 마치 주인의 에너지를 새삼 깨우듯, 교실 안에서 거칠게 놀던 남자아이 하나가 주인의 등으로 밀려 넘어지더니 장난스레 사과하며 도망치는데, 주인이 그를 쫓아 미련 없이 화면을 빠져나간다. 카메라는 어쩐 일인지 주인을 따라가지 않는다. 쪽지의 일방적인 수신인이었던 자리, 친구들의 과도한 배려를 어색한 미소로 삼키던 자리, 용납할 수 없는 서명지가 고개를 내밀던 자리, 주인은 그 자리를 박차고 나간 것일까. <세계의 주인>은 떠들썩한 아이들 사이에 오롯이 존재하는 주인의 빈 책걸상을 바라본다. 그는 지금 프레임 바깥, 카메라가 닿을 수 없는 곳에서 언제나처럼 남자친구들과 몸을 부딪치며 신나게 놀 것이다. 영화의 첫 장면에서 연인의 고개를 돌려 세우며 키스할 때처럼 성적으로도 주눅 들지 않을 것이다. 그는 육체적 유희를 포기하지 않을 것이다. 주인 없는 교실의 풍경이 주인이 체념하지 않을 세계의 역동적 지평을 상상하며 온 힘을 다해 끌어안는다. 이 결말의 포용력이 강력하고 아름답다. <세계의 주인>과 ‘이주인’은 뼈아픈 시간의 무게를 나눠 짊어지고서 늠름한 발걸음으로 함께, 이곳에 이르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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