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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평] 유동하는 날숨의 감각, 김연우 평론가의 <베이비걸>
김연우 2025-11-26

여기 로미(니콜 키드먼)와 그의 섹슈얼리티가 있다. 그는 명문대를 나온 백인 여성 CEO이며, 남편과의 성관계 후엔 몰래 포르노를 보며 자위한다. <베이비걸>은 로미의 전사를 서술하되 정신분석에 사용하지는 않는다. 컬트 공동체에서 보낸 성장기의 잔상은 로미가 자신의 욕망을 비정상이라 여겨 그 실마리를 과거에서 찾으려 했기에 삽입된 것으로 보인다. 이 전사와 회사 내 지위가 로미의 욕망과 연관이 있는지는 알 수 없다. 그가 “대디”가 나오는 포르노를 보는 원인이 모종의 과거사에 있으리란 법은 없고, 회사에서 지시하는 위치에 있기 ‘때문에’ 상대가 침대에서 복종하길 원하는 건 아니다. 섹슈얼리티는 특정한 인과로 설명되지 않고 누군가의 ‘유일한 진짜’도 아니다. 더불어 짚으면, ‘남성적 시선에 의해 여성의 마조히즘이 왜곡된 형태로 재현되곤 했다’는 식의 비판적 분석과 ‘여성의 마조히즘은 남성 판타지’라는 단정은 다르다. 납작한 일반화가 통용되는 시대는 지났다. 영화는 이를 인지하며, 딱히 여성과 남성간에 행해지는 BDSM 플레이 자체에 관해 논하려 하지 않는다. 후반부 사무엘(해리스 디킨슨)과 제이콥(안토니오 반데라스)의 대화로 언급하는 정도인데, 이마저 제이콥의 반응을 보여주기 위한 장면에 가까워 보인다.

이쯤에서 개를 떠올린다. 로미에게 달려들다 사무엘의 휘파람에 금세 돌아섰던 검은 개 말이다. 이후 개는 행인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길바닥에 누운 로미를 가두고 선 모습으로 나타났다가, 엔딩에서 자신을 쓰다듬는 사무엘 주위를 활보하는 모습으로 다시금 나타난다. 전자는 로미가 심리상담을 받는 장면과, 후자는 제이콥과 성관계하는 장면과 교차편집되는 환상이다. 개가 명확히 로미의 섹슈얼리티를 상징한다는 해석보다는 환상 속 역학에 섹슈얼리티와 관련된 로미의 감각이 반영되었다는 해석이 더 끌린다. 수미상관을 이루며 대조되는 베드신과 베드신 사이 이 감각은 서서히 변하고, 영화의 초점은 그 변화를 관찰하는 데에 맞추어져 있다. 로미를 흥분하게 하는 구체적인 행위에서 기시감이 든다면 의도된 바일 수 있다. ‘무엇을’보다는 ‘어떻게’를, 그리고 로미가 어떻게 느끼는가를 들여다보자.

해방, 일탈, 이완

로미의 회사는 전체 자동화 공정 과도기에 있다. 관련 연설을 연습하던 중에 로미는 ‘취약성은 긍정적인 가치’라는 피드백을 듣는다. 여기서 이야기되는 가치라 함은 기업가가 파악해야 할 트렌드에 가깝지만, 새로운 정보를 들었다는 듯한 로미의 반응은 눈여겨볼 필요가 있다. 욕망을 감추는 데에 익숙해진, 그리고 익숙하지 않은 변화를 겪는 시기. 영원히 고정된 건 없다는 느낌이 들어설 무렵 로미는 사무엘을 발견한다. CEO-인턴의 위계에 있는 문제적 잠재력은 그다지 활용되지 않는다. 두 사람의 만남은 위계를 이용해 착취하는 성격을 띠지 않고, 사무엘은 예측되거나 통제되지 않으면서도 끊임없이 핑계를 제공하며 로미가 바라는 대로 움직인다. 매번 로미를 찾아내고 주시하는 그는 사실 로미 부부의 극적인 커플 상담을 위해 출현한 초월자가 아닌가라는, 근거 없는 가설을 잠시 세워보기도 했다. 정체가 뭐든 사무엘이라는 캐릭터- 여성의 판타지를 채워주는 남성이자 중년의 멘토 자리에 놓인 청년- 의 반전된 특징과 노골적 편리함은 비현실적인 그대로 꽤 재미있다. 물론 사무엘의 과감함은 상대를 책처럼 읽어 ‘예스를 품은 노’(‘노 민스 예스/메이비’라는 뜻으로 일반화하지 않기를)를 감지하는 천재라는, 허구의 설정이 있기에 가능한 허용이다. 민감한 레이더로 로미를 끌어낸 다음 그는 ‘혹시’, ‘~할 수 있겠어요?’, ‘모르겠어요’ 따위 표현을 곁들여 행위를 조율하고, 영화는 시간을 할애해 어색함과 수치심, 반사적으로 터지는 웃음, 흥분의 몸부림을 제지하는 손길을 관찰한다. 군더더기가 아닌 과정의 일부이며, 속도를 로미에게 맞추는 제스처이기도 하다. 사무엘이 뒤늦게나마 상호 동의의 발화를 제안하며 ‘이 일은 정상적이며 괜찮다’고 반복해 말하는 까닭도 이 맥락에 놓인다.

오프닝에서 포르노를 보며 자위하던 로미는 숨을 죽이고 입을 틀어막았다. 사무엘과의 밀회는 로미의 숨을 가쁘게 하고 또 틔워준다. <나인 하프 위크>(1986)에서 존이 말하는 ‘굿 걸’은 엘리자베스를 옭아매는 언어였으나, 사무엘이 속삭이는 ‘굿 걸’은 역으로 로미에게 늘 ‘굿 앤드 스트롱 걸’을 수행하지 않아도 된다는 해방감을 주는 언어다. 이 만남으로 인해 로미의 삶 한편에는 욕망을 실험할 틈새 공간이 생긴다. 방음이 훌륭하고 아무도 들어오지 않는 미팅룸 같은, 일상과 분리된 안전한 공간이. 그 물리적 장소는 호텔, 사무실, 화장실, 골목 어디건 집만 아니라면 별 상관이 없다. 이곳에서 로미는 자신이 원해온 플레이가 합의하에 금기를 갖고 노는 일이지 금지된 일탈이 아니라는 감각을 체화하게 된다.

성적 긴장이 자세히 묘사되는 장면들에는 자주 음악이 부재한다. 머무르거나 마주치는 시선의 흐름과 사람의 육체가 내는 소리를 따라가다 도달하는 장소가 늘 스릴의 정점인 것은 아니다. 바닥에 엎드려 사무엘의 애무를 받을 때 로미가 표하는 요의는, 관련 데이터가 쌓이지 않은 몸이 맞이하는 첫 오르가슴과 닮은, 생소한 쾌감의 표현이리라. 탐구되지 않은 영역을 발견하는 순간, 로미는 입을 막으려다 신음을 내지른다. 신음은 울음으로 번지고, 사무엘은 로미를 감싼다. 숨을 삼키는 감각에 뒤따르는, 온몸의 긴장이 풀리는 날숨의 안도감. 로미가 내면화한 옳고 그름의 고정된 형상이 ‘그른 것’을 실행하여 참아온 숨을 방출함과 동시에, 몸 안팎을 유동하는 가능성으로 바뀌는 찰나의 이완-감. 영화의 무게중심은 어쩌면 이 지점에 기울어 있는지도 모른다.

균형의 재설정

안전한 공간의 기억은 로미의 피부에 남아 영향을 미치리라고, 영화는 엔딩에서 말한다. 호텔에서 몸의 통제권을 내맡기고 경험한 안도와 이완이 집에서의 시도를 가능하게 한다. 안개가 걷히며 시야를 확보한 로미에게 섹슈얼리티는 이제 자신을 꼼짝 못하게 가두는 나쁜 비밀이 아니다. <베이비걸>은 유혹에 빠져 삶의 안정성을 잃었다 복귀하는 이야기가 아니며, 가면을 벗고 진정한 자아를 찾는 이야기도 아니다. 억눌러온 섹슈얼리티와 관계 맺으며 그 유동성을 체험하는 과정, 스스로의 여러 모습 사이의 균형을 재설정하는 과정에 가깝다. 아쉬운 소리 덧붙이면, 후반부가 지나치게 안전하다(위험을 무릅쓰지 않는다)는 인상은 있다. 이를테면 교집합이 있는 작품 <필리언>(2025)이 섬세하게 포착하는, 감정의 복잡함과 이해의 필연적 불완전함을 <베이비걸>은 얼버무리며 완벽한 해결을 추구한다. 이왕 비현실적이라는 비판을 받을 거… 넌지시 드리우기만 했던 폴리거미의 아이디어를 더 밀고 나갔더라면 어땠을까라는 상상도 해보았다. 하지만 욕망을 드러내도 안전하다(잘못이 아니며, ‘모든 걸 내걸지’ 않아도 된다)는 감각이, 지속 가능한 일상으로 번지는 현상을 보여주기로 한 선택은 긍정하고 싶다. 무엇보다 흔들리고 몰아쉬며 주저하다 방출하는, 로미의 생생한 호흡이 무척 아름다웠기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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