질베르토 페레스는 폭력 이미지로서 미국영화를 다룬 글에서 리처드 슬롯킨의 견해를 소개한다. 그에 따르면 서부극이 지배계급에 속한 선한 영웅을 그린다면, 갱스터영화는 악을 행하는 하층계급 영웅의 이야기다. 이러한 요약은 인간의 폭력에 관한 유구한 장르인 서부극과 갱스터영화의 관계를 직관적으로 파악하게 한다. 이러한 분석을 토대로 돌아보면, 오늘날은 서부극과 갱스터영화 양쪽 모두가 성립되기 어려운 조건 속에 놓인 것처럼 보인다. 계급과 선악의 연결 관계가 역전되어 대개 계급적으로 우위에 놓인 이가 악당의 위치를 차지하고, 하층민은 선한 희생자의 자리에 머무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계급과 선악 사이 자리바꿈과 고착화는 영웅의 탄생을 위태롭게 만든다. 코믹스에 기반을 두고 무수하게 재생산되며 체급을 키우는 히어로영화는 영웅이 환상에서만 존재할 수 있다고 반복하며 영웅의 부재를 각인시킨다. 요르고스 란티모스 감독의 <부고니아>는 외계인에 맞서 지구를 지키려는 인간의 분투를 그린 영화다. 이보다 더한 영웅 서사가 있을까. 물론 그 허황됨은 관객에게 영웅을 얼마든지 비웃을 수 있는 자유를 제공한다. 지구를 구하는 수단이 납치와 고문이라는 점도 미심쩍다. 더구나 테디(제시 플레먼스)와 돈(에이든 델비스)은 영웅과 가장 거리가 먼 이미지와 성격을 지녔다. 이들은 표면적으로는 음모론에 사로잡힌, 사회성이 결여된 인물처럼 보인다. 인체의 표본이 전시된 방은 섬뜩한 연쇄 살인마의 내면을 들여다보는 느낌을 준다. 하지만 판타지 장르를 벗은 하층계급의 영웅이란 바로 이런 모습인지도 모른다.
란티모스가 금욕의 영화라니
<부고니아>가 리메이크 원작 <지구를 지켜라!>에서 새롭게 추가한 설정 중 하나는 납치하는 당사자가 화학적 거세에 의한 중성화를 스스로 선택한 대목이다. 이는 납치 대상의 성별이 남성에서 여성으로 바뀌면서 파생된 설정이지만, 계급적으로 열악한 이들의 상황을 한층 더 위태롭게 만드는 결과를 낳는다. 테디와 돈은 납치를 준비하는 과정에서 여성의 얼굴을 본뜬 가면을 사용한다. 누군가에게 정체가 발각될 위험을 방지하기 위해서 사용한 가면은, 한편으로는 이들이 화학적 거세에 의해 중성화되었음을 상기시킨다. 미셸(에마 스톤)의 삭발은 화학적 거세에 대응하는 행위다. 물론 삭발은 전작에서 따온 설정으로, 머리카락은 외계인이 지구 바깥과 교신하는 매개로 이해되었다. 그러나 캐릭터의 성별 전환은 의도보다 많은 것을 바꾸기 마련이다. 미셸의 잘린 머리카락은 테디와 돈의 화학적 거세에 대응하는 중성화 행위의 일종이다. 미셸의 머리카락과 여성의 얼굴 모양 가면은 함께 불 속에서 타들어가며 성별 교환식을 조촐하게 기념한다. 하지만 화학적 거세가 완전한 중성화를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이들은 도리어 손실된 남성성의 보충물이 필요한 처지에 놓인다. 오진우 평론가는 제거된 남성성과 통제할 수 없는 세상을 연결하며, 이에 대한 보상으로 채택된 것이 음모론이라고 짚었다. 하지만 테디의 믿음은 화학적 거세 이전에도 존재한 것이기에, 여기에서는 화학적 거세와 이후의 상황에 조금 더 집중해보고 싶다. 남성성의 위협과 복구의 필요성에 따라 등장한 사물은 장총이다. 총은 테디가 미셸에게 모욕받았다고 느끼며 감정을 분출한 다음날 돈의 손에 들린 채 등장한다. 이후 총은 테디와 미셸이 몸싸움을 벌이는 장면에서 전면화된다. 미셸이 자신의 목을 조르던 테디에게 반격하며 그의 몸에 올라탄 상태로 공격을 가한다. 돈은 잠시 망설이다가 총을 쏘는 대신 미셸의 머리를 총으로 내리쳐 기절시킨다. 포개진 테디와 미셸의 몸은 대결을 표시하지만, 불발된 성교를 연상시킨다. 과한 해석일 수 있으나 이 영화는 성기로서의 인간을 강조해온 요르고스 란티모스의 영화가 아닌가. 불발된 총은 발사될 수 없는 총으로서의 거세된 성기를 흉내낸다. 자승자박이 된 거세처럼 총은 외계인을 제거하는 대신 총의 주인이 자신을 공격하는 데 쓰인다.
월식하는 존재들
돈에 의해 발사된 총은 편집에 있어 하나의 출발 신호탄처럼 기능한다. 이를 기점으로 마구 내달리는 호흡이 전개된다. 지구와 달이 겹치는 월식을 인물의 관계를 통해 수행하듯, 대조적인 것처럼 보이던 테디와 미셸의 연결성이 이를 계기로 드러난다. 김예솔비 평론가는 미셸과 테디가 신체를 단련하는 교차편집 장면을 들어 서로 다른 물리적 조건 속에서의 몸짓이 결국 신자유주의적 자기계발담론에 포섭된다고 지적했다. 미셸과 테디가 계급화된 인간의 삶을 축소하고 대표하는 위치에 있으므로 이들을 동시대 사회문화의 반영체로 보는 것은 일견 타당할 수 있다. 그러나 이들이 신체를 단련하는 데는 특수한 목적이 있고, 이 목적마저 자기계발담론에 포섭된다고 단정하기는 힘들다. 그렇기에 대조된 것처럼 보이는 존재들의 운명적인 연결이라는 표면에 조금 더 머물러보고 싶다.
테디와 미셸은 모두 고립된 존재다. 아내와 자식이 있던 강만식(백윤식)과 달리 미셸에게는 가족이 없다. 테디에게는 사촌 돈이 있지만, 두 사람은 함께 고립된 처지다. 미셸은 고급 저택에 거주하지만, 집을 지키거나 관리하는 경비원이나 가사도우미, 하다못해 반려견의 모습도 보이지 않는다. 이는 테디와 돈의 어설픈 납치 시도가 성공할 수 있었던 이유이기도 하다. 보안관 케이시(스타브로스 할키아스)의 방문을 기점으로 테디와 미셸이 분리되었을 때, 영화는 편집을 통해 두 상황을 이어 붙인다. 교차편집은 서스펜스를 만들기 위한 장치로 쓰이는 경우가 대부분이지만, 여기에서 나아가 동시성과 유사성을 불러오는 기능을 한다. 돈이 미셸의 눈앞에서 자신의 얼굴을 날려버리면서 미셸이 얼굴에 피를 뒤집어쓰는 순간, 테디 역시 케이시를 살해하면서 얼굴과 온몸에 피를 뒤집어쓴 몰골이 된다. 원인은 다르지만, 나란히 피를 뒤집어쓴 두 얼굴은 서로 다른 공간에서 비슷한 상태를 향해가는 기이한 연결성을 보여준다. 이러한 맥락에서 초반의 단련 장면 역시 각자가 처한 상황에 따라 그 방식은 다르지만, 결국 이들이 서로 유사한 행동을 하고 있었음을 보여준다.
테디가 미셸과 함께 오소리스 본사에 도착해 걸어들어가는 장면은 둘간의 기이한 동시성을 잘 보여준다. 미셸은 돈의 죽음에 대한 분풀이로 테디가 휘두른 총에 맞아 다리가 부러진 상태이고, 테디는 미셸을 협박하기 위해 휴대한 장총을 숨겨야 하는 상황이다. 두 사람은 차에서 내려 건물 내부에 진입해 집무실에 이르는 동안 각자의 이유로 내내 절뚝인다. 미셸은 부러진 다리를 끌며, 테디는 바지 안에 엉거주춤 밀어넣은 장총을 의식하며 어색하게 걷는다. 둘의 유사한 걸음걸이는 대조적인 것처럼 보이는 이들의 연결성을 표시한다.
집무실에 테디를 들인 미셸은 테디의 음모론에 맞먹는 허황함으로 관객을 시험에 들게 한다. 미셸은 자신의 방 한쪽에 놓인 옷장이 외계로 이동하는 텔레포트 장치이며, 이동을 위해서는 계산기에 엄청난 양의 숫자로 이뤄진 코드를 입력해야 한다고 말한다. 이는 외계인을 연기하는 인질의 허황된 거짓말처럼 들린다. 미셸과 테디는 잠시 누가 먼저 옷장에 들어갈 것인지를 놓고 약간 혼동을 벌인다. 결국 먼저 시도하기로 한 테디는 성공 직전 몸에 두른 폭탄이 터지는 바람에 옷장 속에서 몸은 파괴되고, 머리만이 옷장을 뚫고 튀어나온 상태로 처절하고 요란하게 죽음을 맞는다. 마침, 테디의 머리가 미셸의 얼굴께로 떨어지면서 미셸도 뒤로 밀려 넘어진다. 이는 지구인과 외계인 사이에서 발생한 일종의 개기월식이라 할 수 있다. 동시성의 아이러니를 보여주는 이 순간은 슬로모션을 통해 우스꽝스럽게 강조된다.
자율성의 실체
꽃 주변을 날아다니는 벌을 보여주는 자연 이미지는 영화의 처음과 끝을 장식한다. 거의 동일한 이미지처럼 보이지만, 이미지가 놓인 맥락이 그 의미를 바꾼다. 오프닝 시퀀스에서 자연은 양봉꾼으로서 테디가 하는 일을 간략하게 스케치하는 부차적인 이미지다. 테디의 대사를 통해 군집 붕괴로 인한 위기가 언급되지만, 이 현상이 충격적인 이미지로 보충되지는 않는다. 클로징 시퀀스에서 자연 이미지는 인류의 절멸과 대비되는 살아남은 생명체의 이미지로 제시된다. 같은 이미지가 한편에서는 인류에 지구의 위험에 대한 경고를 의미할 때, 다른 한편에서는 인류의 운명과는 무관한 생존을 의미한다. 테디의 대사로 보충되는 벌의 생태는 이 꽃과 저 꽃을 옮겨다니는 생물학적 단순함으로 요약된다. 지구에서 인류만이 제거되는 결말이 필요했던 이유는 생물학적 존재에 대한 지적인 존재의 패배를 그리기 위함이 아니었을까.
인간 역시 벌의 생태만큼이나 단순하게 축소되는데, 여기에서 인간은 화학적인 약품을 활용하는 존재로 특징지어진다. 기업을 이끄는 CEO인 미셸이 상류층 인간의 역할을 겸한다는 사실을 전제로 할 때, 인류의 위기를 초래한 건 화학약품을 통해 인간과 생태계에 악영향을 끼친 상류층의 책임이다. 하지만 테디가 화학적 거세를 택하는 대목은 자신이 대항하려던 대상과 은연중에 비슷해지고 마는 실책을 시연한다. 현실 세계에서 개별자의 선택은 더 큰 흐름과 질서를 반복하면서 자발성과 자율성이 실질적으로는 불가능함을 드러내곤 한다. CEO인 미셸은 직원들에게 자발적인 굴종을 강요한다. 직원들은 자유롭게 퇴근할 수 있는 상황이지만, 해야 할 일이 있으면 자발적으로 퇴근을 반납할 수 있는 센스를 발휘해야 한다. 조건에 의해 제한된 자율성은 결과적으로 자율성을 억압하면서 모든 선택을 의문에 부치도록 만든다.
영화에서 묘사되는 거의 모든 생각과 실천은 자유와 종속의 이중적 의미망에서 벗어나지 않는다. <지구를 지켜라!>에서 외계인의 시선에 의해 비판된 인류의 죄는 한 인간이 다른 인간을, 한 인종이 다른 인종을 죽이는 절멸 행위다. 이는 홀로코스트와 베트남전쟁 등 실제 역사적 사건을 인용한 이미지를 통해 보증된다. 반면 <부고니아>는 타인을 살해하는 행위보다는 자신을 죽이는 행위가 더 문제라고 인식한다. 아이러니하게도 외계인에 맞서 지구를 지키던 테디와 돈 역시 자살 혹은 자살에 준하는 방식으로 생을 마감한다. 처음으로 테디와 떨어져 불안정한 상태로 미셸을 마주한 돈은 별안간 총구를 자신의 머리로 향하게 한 뒤 발사한다. 테디의 경우 만일의 사태에 대비해 몸에 두른 폭탄이 터지면서 자신을 죽인 꼴이 된다. 하지만 이것이 진짜 이들의 선택이라고 할 수 있는지는 의문이다. 테디가 의심한 바대로 돈의 자살은 미셸이 돈을 설득하기 위해 늘어놓은 말의 작용에 의한 선택일 수 있다. 테디의 허망한 죽음 역시 미셸이 버튼을 조작하는 순간과 동시에 작동하면서, 미셸의 행위가 테디의 죽음과 무관하지 않을 수 있음을 새겨둔다.
어쩌면 자율성이란 저절로 굴러가는 머리와 같은지도 모른다. 잠깐의 침묵 뒤 엄청난 폭발이 일어나면서 몸에서 떨어져나온 테디의 잘린 머리가 옷장 밖으로 탈출해 공중에 크게 뛰어올랐다가 떨어지면서 요란하게 나뒹군다. 중력과 관성이 뒤엉킨 주인 없는 운동은 자율성의 실체를 보여준다. 자율성은 의지를 통해 성취하는 것이 아니라 모든 의지를 잃어버렸을 때에야 성취된다. 게다가 성취되는 순간, 성취감을 느낄 나는 존재하지 않는다. 즉 자율성은 행하는 자신의 것이 아니다. 몸과 분리된 테디의 머리는 생명력과 유리된 지식을 은유하며 몸을 살리지 못한 머리의 비극을 표시한다. 몸이 파괴되는 와중에도 파괴되지 않고 보존된 테디의 머리는 몸에 대한 머리의 영광 없는 승리를 표시하는 동시에 이를 풍자한다.
<지구를 지켜라!>에서 지구의 파괴는 화이트아웃으로 인간이 하나둘 사라지는 증발로 표현된다. 반면 <부고니아>에서 죽음은 보다 선명하다. 죽음은 움직임을 멈춘몸이며 이러한 부동성은 그와 대조적으로 살아남은 존재의 움직임을 동반한다. 인류가 절멸한 뒤에도 강아지와 고양이, 하늘을 나는 새와 꽃을 옮겨다니는 꿀벌 등 동식물과 곤충은 남는다. 그뿐만 아니라 흔들리는 물결, 공장의 컨베이어벨트 등의 자연물과 기계, 굴러가는 공 역시 영화에 의해 평등하게 몽타주되는 살아 있는 것의 목록이다. <지구를 지켜라!>가 마지막에 실제의 참혹한 전쟁과 참사의 이미지를 제시했던 것을 의식한 듯, 란티모스는 사적인 죽음의 이미지를 고집스럽게 제시한다. 인간의 죽음을 그린 몇 가지 이미지 중 유독 각인되는 이미지는 침대 위에서 벌거벗은 몸을 포갠 채 누운 커플과 드레스에 면사포를 쓴 채 마지막을 맞은 신부다. 이는 짓궂은 놀리기에 가까운 삽화로 볼 수도 있으나, 유독 성적인 결합이나 이를 앞둔 순간을 조명하면서 사적인 존재들에게 특별한 애도를 표하는 것으로도 보인다. 죽음의 이미지와 삶의 이미지를 뒤섞어 영화가 가닿는 곳은 결국 다시 생물학적 질서로 환원된 세계다. 인간은 존재하지 않지만, 결코 인간과 무관하지는 않은 자율성의 이미지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