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6회 TCCF 개막식, 가장 먼저 무대에 오른 리위안 대만 문화부 장관이 자신 있게 외쳤다. “우리가 한국에 비해 20년 늦었을지 몰라도 금세 따라잡고 있다.” 최근 대만 박스오피스에서 2억뉴타이완달러(NT$) 수익을 올린 스릴러물 <96분>의 성공 사례를 곱씹은 후였다. 이는 약 94억3천만원에 해당하는 금액이다. 2000년대 초반에만 해도 대만 현지 제작 영화 한편당 수익은 1억원에도 채 미치지 못했다고 한다. “그 당시를 기억한다면 대만의 영화·방송 산업이 다시 일어서기까지 20년간 얼마나 힘들게 싸워야 했는지 알 것이다.” 이어서 마이크를 잡은 수왕 TAICCA 신임 회장도 가세했다. “지금 대만 대중문화는 흥미로운 시기에 접어들었다. TCCF는 한국 가요와 영상 콘텐츠, 일본 애니메이션, 싱가포르의 비즈니스 감각과 동남아시아 전반의 성장세를 포용할 수 있는 장소로 거듭나겠다.” 그 일환으로 가에탕 브뤼엘 프랑스 국립영화영상센터(CNC) 회장, 호세 하비에르 레예스 필리핀 영화개발위원회 회장 등이 박수로 환대받았고, 이들이 함께 슬레이트 구조물을 내려치는 것으로 나흘간의 행사가 공식적으로 출항했다.
공동제작은 선택 아닌 필수
이번 TCCF는 아시아를 넘어 유럽 게스트들까지 불러들이며 몸집을 키웠다. 국립영화영상센터를 필두로 한 프랑스가 파빌리온을 세웠고, 한국콘텐츠진흥원(KOCCA)도 국가 대표단을 꾸려왔다. KBS미디어, 스튜디오S, KT스튜디오지니 등은 물론 대원씨아이, 서울미디어코믹스 등 만화를 기반으로 한 콘텐츠 회사들이 여럿 참여했다. 전체적으로는 118개 업체가 마켓 부스를 채웠고, 44개국 700여개 프로젝트가 피칭작 모집에 지원해 역대급 경쟁을 기록했다. 이에 TAICCA 홍보팀은 “대만이 아시아 콘텐츠 시장에서 점점 더 큰 영향력과 인정을 받고 있음을 보여준다”고 자평했다.
아니나 다를까, TCCF 개막 첫날부터 국적을 뛰어넘는 뉴스들이 쏟아졌다. CJ ENM 홍콩이 대만 통신사 원통텔레콤, 방송사 TVBS, 그리고 TAICCA와 힘을 합쳐 3천만달러 규모의 펀드를 결성한 것이다. 이 펀드는 향후 5년간 운영되며 중화권 콘텐츠의 IP 교류와 제작을 뒷받침할 계획이라고 한다. 숀 조 CJ ENM 글로벌사업부 부사장은 “이 펀드가 단순한 물질적 지원이 아닌 인재 육성과 국제 공동제작을 장려해 지속 가능한 파트너십을 구축하겠다”고 밝혔다. TAICCA는 일본 제작사 K2픽처스와도 MOU를 체결했다. K2픽처스는 2023년에 설립된 신생 제작사지만 도에이에서만 25년 재직한 베테랑 프로듀서 기이 무네유키가 대표로 있는 곳이라 주목받고 있다. 그는 “재능 있는 대만 전문가들과 새로운 협력 모델을 탐색하며 대만과 일본 영화·방송 산업간 유대를 강화하겠다”고 다짐했다.
CJ ENM 홍콩, 원통텔레콤, TVBS, TAICCA 펀드 조성 기자회견 현장.
아시아 국가간 공동제작이 이번 TCCF의 키워드로 떠오른 가운데 IP 관련 포럼 패널로 참석한 심세윤 미스터로맨스 대표, 소영선 A+E 글로벌 미디어 코리아 대표도 해외로 뻗어가는 콘텐츠의 필요조건을 논했다. 웹툰 <무빙>을 디즈니+ 시리즈로 제작한 심세윤 대표는 작품의 상업성을 예측하기보다 “다음 이야기가 궁금한 스토리”인지를 먼저 가늠해보라고 권했다. 그는 리스크를 분산하는 해결책도 두 가지로 제시했다. “현재 태국, 싱가포르, 대만, 일본, 프랑스, 캐나다, 미국 등 여러 국가와 공동제작을 협의 중이다. 한국 안에서만 답을 찾으려 할 때보다 해외 제작사와 아이디어를 공유하면서 프로젝트 방향이 훨씬 명확해졌다. 시장이 어려울수록 이렇게 난관을 타개할 수 있다. 또한 블록체인으로 제작비를 공모하는 회사들이 생겨나고 있다. 우리도 미국 회사와 MOU를 체결해 시청자가 직접 투자자가 되는 모델을 실험하고 있다. 이 방식을 통해 제작사는 플랫폼의 눈치를 보지 않고 팬덤과 직접 소통하며 콘텐츠를 만들 수 있다. 하루아침에 제작비 전액을 마련할 수도 있다. 이상론이 아니라 제작사의 미래를 열 수 있는 실제 전략이라고 생각한다.”
대만 거쳐 세계 바라보는 한국 창작자들
개별 작품을 다룬 한국 창작자들 이야기도 빼놓을 수 없다. 2024년 TCCF는 나영석 PD의 등장으로 들썩였다면, 2025년에는 <흑백요리사: 요리 계급 전쟁>김은지 PD가 바통을 쥐었다. 한국 예능 최초로 넷플릭스에서 비영어 TV쇼 부문 3주 연속 1위를 차지한 이 서바이벌프로그램은 대만에서도 엄청난 인기를 구가했다고 한다. 김은지 PD가 단독으로 나서는 포럼 예매권이 풀리자 100여석이 순식간에 동이 났을 정도다. 그는 자신이 속한 스튜디오 슬램의 전작 <싱어게인: 무명가수전>에서 화제가 된 유명인과 무명인의 대결을 참고하되, <마스터 셰프>와 같이 익숙한 요리 서바이벌보다 신선한 룰을 도입해보기로 한 것이 시작이었다며 한국 사회의 ‘수저론’을 언급했다. “수저 색으로 계급을 말하는 밈이 요리라는 주제와 맞아 흑수저, 백수저로 셰프들을 나눴다. 이 컨셉이 우리 프로그램의 승부수가 되리라고 생각했다.” 뒤이어 김은지 PD는 한국 사람만 익숙한 맥락이 있음에도 해외 시청자들이 이 쇼를 즐길 수 있었던 이유를 나름대로 분석했다. “글로벌하지 않은 소재가 글로벌한 성과로 이어진 게 아닐까? 한식이 지닌 매력을 활용하되 마스터와 은둔 고수의 경합이라는 보편적인 스토리라인을 따른 것이 주효했던 것 같다.” 김은지 PD는 시즌1 출연을 고사한 셰프들이 시즌2에 대거 지원했다고 귀띔하며 12월 공개될 새 시즌을 기대해달라고 당부했다.
영화 소식도 있다. 김태양 감독은 <미망>이 대만에서 개봉한 후 홍보차 대만을 방문했을 때 현지 배급사 관계자들로부터 TCCF 피칭 콘퍼런스를 추천받았다고 한다. 덕분에 처음으로 해외 피칭에 나선 그가 ‘영화사은하수’의 이름으로 소개한 신작 장편의 제목은 <서울 이야기>. “어린 시절 할머니 밑에서 자랐다. 할머니는 내 부모님을 설득해 이혼을 막으려 했지만 실패하셨다. 만약 할머니가 실패하지 않았더라면 어떤 일이 벌어졌을지 상상하면서 줄거리를 구상했다.” 내밀한 사적 경험을 바탕으로 한 작품인 만큼 “어디서부터 출발한 이야기인지 너무 무겁지 않게, 그러나 진정성 있게 설명하는 게 중요하다”는 피드백을 들었다는 김태양 감독은 이틀 내리 고등학교 수업처럼 오전부터 저녁까지 진행되는 피칭 및 멘토링 절차로 인해 단단히 훈련한 것 같다며 웃었다. 일본, 튀르키예, 말레이시아 등 다국적 참가자들과 동료애를 쌓은 건 덤이다. TCCF 마지막 날 미국영화협회상(Motion Picture Association Grand Award)을 받은 그는 할리우드 투자자들과의 미팅 기회를 얻었다. 부상은 항공편과 숙박 지원금. 수상 소감도 그 여정을 예고했다. “이 영화에는 할머니와 손녀가 바다에 발을 담그는 장면이 있다. 바다는 더 큰 바다로 나아가 세계를 잇는다. 우리도 영화라는 하나의 바다로 연결돼 있다. <서울 이야기>는 한국영화지만 모두가 공감할 수 있는 영화로 완성해 대만을 다시 찾겠다.”
이는 올해 TCCF에 발자국을 남긴 각지의 창작자들이 품은 진심과도 통한다. 대만 시리즈 <두 유 스틸 러브 미>, 대만영화 <굿바이 마이 러브>가 피칭 시상식에서 다관왕을 차지해 대만의 로맨스 강세를 다시 한번 보여준 와중에 일본 다큐멘터리스트 구보타 도루의 <나의 카메 라, 나의 총>, 필리핀 드라마 <네버 더 브라이드>등도 트로피를 얻어 국제 공동제작의 가능성을 시사했다. 대만, 일본, 한국이 합작하는 <내일로부터 온 러브레터>도 그중 하나다. 이 작품들이 TCCF에 돌아와 들려줄 여행기가 벌써부터 기다려진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