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구나 마음속에 남몰래 숨겨둔 작은 방 하나쯤은 있다. 세상의 풍파를 잠시나마 막아줄 오롯이 나만의 보금자리. 한지수 감독의 장편 데뷔작 <맨홀>은 그 은신처에서조차 안식을 얻지 못하는 한 소년의 이야기를 그린다. 가정폭력, 청소년 범죄, 이주노동자 같은 무거운 소재를 다루지만, 영화는 결코 그 무게에 갇히지 않는다. <캠핑><기로>등 공포, 스릴러 단편으로 다수의 영화제에 이름을 올린 감독의 내공은 박지리 작가 특유의 섬세한 문체를 만나 긴장과 여백이 공존하는 독특한 리듬을 완성한다. 김준호와 민서, 그리고 어느덧 독립영화계의 보물이 된 권소현까지. 젊고 단단한 배우들이 빚어낸 얼굴들이 영화의 결을 한층 깊게 만든다. 자그마한 관계 하나도 함부로 단정 짓지 않는 섬세함이 빛나는 한지수 감독과의 대화를 전한다.
- 박지리 작가의 소설을 원작으로 하는 작품이다. 책을 읽으면서 영화화를 결심하게 된 포인트가 있을 것 같다.
무거운 소재를 다루는 작품은 종종 주제에 매몰되기 마련이다. 그런데 이 소설은 미스터리 서사의 방식을 차용하여 흡인력 있게 풀어낸 점이 인상 깊게 다가왔다. 무엇보다 관계의 아이러니가 핵심적인 작품이다. 장면마다 아이러니가 차곡차곡 쌓이며 연쇄적인 결과를 만들어내는 구조가 놀라웠다. 다만 1인칭 독백으로 전개되는 작품이었기 때문에 내면의 언어를 시각화하는 데 많은 공을 들였다.
- 작중 변호사는 맨홀이 선오(김준호)의 ‘비밀 아지트’라고 진술한다. 선오의 시점을 따라가다 보면 맨홀은 분명 단순한 아지트 이상의 의미를 지닌 공간 같다.
맨홀은 여러 겹의 정서가 중첩된 공간이다. 처음에는 남매의 도피처였고 이후엔 아지트가 되었다가 끝내 범죄를 은폐하는 장소가 된다. 하나의 공간이 이렇게 다층적인 의미를 지니게 하고 싶었다. 사실 나에게 맨홀은 그다지 긍정적인 공간이 아니다. 선오가 몸을 뉘고 잠시 쉴 수 있는 보금자리는 맞지만 언젠가는 뚜껑을 닫고 나와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결말 역시 원작과 다르게 끝맺었다.
- 선오가 기진 무리를 만나면서 피가 섞이지 않은 새로운 가족을 형성한다는 인상을 받았다.
친가족만으로 채워지지 않는 외로움을 친구들과의 관계를 통해 메우고 싶었던 게 아닐까. 대안 가족 같은 느낌을 의도하긴 했지만 선오가 기진 무리에게 완전히 마음을 열었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함께 어울리는 시간이 즐겁더라도 어딘가 모를 소외감을 느끼고 있었을 것이다. 그래서 선오를 화면 가장자리에 배치하거나 멀찍이서 바라보는 식으로, 무리에 완전히 속하지 못하는 인물로 보이게 만들었다.
- 김준호 배우 캐스팅 과정도 궁금하다. 시리즈 <소년심판>에서 보여준 불안정한 소년범 연기에 매력을 느꼈나.
비슷한 배역을 맡은 경험이 있다는 건 알고 있었지만 그것이 결정적인 이유는 아니었다. 착할 선(善)에 더러울 오(汚). 원작에 없던 ‘선오’라는 이름을 지을 때, 선한 심성을 지녔으나 결국 악행을 저지르는 인물의 양면성을 염두에 두었다. 김준호 배우는 기본적으로 선하고 호감 가는 인상이지만 눈빛에 서늘함이 깃들어 있다. 무엇보다 캐릭터에 대해 질문할 때 쫄지 않는 태도가 마음에 들었다. 영화의 처음부터 끝까지 선오가 모든 장면을 이끌어가야 하는 만큼 강단이 필요했다.
- 선오 외에도 권소현 배우가 연기한 선주도 눈길을 끄는 캐릭터다.
선오가 맨홀 속에 남아 있는 인물이라면 선주는 그곳에서 나와 넓은 세상으로 나아간 사람이다. 트라우마를 완전히 극복한 건 아니지만 연극이나 새로운 관계를 통해 다른 세계로 나아가겠다는 선택과 의지에 방점을 찍고 싶다.
- 감정적인 하이라이트라 할 수 있는 재판 장면을 촬영할 때 염두에 둔 부분이 있다면.
선오를 둘러싼 관계들의 아이러니가 응축되어 폭발하는 순간이다. 모순적인 관계 하나하나가 연쇄적으로 이어지는 감정의 흐름이 관객에게 잘 전달되길 바랐다. 동시에 지금까지 선오의 시점으로 진행되던 세계를 한 걸음 떨어져 객관적인 시선으로 바라보고 싶었다. 관객은 진실을 알고 있지만 법의 언어로 정리된 서사는 분명 사실의 영역에 속한다. 같은 사건이라도 관점에 따라 얼마나 다른 결을 드러낼 수 있는지, 그 지점을 표현하고 싶었다.
- 이 작품에서 이주노동자를 어떤 존재로 다루고 싶었나.
원작과 달리 희주(민서)의 형부를 외국인으로 설정했다. 이주노동자가 단순히 혐오와 폭력의 희생양으로만 비칠 수 있겠다는 우려에서 내린 결정이다. 그렇다고 영화가 이주노동자와의 관계를 선언하거나 규정하려는 건 아니다. 현실에는 다양한 관계가 존재하므로 하나의 시선만으로 담기는 것을 경계했다. 다만 영화 속 최종적인 피해자 또한 이름을 지닌 한 인간인데, 아무도 그를 언급하지 않는다는 점은 꼭 짚고 싶었다.
- 지금까지 찍은 단편들을 살펴보면 낯선 사람을 맞닥뜨리며 벌어지는 해프닝을 소재로 삼은 작품이 많다.
우연한 만남에서 시작되는 이야기를 좋아한다. 정확히는 ‘일상에서 오는 공포’에 관심이 많다. 평범한 삶의 테두리 안에 있으면서도 언제든 그것이 무너질 수 있다는 불안감이 있다. 이를테면 예상치 못한 만남에서 비롯된 사건이 삶에 갑자기 끼어드는 순간 같은. 이번 작품에서도 선오가 강아지를 따라가다가 우연히 기진 무리를 만나지만 인물의 감정이나 주제적인 것이 훨씬 중요한 작품이라 지금까지의 단편들과는 다른 면이 있다.
- 구체적으로 어떤 영화를 찍고 싶은지 궁금하다. 준비 중인 차기작이 있나.
현실에 완전히 맞닿아 있기보다는 상징적이거나 우화적인 거리감을 지닌 이야기에 매력을 느끼는 편이다. 그래야 감독이 개입할 여백이 생겨 연출적 역량을 발휘할 수 있다고 믿는다. 현재는 단편 <캠핑>을 장편화하는 작업을 진행 중이다. 장르적 재미에 초점을 맞췄던 단편과 달리 장편에서는 부부관계를 중심으로 블랙코미디 요소가 강한 스릴러로 그리고자 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