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년 남성 셋이 치킨집에서 ‘러브 샷’ 하는 모습을 사람들이 이렇게 좋아한다고? 어안이 벙벙했다. 부자 아저씨들 세분이 만나서 고른 메뉴가 치맥이라니 대중에게 친근하게 다가가고 싶은 의도가 읽힌다. 그런데 러브 샷? 러어브으샤앗? ‘서울 자가에 대기업 다니는 김부장’이건 금수저 재벌 2세건 미국 이민자 출신 테크기업 대표이건 러브 샷은 러브 샷이지 않나. 언제부터 러브 샷을 이렇게 정겹게 봐줬나 싶지만 아무래도 맥주잔에 써 있는 ‘GPU 26만장’이 내게만 안 보였던 모양이다. ‘치느님’이 보우하신 덕분인지 올해 경주에서 열렸던 아시아태평양경제협력체(APEC)는 성공적이었다는 평가다. 특히 ‘APEC AI 이니셔티브’는 정부가 ‘APEC 역사상 최초의 인공지능 공동 비전’으로 내세우는 주요 성과 중 하나다. 엔비디아 대표 젠슨 황은 APEC 특별세션에서 “한국은 가장 많은 인공지능 인프라 보유국이 될 것”이라고 발표했다. 공교롭게도 ‘인프라’는 APEC AI 이니셔티브에서 세 번째로 많이 쓰인 단어다. 가장 많이 등장한 단어는 단연 ‘경제’로 모두 37번 쓰였다. ‘아시아태평양경제협력체’가 채택한 성과 문서답다. 그렇다면 2위는? 바로 ‘역량’이다. 영어 원문에는 capacity, capability, empower(ment)로 다르게 표기되지만 대략 ‘역량’으로 번역해도 무리가 없는데 다 합쳐서 19번 나온다. 이 이니셔티브의 항목들 중 가장 많은 5개의 세부 항목이 달린 “모든 수준에서의 AI 역량 강화”에 대한 설명은 이렇다. “AI의 변혁적 잠재력은 모든 이해관계자가 AI 기술을 효과적으로 활용할 수 있는 지식과 기술을 갖추었을 때 비로소 완전히 실현될 수 있다. 본 목표는 사회 전반의 AI 관련 역량을 강화하여, AI 접근에 장벽이 있는 이들을 포함한 모두가 AI 기반 경제에 의미 있게 참여할 수 있도록 보장하는 데 초점을 둔다.” ‘여성’이나 ‘성평등’ 같은 단어는 찾아볼 수 없다. <여성신문>의 보도에 따르면, ‘APEC 정상 경주 선언’도 사정은 마찬가지다. 2019년 이후 늘 포함되었던 ‘라 세레나 로드맵’(여성의 경제적 역량 강화계획)이 이번에 처음으로 제외되었다고 한다. ‘모두’ 안에 다 들어가 있다고 우길 셈인가 싶다. 요지는 여성을 포함한 모든 이들이 AI 기술을 활용할 능력을 갖출 때까지 ‘노오력’하라는 말이다. 개인이든 국가든, 공공이든 민간이든, 노동자 혹은 소비자든 기업이든 AI 역량 강화는 시대적 사명이 되었다. 물론 AI 개발 및 확산을 지원하는 인프라 발전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항목도 별도로 있다. 역량 다음으로 이니셔티브 문서에 자주 나오는 단어가 ‘혁신’과 ‘투자’ , ‘발전’이다. 과연 투자를 받고 혁신을 거듭해서 하루가 다르게 발전하는 AI 기술을 ‘모두’가 따라잡는 건 언제쯤 어떻게 가능할까. AI 기술이 속력을 줄이고 방향을 바꾸는 일은 언제쯤 어떻게 가능할까. AI가 “혁신의 새로운 영역을 열고, 생산성을 높이며, 경쟁력을 강화하고, 경제적 번영과 회복탄력성을 증진함으로써 전세계 경제를 근본적으로 재편할 잠재력을 가지고 있음”을 거역할 수 없는 운명으로 받아들이며 쓰여진 문서 앞에서 숙연해졌다. 그러다 다시 정신을 차리고 ‘다른 AI’가 가능하다고 생각하는 이들이 치킨집에 모여 의기투합하며 맥주잔을 부딪히는 상상을 해본다. 아마도 러브 샷을 할 이들은 아닐 듯하지만 해도 좋겠다. 그런 러브 샷이라면 사랑스러울지도?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