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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평] 기이함 없는 기이함, 프런트 라인 연속 기획 <부고니아> ② - 김예솔비 평론가
김예솔비 2025-11-19

<부고니아>

<부고니아>에서 일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온 미쉘(에마 스톤)은 미리 잠복해 있던 테디(제시 플레먼스)와 돈(에이든 델비스)에게 습격을 당한다. <지구를 지켜라!>의 강만식(백윤식)이 술에 취한 상태에서 납치되었던 것과 달리, <부고니아>의 미쉘은 또렷한 맨정신이다. 강만식이 부도덕한 자본가의 초상이었다면, 미쉘은 자기 계발의 성공 신화로 점철된 젊은 기업가의 표본이다. 미쉘은 매일 아침 요가를 하고, 호신술을 배우며, 선수 수준의 고강도 유산소운동으로 하루를 시작한다. 테디가 그녀를 덮쳤을 때 미쉘은 거세게 저항하고 두 사람은 한참 동안 몸싸움을 벌인다. 그러던 중 공간이 일순간 전환되고, 카메라는 통창이 난 수영장 안쪽에서 난투 장면을 유리 너머로 지켜본다. 치열한 바깥과 달리 방음된 수영장은 평화롭고 고요하다. 왜 카메라는 갑자기 현장을 이탈했을까. 약간 과장을 보태 해석하자면, 이 숏은 요르고스 란티모스의 인장이다. 인물들을 실험실 안에 가두고 한발 물러서 비인간적 시점으로 관찰하는 것. 유리창 너머의 인물들은 무균실에서 발버둥치는 실험체처럼 보인다. 사실상 이 장면뿐 아니라 <부고니아>에서 테디가 지닌 강박은 영화 전체에 전이되지 않는다. 그는 시종일관 불안에 시달리며 시간에 쫓기고 있지만 그 강박은 인물의 얼굴과 몸짓에(만) 남는다. 인물의 상태는 오직 관찰 대상의 표면에 머문다.

오진우 평론가가 “란티모스는 일종의 실험실의 과학자”라고 표현했듯, 란티모스의 영화적 현실은 언제나 실험실을 전제한다. 란티모스는 이상한 규칙이 세계의 유일한 질서처럼 통용되는 환경에 인물들을 몰아넣고, 그 실험이 빚어내는 기이한 형상들을 살핀다. 물론 여기서 ‘실험’이란 영화가 영화의 형식적 실험을 시도한다는 것과는 분명 다른 일이다. 그의 영화에서 실험이란 통용되는 사회의 규율들을 뒤틀린 것으로 치환한 뒤, 그 뒤틀린 세계가 빚어내는 감각적 기이함을 통해 현실을 되비추는 것을 의미한다. 란티모스의 영화는 자주 ‘기이하다’는 수사를 동원하지만, 이는 영화의 예측 불가능한 운동을 통해 생겨나는 모험이 아니라 영화의 운동의 자리에 철저히 계산되고 통제된 실험실을 가져다놓은 결과물이다.

어쩌면 요르고스 란티모스가 보기에 <지구를 지켜라!>는 그 자체로 실험실의 구조를 내포한 영화였던 것이 아닐까. <지구를 지켜라!>는 일종의 슈뢰딩거의 실험과 같은 논리를 견지하고 있다. 이 영화를 관통하고 있는 결정적인 서스펜스는 강만식이 외계인이라는 병구(신하균)의 믿음이 결코 확정적이지도, 불확정적이지도 않다는 점이다. 이 음모론의 진위 여부는 영화 내내 불안정한 사실로 남는다. 병구가 강만식을 납치하고 처단하려는 동기는 그가 외계인이라고 믿기 때문일 수도 있지만, 강만식의 유제화학 회사에 다니다가 산재를 입은 어머니에 대한 강만식의 사적 복수일 수도 있다. 영화는 내내 이 두 가지 가능성을 동시에 견지하며 그 어떤 것의 편을 들어주거나 쉽사리 해소하지 않는다. 병구의 음모론이 사실로 판명되기 위해서는 지구가 폭발해 병구 자신도 죽음을 맞이해야 한다. 이 슈뢰딩거의 역설이 <지구를 지켜라!>를 작동시키는 서스펜스의 정체다. 요르고스 란티모스는 이처럼 진실과 허구 사이에서 아슬아슬하게 균형을 잡는 서스펜스의 원리가 자신이 영화의 인장으로 삼는 ‘실험실’과 맞닿아 있다고 여겼을지도 모른다.

<부고니아>

요르고스 란티모스의 <부고니아>는 <지구를 지켜라!>를 충실히 각색한 것이라기보다는 <지구를 지켜라!>에 대한 해석을 영화화한 결과물에 가깝다. 이런 점은 영화의 제목에서도 드러난다. ‘지구를 지켜라!’라는 제목이 병구의 신념을 직설적으로 보여주면서도 영화의 모티프에 내재된 역설을 단적으로 드러내는 반면, ‘부고니아’라는 제목이 전달하는 의미는 한 차례 꼬여 있다. 부고니아는 ‘소에서 태어난 것’이라는 의미로, 꿀벌이 부패된 소의 시체에서 자연발생한다고 믿었던 고대 그리스인의 미신을 가리킨다. 죽음에서 비롯된 생태계의 역설적인 순환이라는 점에서 제목의 의미는 영화와 연결되지만, 얼핏 보아서는 이 사실을 알 수 없다. 영화의 첫 장면과 마지막 장면에서 벌이 꽃에서 꿀을 추출하는 자연다큐의 이미지가 등장한다는 점, 그리고 테디의 집 근처 뒷마당에 양봉장이 있다는 사실을 제외하고는 말이다. 또한 부고니아라는 단어의 의미가 영화를 보는 동안 등장하지 않으므로 관객에게 이 제목의 비유는 추후에 납득하(거나 영원히 모르)게 되는 뒤늦은 단서에 가깝다.

한편 미쉘이 안드로메다에서 온 외계인이라는 음모론은 원작과 동일한 설정을 가져간다. 하지만 원작에서 이 음모론이 2000년대 초반의 감수성이자 특유의 B급 감성이라는 점은 <부고니아>에서 충실하게 옮겨지지 않는다. 물론 규모 면에서 요르고스 란티모스는 나름대로 B급 영화를 시도했다고 볼 수도 있겠다. <가여운 것들>에 비해 스펙터클의 규모가 줄어든 점이나 한정된 로케이션 등으로 미루어볼 때 이 영화는 란티모스가 일종의 쉬어가기 차원에서 제작한 소품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B급 감성은 그것의 만듦새 차원만이 아니라 제도적 언어로 족히 설명되지 않거나 생경하다고 여겨지는 것을 최후까지 밀어붙이는 근성이 동반되는 연출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던가. 타협하지 않는 것. 고집스러운 것. 이름을 붙일 수 없는 그 나름의 시도를 호명하는 우리들의 방식. <지구를 지켜라!>에서 B급 감성은 납치와 감금이라는 범죄영화의 요소와 외계인이라는 황당한 설정 사이에서 그러한 설정과 장르의 간극을 키치한 이미지로 시각화한다. 이는 자본가의 부의 축적을 외계인의 소행으로 여기며 자본주의와 세기말(초) 음모론을 결합하는 수단이 되기도 한다. B급 감성은 병구가 영웅인지, 사회에서 도태된 자인지 밝히는 것을 중요하게 여기게 함으로써 정치적 메시지를 천연덕스럽게 감춘다. 그러나 <부고니아>에서 중요한 것은 테디가 바보인지 영웅인지 여부가 아니다. <부고니아>가 암묵적인 적으로 삼고 있는 것은 자본가가 아니라 신자유주의적 자기 계발 담론이며, 테디 또한 이로부터 자유롭지 못하기 때문이다. 영화의 초반부, 쾌적한 시설에서 전문적인 장비를 갖추고 운동을 하는 미쉘과 맨바닥에서 운동을 하는 테디, 돈 일행을 교차해서 보여준다. 또한 테디는 돈에게 화학적 거세 주사를 놓으며 자신의 주인이 되어야 한다고 말한다. 테디와 미쉘은 자본을 중심으로 대치하기 이전에, 자기 계발 신화라는 더 큰 시스템의 일부인 것이다.

앙드레 바쟁은 문학의 경우 작가는 평생 자신의 스타일과 테크닉을 고수할 수 있는 반면, 영화를 만드는 사람은 그러한 자유를 누릴 수 없다고 말한 바 있다. 영화는 반드시 그 시대 관객의 감수성과 맞물려야만 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부고니아>는 2000년대의 B급 감성을 실험실의 기이함이라는 스타일로 옮겨오고자 시도하지만 동시대에 통용 가능한 감수성이 무엇인지 탐색하지는 않는다. 란티모스의 전작들처럼 <부고니아>의 인물들은 자기모순적 시스템 안에 갇힌다. 물론 여기에 나름의 서스펜스가 없는 것은 아니다. 미쉘에게 외계인임을 자백하라는 테디와, 그의 말을 따라 미쉘이 자백하자 꼼수를 쓴다고 몰아가는 테디와 미쉘 사이의 순환논법적인 대화는 숏/역숏만으로 긴장감을 이끌어낸다. 그러나 <부고니아>는 <지구를 지켜라!>만큼의 불확정성을 견지하지 않는다. 물론 이것은 <지구를 지켜라!>를 본 뒤 <부고니아>를 보았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지구를 지켜라!>를 보지 않았다면 <부고 니아>의 결말부에서 미쉘이 정말 외계인이라는 사실이 폭로되는 장면에서 순수하게 동요할 수 있었을까. 그보다 중요한 건 기이함이 영화가 겨냥하는 목표가 되었을 때 영화는 기이함을 상실해버린다는 역설이다. 란티모스의 영화는 내부에서 기이함이 발생한다기보다는, 현실의 뒤틀린 배치를 통해 기이함이 생산되는 구조를 가시화하는 것에 가깝다. 그러나 이 글에서 말하고 싶은 기이함이란 예측 가능하게 통제된 효과로서의 기이함이 아니라 영화의 안쪽에서 발생하는 감각이다. 루이스 부뉴엘의 말을 따라 영화의 메시지보다는 “본능적이고 비이성적인 것에 대한 가차 없는 잔인한 애정”을 담아 충동으로 기울어진.

<사랑이 지나간 자리>

<부고니아>의 마지막 장면에서는 지구에 사는 인간들만이 죽음을 맞는다. 지구의 종말이 아니라 인류의 종말이다. 로이 앤더슨의 영화를 연상시키는 타블로숏은 돌연한 죽음을 맞아 쓰러진 인간들과 그 위를 유유자적 돌아다니는 동물들을 보여준다. 멈춰버린 인류와 그럼에도 지속되는 세계의 대비를 강조하는 일련의 숏들은 ‘비인간적인 시점’에서 더 나아가 영화의 운동에서 인간성을 소멸시키고자 하는 야심을 드러낸다. 공교롭게도 최근 열린 서울동물영화제에서 상영되었던 흘리뉘르 팔메이슨의 <사랑이 지나간 자리>에서도 비인간이 주체가 된 시점의 장면들이 등장한다. 아이슬란드의 광활하고 압도적인 자연 풍경과 그 속의 동물들은 대체로 인간과 별도로 존재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이 영화에서 인간이 느끼는 감정과 그 관계의 산물은 결코 자연과 무관하지 않다. 상실과 폭력, 이별과 같은 관계의 여파는 자연을 경유해 인간에게 되돌아온다. 영화는 동물과 자연을 결코 단순한 비유나 비인간의 상징으로만 여기지 않고, 인물들과 물리적으로 관계 맺는 환경의 동등한 요소로서 등장시킨다. 이 영화에서 기이함은 어떤 설정을 통해 발생한다기보다 자연의 모호성을 장면에 적극적으로 도입함으로써 나온다.

<사랑이 지나간 자리>는 얼핏 보기에는 한 가족이 이별을 맞이하는 과정을 그린 영화처럼 보인다. 그러나 영화는 그러한 내용으로 간단히 요약되지 않는다. 작가로서의 행보를 꿈꾸는 안나와 전남편 매그너스는 이미 결혼 생활을 끝냈지만 여전히 아이들과 함께 시간을 보낸다. 영화는 가족구성원과 반려견 판다가 자연 속에서 보내는 일상적 장면들을 충실히 따라간다. 아이들은 들판을 자유롭게 뛰놀고, 청어잡이 어부인 매그너스는 바다로 나가며, 안나는 햇빛이 깃드는 들판 한복판에 작업실을 꾸린다. 그곳에서 안나는 천과 금속, 빛을 재료로 회화를 만든다. 금속덩어리를 천 위에 올려두고 비바람과 햇빛을 그대로 맞게 한 뒤, 그 흔적으로 남은 자국을 작품으로 삼는 것이다. 자연이 남긴 흔적을 받아들이는 안나의 작업 방식은 자연이 인물들의 삶과 외따로 존재하는 배경이 아니라 그들의 정서와 경험에 직접 관여하는 존재임을 암시한다. 자연은 풍경처럼 분리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자연의 모호한 현상들이 이들의 삶과 맞물려 의미를 띠게 된다. 영화는 합리적인 서사를 앞세우기보다 각각의 장면과 장면들 간의 흐름에 충실히 머물면서 자연의 모호함을 장면의 단위에 도입하고자 한다. 서사로는 설명하기 힘든 초현실적인 일들이 장면의 단위에서 일어난다. 이를테면 매그너스가 다른 암탉을 괴롭히는 수탉을 바위로 내려쳐 죽이고, 어느 밤 그 수탉이 집채만 한 크기로 변해 잠든 매그너스를 낚아채는 장면이 그렇다. 이 환영 같은 순간은 매그너스가 아이들을 향해 보이던 강압적 기운과 겹쳐지며, 자연과 인간의 폭력이 미묘하게 맞물려 있는 기이한 관계망을 드러낸다.

영화가 과장이나 비현실적인 표현을 통해 현실과 상상 사이를 아무렇지 않게 오가는 것은 익숙한 기교 중 하나일 테다. 그러나 이 영화의 특이한 점은 영화가 메시지를 강조하기 위해 기교를 활용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예컨대 아리 애스터의 <보 이즈 어프레이드>가 보의 강박을 드러내기 위해 극도로 긴박한 효과를 조성하고, 란티모스 영화의 광각숏이 인물을 심리적 주체가 아니라 시스템의 일부처럼 보이게 하기 위한 스타일이라면, <사랑이 지나간 자리>의 비현실적인 표현은 장면을 잠시 모호하게 만들 뿐 영화 전체의 메시지를 지배하지 않는다. 이 영화에서 환상인지 실제인지구분이 안되는 일들은 자연의 모호성을 닮아 있다. 영화는 인간이 만든 사물과 자연 풍경이 나란히 공존하는 풍경을 보여주거나, 자연에서 얻은 식재료를 만지고 자르고 먹고 삼키는 것을 감각적인 차원에서 묘사하면서 인간적 현실이 결코 자연의 원리와 무관하지 않음을 암시한다. 부부 사이가 멀어지고, 남편이 가정에 심은 폭력의 씨앗이 천천히 가족들 사이에 퍼지고, 그렇게 한 가족이 조금씩 부서지고 와해되는 과정은 영화의 줄거리가 아니라 자연과의 관계 속에서 변모하는 감각을 통해 전달된다. 이 감각은 때로 지극히 왜곡되고 비현실적인 영화적 환상을 동반한다. 인간을 지구상에서 제거해버리지 않고도 비인간의 감각을 세계의 중심으로 소환해내는 기이함이 이 이 영화에는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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