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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뷰] 온라인도 물리적 공간이다, <에스퍼의 빛> 정재훈 감독
정재현 사진 최성열 2025-11-06

자캐커뮤. 자기가 창작한 캐릭터를 바탕으로 세계관을 짜나가며 타인과 소통을 이어가는 온라인 커뮤니티를 일컫는 용어다. 알 듯 모를 듯한 이 개념을 <호수길><환호성>등으로 일찍이 독립영화 신에서 주목받은 정재훈 감독이 영화화했다. 그의 신작 <에스퍼의 빛>은 청소년들이 자캐커뮤를 바탕으로 온라인 커뮤니티에서 모험을 떠나는 다큐멘터리다. 이들이 출연자로서 또 작가로서 누비는 길은 어느새 현실과 허구의 경계를 지우고, 관객은 속칭 개연성의 관습으로부터 이탈하는 세계마저 그저 빛이라 믿으며 따르게 된다. 이 흥미진진한 괴작을 어떻게 바라볼 것인가. 정재훈 감독이 낯선 영화를 경험하는 나름의 팁을 전했다. “영화는 관객으로부터 완성된다. 그러니 감각을 열어 달라. 우리도 개봉 자체가 모험이다.”

- 청소년 수강 대상의 영화 워크숍에 강사로 참여하며 작품에 착안했다고.

2017, 18년쯤으로 기억한다. 당시 청소년영화 몇편을 구상 중이었다. 내가 겪은 청소년기와 현재의 청소년 사이엔 거리가 있지 않은지 생각하던 중에 부천국제판타스틱영화제가 주최하는 청소년 영화 아카데미에서 청소년들과 대화를 나눌 기회가 생겼다. 이 친구들이 생각보다 장르영화에 관심이 많다는 걸 알았다. 다들 판타지 장르나 고어물을 쓰는 데에 두려움이 없었다. 누구나 겪지만 일순간 없었던 듯 사라지는 때가 청소년기 아닌가. 게다가 자기 표출이 어려운 시기라 그런지 워크숍에서 만난 친구들은 현실보다 온라인 세계를 훨씬 친숙하게 여기고, 스스로가 아닌 캐릭터나 스토리를 통해 메시지를 전달하는 걸 편하게 여기더라. 청소년들의 세계를 면밀히 관찰하며 자캐커뮤도 알게 됐다. 이후 작품을 기획했다.

- 청소년 플레이어들과 함께 스토리를 공동창작해나갔다.

10명 남짓의 청소년들로 시작한 프로젝트다. 3장에 해당하는 이야기를 6개월에 걸쳐 플레이했다. 제작진이 세계관을 던져주면, 플레이어들이 각자 캐릭터를 정한 뒤 주말에 온라인에 모여 스토리를 공동창작했다. 또 평일엔 각자 개인 로그를 만들어 플레이 이후 자기의 마음을 기록하는 동시에 에피소드에 대한 자기 서사를 만들도록 뒀다. 연출로서는 이 친구들을 입체적으로 바라보고자 애썼다. 영화 속에서 플레이어들의 얼굴이나 감정이 조금씩 드러날 때, 그 순간이 본인의 것이든 캐릭터의 것이든 재밌게 담기길 바랐다. 6개월간 총 3장의 이야기를 완성한 후 두세달 지나 1장을 촬영했다. 이후 코로나19 팬데믹이 닥쳤고, 영화 제작지원 사업 등도 얼어붙으며 한동안 촬영이 중단됐다. 1장을 찍고 나니 돈이 떨어지기도 했고. 2023년에야 지원을 받아 나머지 이야기를 찍을 수 있었다.

- 그사이 2021년엔 옵/신 스페이스에서 관련 전시를, 2022년 문래예술공장에서 공연/스크리닝 형태로 작품 일부를 선보였다. 제작 과정을 공유하는 게 필요하다고 판단한 까닭은.

어차피 이 영화는 완성까지 오래 걸릴 일이었다. 촬영 초반에 필요한 예산이 전부 모인 게 아니어서 일단 1장의 촬영을 마친 후 사람들을 설득하려 했다. 당시엔 ‘ESP 프로젝트’라는 제목으로 홍보했는데 결국 <에스퍼의 빛>도 큰 틀에서 보면 ‘ESP 프로젝트’의 일환이라고 볼 수 있다. 그때만 해도 1장만 찍고 끝내라는 사람들도 많았다. 그럴 순 없었다. 내부적으로는 제작비를 모으고, 외부적으로는 작품을 알리는 차원으로 공연/스크리닝을 시도했는데 그 과정에서 큰 용기를 얻었다. 다원 예술 프로젝트였다. 스크리닝 도중 관객이 직접 선택지에 따라 움직일 수 있었고 관객의 이동에 따라 보게 되는 영상이 전부 달랐다.

- 이번에도 얼굴과 손의 클로즈업이 많은데.

얼굴이 중요한 영화였으니까. 플레이어의 얼굴은 서로 다른 세계를 잇는 통로다. 사실 내가 스마트폰을 산 지 얼마 안된다. 2년 조금 넘었나 그렇다. 스마트폰이 없으니 도시를 오가는 사람들의 표정을 볼 기회가 많았는데, 스마트폰에 골몰한 사람들의 눈코입이 어릴 때 보아 기억하던 사람들의 것과는 확연히 달랐다. 그 다른 얼굴을 들여다보는 게 이 프로젝트의 핵심이었다. 아무튼 나도 스마트폰 없이는 앱이 연동이 안돼 결국 샀지만…. 지금은 그 누구보다 스마트폰을 자주 본다. (웃음) 제목에 쓰인 ‘빛’이 스마트폰의 은유이기도 하다. 플레이어들이 광원인 스마트폰을 통해 온라인 공간에 접속해 이능력자가 되는데, 이들은 햇빛 아래에선 활동할 수 없다. 빛의 쓰임을 이런 식으로 은근하게 매설해두었다. 이외에도 얼굴에 닿는 빛을 신경 썼다. 디스플레이를 보는 눈이 중요하다 보니 아이라이트 조명에 집중했다.

- <호수길>에서는 재개발로 스러져가는 응암2동을, <환호성>에서는 행위로서의 노동과 그 노동을 수행하는 청년의 고된 육체를 담았다. <도돌이 언덕에 난기류>또한 산과 조선소의 풍경을 담았고. 이전까지는 생동하던 것들의 쇠락기를 담았다면 이번 영화에선 절멸 앞에서 생동하길 멈추지 않는 플레이어들이 등장한다는 점에서 다르다. ‘청소년’ 플레이어의 특성과 관련 있나.

이전의 작품들은 특정 공간, 신체를 포함해 물리적인 요소를 어떻게 영화의 방식으로 형상화하고 감각시킬지를 고민하며 만들었다. <에스퍼의 빛>을 두고 정재훈의 작품 세계가 변했다고 느끼는 관객도 있다. 그런데 나는 온라인 공간 또한 현실 세계와 마찬가지로 물리 차원을 지닌다고 생각한다. 언제 사라질지도 모르고, 쉽게 다른 요소가 덧씌워지거나 공간끼리 상호작용도 자유로우니 말이다. 따라서 이전에 관심을 두던 대상과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2018년만 해도 피칭 중 시놉시스를 설명할 때 대부분 이 작품의 전제를 낯설어했다. 그런데 지금은 모두가 온라인 공간을 현실과 진배없다고 인식한다. 특히 이 작품은 감독의 통제가 불가능한 구조다. 1장의 1번 에피소드가 만들어져야 플레이어들의 반응과 캐릭터의 궤적을 토대로 2번 에피소드를 짓고, 1장을 모두 만든 후에 탄생한 요소를 바탕으로 2장과 3장을 지을 수 있기 때문이다. 에피소드끼리 서로 충돌하다가도 영향을 주고, 이내 서로에게 물드는 과정 자체가 영화적이다. 결국 통제 불가능성이야말로 이 프로젝트의 매력이다.

- 온라인 공간 역시 물리성을 지닌다는 관점이 이 영화를 다큐멘터리로 규정하는 것과 맞물려 있나.

온라인 공간도 일종의 현실이다. 그 현실의 공간이 픽션을 경유해 플레이어들을 조우하게 만들었다고 보는 게 편할 것이다. 플레이어들과 제작진이 만난 구실 또한 현실에 근거한다. 이들이 온라인 공간에 침투한 이유는 학업 스트레일 수도, 판타지에 대한 갈망일 수도, 환경에 대한 걱정일 수도 있다. 제작진은 청소년들에게 익숙한 요소를 중심으로 이들이 롤플레잉에 몰입해 자신을 비춰볼 수 있는 환경을 제공했다. 그런 점에서 이 작품을 다큐멘터리가 아니라고 말할 이유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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