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을 완전히 대체할 수 있는 AGI, 즉 인공일반지능이 10년 안에 도래할 것이라는 믿음이 팽배했지만, 최근 들어 회의론이 대두하고 있는 듯하다. 그러한 AGI는 만드는 것이 불가능하며, 대신 특정 기능에서 큰 능력을 발휘하는 쪽으로 인공지능을 발전시키는 쪽이 낫다는 견해도 많이 나온다. 이러한 논쟁을 보면서 애초에 AGI, 나아가 ASI, 즉 인간을 훌쩍 능가하는 인공초지능의 개발에 몰두하는 흐름은 일종의 ‘의인관의 오류’가 아닐까라는 생각이 들었다. 이 말은 미국의 경제사상가 소스타인 베블런이 산업혁명 이후 생산의 주역으로 새로이 나타난 기계를 두고 사람들이 범해온 그릇된 이해방식을 일컫는 말이다. 사람들은 놀라운 효율성과 힘으로 엄청난 생산성을 발휘하는 기계라는 존재를 두고서 이것이 인간의 신체 작동을 대체하는 것이라고 생각하는 ‘의인관’(anthropomorphism)의 관점을 취했다는 것이다. 하지만 베블런에 의하면 이는 잘못된 생각이다. 산업혁명 이후에 나타난 기계는 그 상상력의 기원이 인간의 신체를 모방하는 것에 있지 않다. 이 기계는 그 구상과 설계와 작동 모두에 있어서 어떠한 힘과 질량과 어떠한 에너지와 물질이 어떠한 인과관계에 따라 어떻게 운동하고 변화하는가라는 물리적, 화학적 법칙으로 지배되게 되어 있다. 단순한 왕복 동작을 하는 기계는 인간의 동작을 흉내낸 것으로 보일지 모르지만, 기계는 인간의 신체에서 절대로 나올 수 없는 무수한 동작과 작용을 마음껏 구사한다. 화학과 전기공학의 법칙에 따라 생겨난 기계들은 인간의 신체와 아예 상관이 없다. 베서머 공법을 이용한 철강 공장은 대장장이들의 신체에서 나온 것이 아니다. 또 라디오와 텔레비전이라는 기계는 인간의 재주와는 완전히 무관한 기능을 수행하고 있다. 인공지능은 과연 인간의 지능을 대체하는 것을 그 본질로 삼는 것일까? 이는 또 하나의 ‘의인관’이 아닐까? 산업혁명으로 나타난 기계들이 인간의 그것과는 무관한 별개의 ‘신체’였던 것과 마찬가지로, 인공지능은 인간의 지능과는 독립적인 별개의 ‘지능체’(intelligence)가 아닐까? 그렇다면 이를 억지로 구부리고 길들여서 인간의 지능을 대체하는 쪽으로 몰고 가려는 것은 베블런이 말했던 것과 똑같은 ‘의인관’의 발상이 아닐까? 그렇다면 인공지능의 발전은 굳이 AGI나 ASI를 목표로 삼으려는, 즉 인간을 대체하고 뛰어넘어야 한다는 강박에서 벗어나 인간 지능과 사이좋게 공존하면서 그 나름의 발전의 길을 걸어나가는 쪽을 지향하는 게 옳지 않을까? 예를 들어 사회복지 서비스의 적재적소에 인공지능이 도입된다면 비용을 크게 낮추면서도 더 많은 사람들에게 양질의 서비스를 제공하는 일이 가능해질 것이다. 의사 한 사람이 제대로 만들어진 의료 부문의 인공지능을 활용할 수 있다면 전문의 다섯 사람, 여섯 사람의 몫을 거뜬히 해낼 수 있을 테니까. AGI를 먼저 개발해 내는 쪽이 인공지능은 물론 인류의 미래를 주도하고 제패하게 되어 있다는 믿음에 따라 무서운 경쟁이 벌어지고 있으며 들어보지도 못했던 액수의 투자가 이루어지고 있다. 그리고 AGI의 기술개발이 실패하거나 충분한 수익을 낼 수 있는 비즈니스모델이 나오지 않는다면 세계경제 전체가 그 후유증으로 10년간 가라앉을 것이라는 추측도 나오고 있다. 잠깐 멈추어 서서 여러 생각을 해보아야 할 때가 아닐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