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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뷰] 더는 가엾지 않은 자멸의 종에게, <부고니아>
김연우 2025-11-05

테디(제시 플레먼스)는 안드로메다에서 온 외계인들이 지구를 파괴하고 있다고 믿는다. 돌보는 벌집에서 일벌들이 떠나고, 엄마는 임상시험 부작용으로 수년간 입원해 있다. 직장 동료는 일하다 다치고도 보상은커녕 페널티를 받는다. 벌과 인간을 겹쳐보고 두종이 외계인 탓에 위기에 처했다고 믿은 테디는, 사촌동생 돈(에이든 델비스)과 함께 몸을 단련하고 이론을 학습하며 지구를 구할 계획을 세운다. 호일 슈트와 복면으로 무장한 두 사람은 외계인으로 의심되는 미셸(에마 스톤)을 납치해 지하실에 감금하고선 협상을 시도한다. 미셸은 테디가 근무하는 바이오기업, 벌집 군집붕괴현상의 주범으로 추정되는 살충제 제조사이자 엄마가 의식을 잃게 만든 바로 그 회사의 CEO다. 추궁하는 테디와 부정하는 미셸 사이에서 돈은 혼란스럽다.

알려져 있듯 <부고니아>는 장준환 감독의 2003년작 <지구를 지켜라!>를 리메이크한 영화다. 일단 본래 아이디어부터 란티모스의 언어로 재현되기에 적합했고, 윌 트레이시의 각본이 감독의 세계와 잘 조율되었다는 인상이다. <부고니아>는 공간과 동선을 제한하고 소수의 인물에 집중해, 어긋나고 부딪히는 논리의 교환과 심리의 클로즈업을 중심으로 치밀하게 텐션을 쌓는다. 자주 관전되는 신체의 충돌은 그 분출, 때로는 잔여물에 가깝게 다가온다. 원작과 성별이 달라짐으로 인해 가학 행위 묘사에 대한 우려가 있었는데, 테디와 돈이 화학적 거세를 하는 전개, 격투에 능하며 좀처럼 패닉하지 않는 미셸의 특성으로 어느 정도 무마된다. 대립하는 두 인물은 동시대적이고 다소 미국적으로 각색됐다. 음모론을 믿는 테디의 증상은 트라우마만으로 설명되지 않으며, 미셸은 소셜미디어의 시대에 걸맞게 자기를 관리하고 회사의 이미지메이킹에도 힘쓰는 기득권층으로 나타난다. 시종일관 절제하는 스톤과 차분하게 출발해 점차 동요하고 무너지는 플레먼스, 대척점에 놓인 두 배우의 변화하는 역학이 훌륭하다. 특히 미셸은 란티모스-스톤식 캐릭터의, 예측 범위를 벗어난 변종이라고 할 만하다. 전시하는 언어와 실제 행동의 노골적인 괴리는 우습고 교묘한 논리는 무섭다. 납치당한 직후에도 유지하는 냉정한 태도는 항히스타민제를 뒤집어쓴 채 눈을 부릅뜨는 외양과 만나 일종의 비인간적인 이미지를 입는다. 원작의 얼굴이 순수와 광기를 오가며 이입과 거리 두기를 되풀이하게 만들었던 병구 역 신하균의 것이었던 반면 <부고니아>가 택한 얼굴을 하나 꼽는다면 거짓과 진실, 연민과 관조의 경계에 있는 에마 스톤의 것이라고 해야 할 듯하다. 이와 연결해, 음모론자인 주인공을 대하는 시선이 톤 앤드 매너와 세부사항 외에 원작과의 두드러지는 차이이며 어쩌면 호불호를 가를 지점으로 보인다.

덧붙이면 ‘부고니아’라는 표현은 소의 사체에서 벌이 탄생한다는 고대의 미신 또는 관련된 의식에서 비롯됐다. 이 상징성을 기억해두면 관람에 도움이 되리라 생각한다. 원작과 일부 공명하며 계층 양극화, 사고의 폐쇄와 극단화, 기후 위기 등 동시대 이슈를 건드리는 서늘하고도 강렬한 풍자극. <부고니아>는 영화 안팎에서 이야기되는 ‘종말’과 ‘인간다움’에 관한 재사유를 호소하기보단 오판을 냉소한다. 사실 마를레네 디트리히의 이 흐르는 시퀀스가 선사하는 꺼림칙한 여운만으로도 <부고니아>가 유효한 리메이크인 까닭은 충분하다.

close-up

테디와 미셸이 집 안에서 한바탕 몸싸움을 벌인 직후, 스무해 전 테디의 베이비시터였던 마을 보안관이 집 문을 두드린다. 돈이 다시 지하실로 끌고 내려간 미셸을 감시하는 와중에 테디는 보안관을 응대한다. 연결되었지만 단절되기도 한 두 공간, 서로 다른 의도를 가진 네 사람이 교차된다. 2 대 2로 팽팽히 맞물리던 장면이 돌연 고조되며 영화가 뒤틀린 전환점에 다다르는 찰나가 인상적이다. 이후 오락가락하던 주도권이 기울며 축적된 긴장이 효과적으로 터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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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인즈 오브 카인드니스> 감독 요르고스 란티모스, 2024

<가여운 것들>과 <부고니아>사이에 공개된 요르고스 란티모스의 옴니버스영화로, 폐쇄적인 규칙과 믿음을 따르는 집단이나 개인에 관한 세 가지 우화가 이어진다. 특히 에마 스톤이 해양탐사 중 실종되었다 기적적으로 살아 돌아온 연구자로, 제시 플레먼스가 그의 남편으로 등장하는 두 번째 에피소드에서는 <부고니아>의 전조가 얼핏 엿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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