탈북을 시도하던 소년은 변절자의 배신에 가족을 잃는다. 청년으로 자라는 동안 무자비한 해적이 된 씬(장동건)은 반쪽짜리 조국을 향해, 민족을 향해, 과거를 향해 복수를 다짐한다. 그리고 씬의 거침없는 질주를 막아서는 강세종(이정재)이 그의 자취를 쫓는다. 러시아, 태국 등 세계 무대로 확장한 <태풍>은 바닷길을 이어 부산에 당도한다. 해운대, 다대포해수욕장, 차이나타운, 수영만요트경기장 등을 활보한 <태풍>은 정서적 안착을 이루지 못하고 여전히 부유하는 청년의 구슬픈 정서와 최첨단 해양 도시의 세련됨을 뒤섞어 복잡한 감정을 이끌어낸다. 무수한 난관을 넘어선 영화는 이렇게 완성되었다.
호텔 화장실에서 변절자를 찾아내 사살한 씬. 그리고 그런 씬을 추격하는 강세종의 장면이 담긴 배경지는 당시 부산 해운대 그랜드호텔이다. 초반 기획 단계에서는 해당 장면이 벡스코로 계획돼 있었지만 국제 포럼이 결정되면서 예기치 못한 난항에 맞닥뜨렸다. 규모가 큰 작품인 만큼 안전을 우려한 관계자들이 협조 요청을 고사했고 그 와중에 유일하게 손을 내밀어준 곳이 부산 해운대 그랜드호텔이다. 섭외에 난항을 겪었던 손세훈 프로듀서는 당시를 회상했다. “로비에서 총격전을 벌이며 많은 게 부서지고 화장실에서 사람이 죽기 때문에 장소 제공처가 감수해야 할 것이 많았다. 그럼에도 해운대 그랜드호텔이 너그럽게 받아주었다. 당시 호텔 임원의 자녀가 장동건 배우의 열혈 팬이라 함께 사진을 찍었던 기억이 난다. (웃음)”
강세종을 피한 씬이 도착한 곳은 수영만요트경기장. 세련되고 이국적인 풍경을 드러내면서도 부산의 바다를 고스란히 담을 수 있는 공간이다. 이 장면의 비하인드 스토리는 바로 두 주인공의 뒤편에 선 단역들이다. 배우 장동건의 열렬한 일본 팬들이 그의 촬영 소식을 듣고 부산에 찾아온 것. 이 이야기를 전해 들은 곽경택 감독은 북적이는 인파를 표현할 수 있도록 팬들과 함께 촬영을 진행했다. 모두에게 추억으로 기억될 순간이었다.
이 추격 과정에서 나오는 음악 <자동차 추격>은 김형석 작곡가가 작업했다. 웅장한 오케스트라 곡 사이를 빠르게 치고 들어오는 타악기 소리는 스릴 넘치는 장면에 낯설게 다가오면서도 조급한 느낌을 북돋기에 충분하다. “<태풍>자체가 전반적으로 무겁지만 추격 신만큼은 경쾌하고 긴박한 느낌을 돋우고 싶었다. 오케스트라와 타악기의 조화를 음향적으로 극대화한 것도 그런 이유에서였다.”
최근작 <탑건: 매버릭>을 연상시키는 강세종의 럭비 장면은 부산 다대포해수욕장에서 촬영되었다. 물이 얕게 깔린 넓은 모래사장을 담고 싶었던 곽경택 감독은 청사진과 가장 부합한 장소로 다대포를 택했다. <태풍>시나리오를 보고 강세종 역할에 큰 관심을 보인 이정재 배우는 작품 선택에 적극적이었다. 그는 세종의 이미지에도 적합했다. “세종 역에는 아그리파 조각상처럼 강인한 얼굴을 원했다. 그게 바로 이정재 배우다. 장동건 배우가 화려한 인상을 준다면 이정재 배우는 선이 딱 떨어지는 정직한 이미지를 갖고 있다. 둘의 대립각을 외모에서도 은은하게 드러내고 싶었다. 당시 이정재 배우의 몸이 정말 좋았다. 하루는 러시아에서 촬영하는데 장동건 배우가 나를 급히 부르더라. ‘얘 몸 좀 봐!’ 하고서. (웃음) 얼마나 열심히 운동을 했는지 모른다.”(곽경택 감독)
대변항 방파제에서 바다 한가운데 장면을 보충 촬영하던 날. 곽경택 감독은 <태풍>에서 부산 바다를 다양한 각도로 비춘다. “부산 바다 촬영에 정말 공들였다. 씬이 지닌 한을 바다의 빛과 풍경으로 표현하고자 했다. 그가 복수를 행하려 할 때에도 바다는 거칠지만 여전히 아름답다.” 작품 전반에 스며든 한과 애수는 김형석 작곡가의 음악에도 고스란히 담겨 있다. 그는 “배가 폭발한 후 씬과 세종이 클라이맥스에 다다른 장면에는 오히려 난장을 뒤덮는 레퀴엠을 삽입했다. 쉽게 좁히기 힘든 맹렬한 전투를 슬픔이 끌어안는다”고 설명했다.
씬이 홀로 어두운 술집 거리를 배회하는 장면은 부산의 러시아타운과 차이나타운이다. 손세훈 프로듀서는 “러시아를 오가는 해적의 밀항 가능성, 국경을 넘나드는 선박 등을 표현하기에 부산이 적합했다. 무엇보다 부산역 건너편에 위치한 러시아거리를 통해 이국적인 이미지를 완성할 수 있었다”고 제작 당시를 회상했다. 무엇보다 씬의 비밀스럽고 어두운 분위기와 길거리 조명은 하나처럼 보인다. 곽경택 감독은 “러시아타운의 묵직한 빛들이 씬에게 적격이었다. 자신의 내면을 잘 드러내지 않는 씬의 성격에도 어울린다”고 덧붙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