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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IFF #8호 [경쟁] 루오무의 황혼 Gloaming in Luomu
조현나 2025-09-24

장률 / 중국 / 2025년 / 99분 / 경쟁

9.25 BCM 15:30

바이(바이 바이허)는 오래전 헤어진 애인 왕이 머물렀던 마을 루오무에 들른다. 그곳에 들른 이유는 ‘루오무의 황혼’이라 간결하게 적힌 왕의 엽서가 바이에게 날아들었기 때문이다. 한 바퀴 도는 데에 한 시간도 채 걸리지 않는 루오무를 바이는 걷고 또 걷는다. 그리고 그곳에서 게스트하우스를 운영하는 리우(리우 단)와 그의 애인 황(황젠신), 리우의 술친구인 샤오펭 등 다양한 주민들과 마주한다. 이들과의 대화에서 바이는 루오무에 3년 간 머물렀던 왕의 흔적들을 발견한다. 한편 바이 역시 죽음과 밀접히 맞닿은 자신의 과거를 리우에게 털어 놓기 시작한다.

한국에서 중국으로 적을 옮겨 작업을 시작한 이후, 장률 감독이 <야나가와> <백탑지광>에 이어 내놓은 세 번째 장편이다. <루오무의 황혼>은 장률 감독의 전작과 교집합을 지닌다. 가령 <경주>의 최현(박해일)과 같이 주인공 바이가 전 애인과의 추억을 계기로 새로운 장소를 방문하며 본격적인 이야기가 시작된다. 루오무에 곧잘 적응하는 모습은 <군산: 거위를 노래하다>의 윤영(박해일)을 상기시키고 인물의 언행을 비롯한 영화의 디테일한 설정들은 전작 <후쿠오카>가 떠오르게 한다.

차이도 존재한다. 바이를 연기한 배우 바이바이 허의 이름과 그의 개인적 특성이 캐릭터에 반영됐다. 작품에 참여한 제작진들이 스크린에 모습을 비추기도 한다. 현실과 극의 경계를 흐리는 것은 비단 등장인물뿐만이 아니다. 술로 고통을 달래는 바이는 종종 그의 환영인지, 유령인지 모를 존재와 시선을 맞추고 대화한다. 유령의 존재를 대변하듯 바이를 좇는 시점숏이 진실을 파악하기 어렵게 한다. 시간이 흐를수록 루오무를 배회하는 바이의 목적은 불분명해지고, 바이가 리우와 대화를 나눌수록 리우는 결국 바이에게 도래할 미래임을 암시하는 요건들이 불쑥 튀어나온다. 환상과 실제, 생과 사, 과거와 미래가 공존하는 연옥과 다름없는 루오무에서 중간자적 입장을 취한 인물들은 정처 없이 떠돌며 만남과 헤어짐을 반복한다. 자칫 파편적으로 흩어질 뻔한 요소들은 장률 감독의 유려한 필치와 함께 유기적으로 엮인다.

<루오무의 황혼>은 장률 감독의 연출적 특징을 집대성한 작품이다. 그러나 장률 감독은 자기복제를 행하는 대신, 실험을 통해 새롭게 감각을 일깨우는 형식으로 신작을 완성했다. 자신의 성취에 안주하지 않고 거침없이 미지의 영역에 들어선 거장의 발걸음이 경이롭다. <루오무의 황혼>의 결말 또한 감독이 행한 실험의 일부라 판단해도 무방할 것이다. 루모우에서 끝없이 방황할 것만 같은 바이의 마지막 결정을 눈여겨봐주시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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