샤오리(샤오-잉 바이)와 그녀의 엄마(9m88) ‘여인’은 아버지이자 남편의 가정폭력에 시달리고 있다. 여인은 쌓인 울분을 샤오리에게 화풀이할 때가 많고, 그럴 때마다 샤오리는 옷장에 숨어 고통의 시간이 지나길 바랄 뿐이다. 한편 한없이 자유로운 친구 리리가 전학을 오고, 샤오리는 그와 친해지며 자기 삶의 굴곡을 견뎌낼 힘을 얻게 된다. 영화 <밀레니엄 맘보> <쓰리 타임즈> <자객 섭은낭> 등에 출연한 배우 서기의 자전적 이야기가 담긴 연출 데뷔작이다. 샤오리의 엄마로서 1988년이라는 시대적 배경과 샤오리 가족의 분위기를 형성해 낸 배우이자 싱어송라이터 9m88에게 서기 감독은 무한한 신뢰를 표헀다. <소녀>와 함께 배우로서의 역량과 연출력을 엮어 자신의 세계를 확장해가는 신인 감독 서기의 등장이 더없이 반갑다.
- “연출을 한 번 해보는 게 어떻겠냐”는 허우 샤오시엔 감독의 제안에 일을 시작하게 됐다고.
서기 이전까지 감독이 되겠다는 생각은 전혀 해본 적이 없었다. 허우 샤오시엔 감독님의 말도 처음엔 농담인 줄 알았다. 그런데 <자객 섭은낭>을 찍을 때 내게 “시나리오는 어떻게 돼가?”라고 물으시더라. “무슨 시나리오요?”라며 되묻다 농담이 아니시구나 싶어 작업을 시작했다. 시나리오 쓰는 게 너무 어려워서 ‘도저히 어떻게 써야 할지 모르겠다’고 물은 적이 있는데 감독님께서 본인이 가장 익숙한 환경, 시간대 그리고 가장 하고 싶은 이야기를 써보라고 하시더라. 그 뒤로 거의 10년이 지나 <소녀>를 완성했다.
- 9m88은 서기 감독의 제안으로 이 작품에 합류하게 됐는데.
9m88 시나리오를 읽기 전 출연 제안을 먼저 받았는데 서기 배우가 영화를 찍는다고 해서 신기했다. 워낙 대스타라 어릴 때부터 잘 알고 있었고, 신인인 내 입장에선 어떻게든 함께 작업하고 싶었다. 샤오리의 엄마를 연기해야 했는데 내겐 아이가 있는 것도 아니고, 시대적 배경도 익숙하지 않아 캐릭터 분석이 어려웠다. 하지만 그런 인물의 삶을 경험할 수 있던 것이 큰 영광이었다. 여인의 선택 중 이해할 수 없는 것도 있었지만 그가 처한 상황을 고려하다 보니 공감대가 형성됐다.
- 9m88을 샤오리의 엄마 ‘여인’ 역에 캐스팅한 이유가 있나.
서기 여인 역에 맞는 배우를 찾는 데에 정말 오랜 시간이 걸렸다. 18살의 어린 나이에 아이를 낳았기 때문에 젊으면서도, 엄마에게 담긴 세월의 흔적이 느껴져야 했다. 우연히 9m88의 영상을 봤는데 어떻게든지 저 배우를 섭외해야겠다는 생각했다. 그를 섭외하는 과정은 말로 전하기 어려울 만큼 신기했다.
- 여인의 어떤 부분이 이해되고, 이해되지 않던가.
9m88 가장 이해가 되지 않은 부분은 왜 이혼을 하지 않고 저 집에 머물러 있을까에 관한 것이었다. 여인이 학대당하는 상황에 분노했다. 다만 극장에서 두 번째로 영화를 관람하면서 몰랐던 점을 많이 발견했다. 우선 남편은 아내의 모든 행동에 관여하려 들고 모든 걸 다 자기가 결정하려고 한다. 때문에 여인 역시 굴욕과 분노를 가슴 속에 쌓아뒀을 것이라 생각했다. 80년대 여성은 선택권 자체가 많지 않았을 것이다. 이혼을 해 가정을 떠나면 생계와 육아를 어떻게 해야 할 지에 관한 걱정이 컸을 것이다. 여인의 심리 역시 복잡하다. 남자를 증오하면서도 그에겐 일말의 사랑이 남아있다. 지금도 그 둘을 완전히 이해했다고 하긴 어렵다. 다만 80년대 당시에는 그렇게 참고 사는 여성이 많았을 것이며, 폭력의 굴레에서 벗어나지 못했을 것이라고 생각하며 연기했다.
- 여인이 첫째 딸과 둘째 딸을 대하는 태도가 상당히 다른데 이를 어떻게 받아들였나.
9m88 내가 생각한 원인은 두 가진데 첫째로 여인이 장녀로서 자신의 모습을 딸에게 투사를 했다는 것이다. 또 둘째에게는 너그럽지만 장녀에게는 가혹하게 대하는 부모님을 주변에서 많이 봐왔다. 맏이에게 가혹하리만치 세게 요구했던 것을 세월이 지나며 ‘안 되는구나’하고 포기한 것인지, 아니면 자신이 못 이룬 꿈을 대신 이뤄주길 바랐던 것인지는 모르겠다. 둘째에게 너그러워지는 것이 아마 그런 부모님들과 비슷한 점이 아닐까 싶다. 나도 감독님께서 왜 그렇게 인물을 설정했을지 궁금했다.
서기 말한 것처럼 맏이에게는 가혹하지만 둘째에겐 너그러워지는 부모의 특성이 반영되어있다. 아는 지인이 아들만 셋인데, 보통 막내를 제일 예뻐하지 않나. 그런데 그 친구는 5살밖에 되지 않은 자기 막내아들을 너무 미워하더라. 이유를 물어봤는데 모르겠다고, 너무 증오스럽다고 하는 것이 아닌가. 그 이야길 들으면서 부모와 자식 간의 인연이라는 게 굉장히 이상하고 신기하다고 생했다. 그 친구와 아들의 관계를 떠올리면서 자신의 스트레스와 분노, 울분을 아이에게 쏟아붓는 부모라는 설정을 했다. 마찬가지로 아이에게 가정폭력을 가하는 아버지에 관해 설명하자면, 영화에 꼭 넣고 싶었지만 넣지 못한 장면이 있다. <소녀>의 시대적 배경인 1980년대 말은 경제가 비약적으로 발전하던 시기였다. 그래서 모두가 그에 맞춰 고군분투했지만 샤오리의 아버지는 희망도 꿈도 잃고 남들보다 뒤쳐진 채 하루하루를 살아가는 상황이었다. 일터에서 아내가 싸준 도시락을 열었더니 구과로 만든 반찬이 나왔다. 한국에선 잘 먹지 않는데 중국에선 많이 먹는 쓴맛 나는 오이 같은 채소다. 이때 이 남자가 ‘인생도 고달픈데 내가 음식까지 이렇게 쓴 걸 먹어야 하냐’는 뉘앙스의 대사를 뱉는 신을 영화에 넣고 싶었다. 이 대사를 통해 많은 걸 설명할 수 있다. 가령 삶을 살면서 우린 많은 어려움을 마주하지만 그것을 가장 쉽게 피할 수 있는 방법은 내려놓는 것이다. 도시락의 경우도 남자가 그냥 구과를 먹지 않으면 되는데 그걸 넣어왔다고 불평을 한다. 지금 자신이 겪는 어려움과 불만이 전부 자기 책임이 아니라며 남 탓을 하는 사람이라는 걸 확인할 수 있는 부분이다.
- 부모에게 시달리는 샤오리가 유일하게 마음을 터놓을 수 있는 상대는 전학생 리리다. 샤오리에게 리리는 어떤 의미를 지닌 존재일까.
서기 샤오리에게 리리는 탈출구와 다름없다. 샤오리의 어두운 인생에 희망을 주고 싶어서 넣은 인물이다. 그런데 리리는 실존하는 존재라기보다는 일종의 환상이다. 릴리가 방학 전에 전학을 와 교실에 등장하는 것도 그가 샤오리에게 환상 속 비밀 친구라는 뉘앙스를 전하기 위험이었다. 샤오리는 종종 환상을 본다. 학교 주변의 굴다리 밑에선 엄마의 과거 모습을 보고, 자유에 대한 갈망을 동생 가방에서 튀어나와 하늘로 날아가 버리는 풍선으로 대치해 보기도 한다. 샤오리는 릴리라는 환상의 친구를 만나면서 자기 내면의 판도라의 상자까지 연다. 그 덕에 샤오리는 자신의 운명을 거스르기 위해 반항하고, 엄마에게 이 집을 같이 떠나자고까지 말하게 되는 것이다. 스트레스를 많이 받거나 힘든 시절을 보낸 아이들이 존재하지 않는 비밀 친구를 만들어 자기의 마음을 털어놓거나 애착 인형에게 본인의 이야기를 하는 경우가 많다고 한다. 샤오리도 아버지의 폭력을 피해 달아난 옷장 속에서 인형을 꼭 껴안고 있다. 그 인형이 실제화된 것이 릴리라고 봐주면 좋겠다.
Director’s Box
<소녀>는 배우이자 감독 서기의 조각들이 단단한 지지대가 되어 준 작품이다. 여인은 서기의 유년기와 더불어 <밀레니엄 맘보>의 비키 등 그가 배우로서 구현한 필모그래피 속 여성들과 맞닿아있다. 현장에서도 프레임 안팎을 오가며 연출자로서, 그리고 배우로서 꼼꼼하게 디렉션을 준 것이 큰 도움이 되었다고 9m88을 비롯한 <소녀>의 배우들은 입을 모은다. <소녀>가 초청된 베니스국제영화제에서부터 서기는 연출에 대한 의지를 내비친 바 있다. 연기자로서 서기가 거쳐 온 수많은 촬영 현장은 작품을 쓰고, 그리는 그의 손에 어떤 영향을 미칠까. 다시금 섬세한 감정을 보여줄 그의 차기작이 기다려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