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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IFF #3호 [경쟁] 지우러 가는 길
굴나라 아비케예바 2025-09-19

유재인/한국/2025년/106분/경쟁

9.19 BH 15:50 / 9.20 B2 20:00 / 9.24 L7 17:00

이 영화는 교사의 성희롱 의혹으로 시작되는 학원물처럼 보이지만, 곧 아주 어린 나이에 마주해야 하는 여성들의 선택을 다루는 심리극으로 변주된다. 한국 영화는 종종 고등학생을 주인공으로 삼는다. 이 시기는 어린 시절 인생의 중요한 분기점이 되기 때문이다. 치열한 입시를 다룬 <명왕성>(2012)이나 학교 내 괴롭힘을 그린 <죄 많은 소녀>(2017) 같은 작품이 대표적이다. 유재인 감독의 <지우러 가는 길> 역시 사춘기 소녀들이 처음으로 남성과의 관계에서 겪는 불안을 세밀하게 그려낸다. 처음에는 교사-제자 성추행 사건을 다루는 사회극처럼 보이며, 관객은 선댄스에서 상영된 <Sorry, Baby>(2025, 에바 빅토르 감독) 같은 진상 규명 드라마를 떠올리게 된다. 그러나 영화는 그 갈등을 슬며시 비껴가며, 이야기가 본질적으로 다른 곳을 향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주인공 윤지는 기혼자인 담임 종성과의 관계로 임신하게 된다. 그는 이미 자취를 감췄지만, 윤지는 그가 돌아오기만 한다면 무엇이든 하겠다는 듯 집착한다. 기숙사 룸메이트는 “사람은 혼자 태어나고, 혼자 죽는 거야”라는 진부한 위로를 건넨다. 기숙학교라는 배경이 암시하듯, 아이들은 모두 결핍 있는 가정에서 왔으며, 윤지는 아예 부모가 없는 듯 보인다. 시간이 흐르면서 교사의 행방은 학교뿐 아니라, 주말마다 다른 도시에서 남편을 찾으러 오는 아내에게도 중요한 문제가 된다. 하지만 윤지에게 중요한 건 오직 낙태다. 그녀는 결국 룸메이트의 돈을 훔쳐 불법 약을 구입하려 한다. 영화의 중심에는 두 소녀가 있다. 임신한 윤지와, 그녀의 곁을 지키는 룸메이트 경선. 동시에 돈의 문제도 끊임없이 따라붙는다. 정식 시술을 받을 만큼의 돈이 없기 때문이다.

<지우러 가는 길>은 유재인 감독의 데뷔작이다. 로카르노, 칸, 베니스, 토론토를 거친 경쟁작들 사이에서 두각을 나타내기는 쉽지 않지만, 장르적 경계를 넘나드는 연출, 예상을 뒤엎는 서사 전개, 배우들의 설득력 있는 연기가 만들어내는 감정의 밀도는 깊은 인상을 남긴다. 그런 의미에서 특히 눈길을 끄는 건, 겉보기에는 사소한 한 장면이다. 임신한 소율의 남자친구가 돌아오는 장면. 영화의 황금분할 지점인 82분 무렵, 단 2분 남짓 등장하지만 묘하게 큰 울림을 남긴다. <지우러 가는 길>에서 남성은 거의 부재하다시피 한다. 아버지도, 남편도, 연인도, 소녀들이 사랑할 남자 친구도 없다. 주요 남성 인물인 교사는 이미 죽었고, 다른 남교사들은 존재감이 미미하다. 이렇듯 영화는 최소 다섯 여성의 운명을 담아내는 반면, 남성의 삶은 거의 드러나지 않는다. 그래서 소율의 남자친구 목소리가 더 간절하게 다가온다. 얼굴은 보이지 않고, 울먹이는 목소리만 들릴 뿐이다. “돌아왔어! 몰랐어! 군대에 끌려갔었어! 용서해줘! 이제 항상 곁에 있을게!” 현실 속 남자가 전하는 꿈처럼 들리는 순간이다. 동시에, 여성이 남성에게 마음을 여는 신뢰의 순간이기도 하다. 영화의 처음과 마지막이 모두 어둠 속에서 시작하고 끝나는 것은 우연이 아니다. 여성들의 운명은 어둠 속에서 규정되지만, 아이들은 결국 햇살 아래, 대낮의 빛 속에서 자라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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