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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뷰] 서로에게 닿기를, <비밀일 수밖에> 배우 장영남, 류경수
이유채 사진 최성열 2025-09-11

미술 교사 정하(장영남)에게 아들 진우(류경수)가 좋지 않은 타이밍에 찾아온다. 정하는 유방암으로 휴직을 신청했고, 동성 연인 지선(옥지영)은 하루 일찍 집에 돌아온 참이다. 진우 역시 비밀이 있다. 다만 캐나다에서 다닌 어학원을 그만두고 요리 유튜버를 하겠다고, 함께 온 연인 제니(스테파니 리)와는 결혼하겠다고 재빨리 고백하면서 가족의 비밀은 얽히고설킨다. <비밀일 수밖에>가 그려내는 가족의 풍경은 낯설지 않다. 그러나 배경인 춘천의 독특한 템포에 실려, 호젓하면서도 서늘한 정서를 빚어낸다. 배우 장영남과 류경수가 그 중심에 있다. 올해 공개된 드라마 <미지의 서울>에 함께 출연했으나 마주하는 장면이 없었던 두 배우는 간만의 만남에 기쁜 기색이 역력했다. 상상극장과 호기심 천국, 고민상담소를 오가는 이들의 대화는 강물처럼 흘러갔다.

- 춘천에서 한달간 찍었다고. 지금 떠오르는 도시의 풍경은.

류경수 그때 선배님이 무척 바쁘셨다.

장영남 맞다. 일정이 겹쳐서 왔다 갔다 하느라 정신이 없었다. 기억나는 건 어느 날 차를 타고 춘천으로 들어가다가 생각보다 거리가 멀다는 걸 체감하고 놀란 순간이 있었다. 친근하게 느껴지던 도시인데 물리적으로는 꽤 멀구나 싶었다. 멀리서 레고랜드를 보며 여기 생긴 이유를 짐작해보기도 하고.

류경수 대학 시절 워크숍에서 연출했던 연극 <춘천, 거기>에 대한 애정이 워낙 깊어서 촬영도 기대가 컸다. 실제로도 즐거웠다. 가을 촬영이라 은행나무 풍경을 만끽할 수 있었고, 생일날 사진을 찍으며 추억도 많이 쌓았다.

- 시나리오의 어떤 점이 마음에 들었나.

장영남 이야기가 잔잔히 흐르다가도 허를 찌르는 순간이 있었다. 그런 부분들을 발견할 때마다 다음 페이지가 궁금했다. 무엇보다 흔치 않은 퀴어 엄마 캐릭터라는 점이 강렬했다. ‘이 여자는 언제 처음 자신의 성정체성을 알았을까? 아주 어릴 때는 아니었겠지’ 같은 상상을 하며 나도 모르게 정하의 삶 안으로 들어갔고 잘해보고 싶다는 마음이 커졌다.

류경수 내가 한 발짝 뒤로 물러서도 되는 이야기라는 점이 좋았다. 주로 맡아온 캐릭터들이 존재감을 확실히 보여준 뒤 빠지는 경우가 많았는데, 진우는 달랐다. 가치관이 다른 원가족과 새로운 가족 사이에서 중재하는 인물이라 배우가 아기자기하게 연기로 살려볼 게 많을 것 같았다.

- 진우에 대한 궁금증이 있다. 성인 진우는 관객이 처음 본 분노에 찬 10대가 아니다. 능글맞기까지 한데, 류경수 배우의 해석이 더해진 것일까.

류경수 진우가 어릴 적 모습 그대로일 필요는 없다고 생각했다. 영화 속 어린 진우는 입시 스트레스로 가장 어두운 시기를 지나던 극단적인 순간에 놓여 있었으니까. 원래 예민한 성격이라도 캐나다에서의 해방적인 삶이 진우를 다른 사람으로 만들어줬을 거라 봤다. 특별한 경험을 겪지 않아도 사람은 나이가 들면서 변하는 것 같다. 나만 돌아봐도 사춘기 때의 나와 30대인 지금의 내가 같은 사람이라는 게 믿기지 않는다.

장영남 애써 더 밝은 척했을 수도 있지 않을까. 진우는 자기가 아버지에게 마지막으로 던진 말 때문에 아버지가 죽었을지도 모른다는 의심을 안고 사는데 그걸 들키고 싶지 않으니까. 정하도 같은 죄책감을 안고 있기에 정하 모자에게는 서로만이 정확히 이해하는 고통이 있다.

- 두 배우가 처음 함께 스크린에 등장하는 장면은 정하가 짐 싸는 교무실에 진우가 깜짝 방문하는 신이다. 진우가 일부러 목소리도 낮추고 얼굴도 가리는 바람에 정하가 아들을 못 알아보면서 진우의 서프라이즈는 성공한다.

장영남 진우 입장에선 애교의 힘이 필요했을 거다. 연락도 없이 한국에 와, 일도 그만둬, 결혼까지 한다고 하니까.

류경수 허락받아야 할 일이 산더미다. (웃음) 그런데 선배님, 실제 아드님이 유학 중 다른 일을 하겠다고 하면 어떨 것 같으세요?

장영남 너무 속상하지. 하지만 뭐 어쩌겠어. 자식 이기는 부모 없고, 애들은 부모가 이래라저래라 할 수 없는 별개의 인격체인걸.

한컷도 허투루 지나가는 법 없이

- 별안간 춘천을 찾은 제니 가족과 정하 모자가 처음 대면하는 호텔 앞 신은 실제로도 촬영 초반에 찍었나.

장영남 그렇다. 완전체가 다 모이면 어떤 그림일지를 상상해왔기에 이 신에 대한 기대가 컸다. 박지아 배우(하영 역)의 활약 덕분에 카메라 바깥에서 많이 웃었다. 재밌었던 게 극 중 우리 모자가 옥신각신하는 제니네 집을 조용히 기다리는 상황이었는데, 보통 센 역할을 맡아온 나로서는 지금 내 연기가 너무 심심한 게 아닌가 싶더라.

류경수 나도 같은 걱정에 이것저것 디테일을 더했다. 장인어른(박지일)이 인사를 건넸을 때 단순히 “안녕하십니까”라고 하면 재미가 없을 것 같아서 일부러 넘어지거나 삐끗하는 순간을 만들었다.

- 진우가 장인, 장모가 있는 방에 처음 들어가 있는 장면도 신경 쓴 티가 났다. 내내 무릎을 꿇고 얘기하다가 방에서 나올 때는 조용히 문을 닫으려고 애쓴다.

류경수 처음에 장인에게서 무섭다는 인상을 받았으니까. 게다가 자길 사윗감으로 탐탁지 않게 여긴다는 것도 알았을 테니 공손한 태도로나마 신뢰를 얻고 싶었을 거다. 문을 닫을 때 숨을 참은 것도 같은 맥락이다. 찍소리라도 냈다간 안에서 장인의 불호령이 떨어질 것이라 상상했다.

- 제니에게 선물받은 속옷 세트를 들고 방으로 들어간 정하는 지선을 발견하자마자 완전히 풀어진다. 장영남 배우의 사랑에 빠진 얼굴을 오랜만에 보는 쾌감이 있었다.

장영남 그 뒤에 정하가 속옷을 이리저리 대보며 지선과 장난치는 장면은 현장에서 만들었다. 옥지영 배우랑 즉흥적으로 해보고 좋아서 감독님에게 말씀드린 건데 오케이는 물론, 영화에도 들어가 기뻤다. 정하와 지선 사이의 격 없는 친밀함, 여자 친구끼리의 알콩달콩함을 놀이 같은 행위들로 표현하고 싶었다.

- 지선과의 관계가 드러나자 정하는 패닉에 빠진다. 은행 밖을 뛰쳐나와 걷는 장면에서 카메라는 배우의 얼굴을 가까이서 포착한다.

장영남 패닉이 올 수밖에 없는 상황이다. 소중히 여기는 선생님이라는 직업을 더는 못할 수도 있다는 공포가 밀려왔을 거다. 진우에게 직접 털어놓겠다는 계획도 어그러질 수 있고. 은행 밖을 휘청이며 걸으면서 길을 잃은 듯한 느낌을 주고 싶었다. 나도 정하도 힘들었던 장면이다.

- 그렇지만 정하는 결국 아들에게 정확하게 고백할 기회를 얻는다. 정하가 진우만을 바라보면서 “엄마가 사랑하는 사람이야”라고 지선을 소개할 때의 감흥이 컸다.

류경수 원래는 좀더 발표하는 톤으로 “내가 사랑하는 사람입니다!”라고 외치는 대사였는데 선배님이 멋지게 바꾸셨다.

장영남 맞다. 모두를 향해 절절하게 “내가 사랑하는 사람이에요~”라고 말하는 느낌이었다. 그런데 준비하면서 다른 사람은 하나도 중요하지 않다는 생각이 들었다. 눈앞의 아들과 손잡은 연인에게만 정하의 진심이 전해지면 되는 거였다. 그래서 그 짧은 대사 안에 진심을 늦게 털어놓는 미안함과 두 사람에 대한 사랑을 가득 담았다.

류경수 그런데 진우는 방금 엄마의 암 사실을 알게 돼 충격이 큰 상태에서 커밍아웃 이야기까지 들으니 완전히 넋이 나간다. 그 와중에도 장인어른이 엄마를 이상하다며 욕하자 바로 맞받아친다. 그동안 잘 보이려고 참았던 진우가 차마 거기까지는 참지 못한 거다. 진우에게 가장 소중한 사람은 엄마니까.

우리의 고개는 빛을 향하여

- 두분은 고민을 남에게 털어놓는 쪽인가, 속으로 삭이는 쪽인가.

장영남 가족한테는 속얘기를 잘 못한다. 특히 엄마.

류경수 마찬가지다. 무조건 내 편이라는 걸 아는데 그래서 더 말 꺼내기 힘든 부분이 있다.

- 정하의 마지막 장면은 배우도, 감독도 희망을 말하고 있음이 분명해 보였다. 어떻게 마무리하고 싶었나.

장영남 쉽지 않았다. 원래 정하가 노래를 부르기로 되어 있었는데, 내가 노래에는 자신이 좀 없어서…. (웃음) 이 장면에서 정하의 태도는 명확했다. 숨지 않겠다. 그 다짐을 보여주고 싶었다. 정하가 그렇게 변할 수 있었던 건 진우 덕분이다. 아들이 적어도 70% 이상은 자신을 받아들여줬다고 믿으니까. 앞으로도 정하는 그 힘으로 나아갈 것이다.

- 그렇다면 진우의 미래는 어떨까.

류경수 어찌 됐든 요리는 계속할 것 같다. 설마 여기까지 와서 “엄마, 나 어학원 다시 갈래”라고 할까! 무엇보다 이제는 멋있는 모습을 보여줘야 하는 아내가 곁에 있으니, 이번엔 끝까지 갈 거다.

- 남은 하반기 계획과 차기작은.

장영남 내년에 공개될 드라마 한편을 얼마 전에 마쳤고, 지금은 새 작품에 들어갔다.

류경수 연극 <디 이펙트>가 이번 주말이면 막을 내린다. 이제 새로운 살길을 찾아야 하는데, 어떻게 해야 할지….

장영남 경수가 뭐가 걱정이야. 공연 오래 했으니 그동안 일 열심히 했고, 연기도 얼마나 몰입감 있게 잘해.

류경수 (장영남 배우쪽으로 몸을 틀며) 선배님, 제가 꼭 말씀드리고 싶었던 게 있어요. 제가 중고등학생 때 연기하고 싶어서 공부 시작했을 당시 장진 감독님 영화를 정말 많이 봤거든요. <박수칠 때 떠나라> <거룩한 계보> 같은 작품에서 선배님의 연기를 볼 때마다 감탄했어요. 그래서 이번 작업이 영광이었고 많이 배웠습니다.

장영남 경수가 시크한데 또 이렇게 귀엽다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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