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년 넘게 ‘종잇밥’만 먹은 고지식한 인물 만수는 모든 것을 이뤘다고 생각한 순간 평생을 바친 직장에서 해고되고, 살인을 결심한다. 합리적인 대안 대신 이상한 계획에 집착하는 이 애처로운 실직 가장의 행동은 평범하지 않지만 볼수록 납득이 된다. <어쩔수가없다>가 형성하는 설득력의 상당 부분은 배우 이병헌의 공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관객의 반응에 세심하게 신경 쓰는 모습을 보여준 이병헌은 박찬욱 감독과의 세 번째 작업에 대해 즐거운 낯빛으로 한마디 한마디 신중하게 답했다.
- 프리미어 상영 후 반응은 어떤 것 같나.
듣기로는 우리가 본 상영보다 오전 언론시사에서 훨씬 더 웃음이 많이 나왔던 걸로 안다.
- 처음엔 코미디로 받아들여 웃음이 나오다가 나중에 진지한 분위기로 전환될 때 다들 약간 뒤통수를 맞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아무래도 한국에서만 알고 있는 어떤 이야기나 유머들이 있어서 이게 통할까 궁금했던 지점들이 있었다. 그런데 어제 관계자한테 물어봤더니 “우리가 한국인 같은 향수를 느끼지는 못하지만, 그 음악의 정서는 우리도 어느 정도 느꼈기 때문에 차이는 크지 않다고 본다”라고 말하더라. 내가 작중 선출(박희순)에게 계속 비엔나소시지 같은 걸 주는 장면이 있는데, 나중에는 분홍 소시지를 강제로 밀어넣는 순간으로 전환된다. 이게 뭔지 알까, 소시지 말고 다른 걸로 생각하면 안 될 텐데 하는 걱정을 했다.
- 기자회견에서 만수에 대해 ‘일반적인 가장의 모습’이라고 표현했다. 그런데 그가 하는 선택은 일반적이지 않다. 면접장에서 자신을 ‘블루칼라’라고 생각한다는 얘기도 하는데, 실제로 살고 있는 삶은 부르주아적이다.
만수가 거짓을 이야기하고 있다고 생각하진 않는다. 그게 포인트라고 감독님도 말했다. 이 영화는 주인공이 처절하게 밑바닥으로 떨어진 상태에서 진짜 먹을 것도 없는, 누가 봐도 저 사람이 저렇게 할 수밖에 없다고 생각하는 그런 지경에 있는 사람이 살인까지 저지르는 게 아니다. 다른 사람들이 보기에는 만수가 처한 어려움은 정말 절대적인 어려움인가 싶어지는, 바로 그 부분이 포인트다.
- 만수는 영화가 전개되면 될수록 경쟁자의 말을 따라 한다거나 공감대를 형성한다거나 하면서 다른 인물들과 계속 겹쳐 보인다.
그건 철저히 감독님의 의도다. 구범모(이성민)도, 고시조(차승원)도, 최선출도 다 만수가 자신을 보는 것 같은 거울의 느낌을 주려고 했다. 보면 헤어스타일이나 머릿결, 의상도 조금씩 비슷하고 아날로그 인간인 것도 비슷하다. 너무 스스로를 보는 것 같은 느낌을 줘서 죽이는 순간에 더 갈등이 생기고 힘들어지는 그런 효과를 생각한 것 같다. 영혼이 계속 깎여나간다는 의미에선 일종의 자살인 셈이다.
- 대본에는 없었지만 본인이 제안해서 들어가게 된 장면이나 디테일이 있나.
아라(염혜란), 범모와 싸울 때 총을 잡으려다가 툭 튕겨나와서 가구 밑으로 들어가는 장면. 거기서 같이 모여서 누가 먼저 총을 찾는지 스릴 넘치게 만들자고 해서 박찬욱 감독이 재미있어했다. 옛날에는 아이디어를 말해도 적용이 잘 안됐는데 이번에는 무슨 얘기만 하면 ‘야 그거 재밌겠다, 해보자’라고 계속 얘기를 하더라. 그래서 처음에는 내가 성장했다고 생각했는데, 나중에는 약간 불안해지기 시작했다. 여기에 대한 책임을 내가 져야 할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이 생기면서 아이디어를 많이 안 냈다. (웃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