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려한 게스트 목록과 새로 신설된 경쟁부문까지, 올해 부산국제영화제의 확연한 변화는 정한석 신임 집행위원장의 집요한 행정 아래 굴러간다. 한국영화 담당 프로그래머로 6년간 뚝심 있는 선정을 이어온 그는 올해 한국영화 프로그래밍 실무까지 겸업하며 사실상 최장수 한국영화 프로그래머에서 집행위원장으로 거듭났다. 30년 조직의 관성을 깨고 새로운 동력을 만들어내려는 의지가 영화제 전반에 스민 가운데, 정 집행위원장은 관객과 축제를 위한 실용주의적 선택, 그리고 아시아 창작자들을 위한 대형 플랫폼으로서의 도약을 역설했다.
- 여느 때보다 풍성한 게스트 명단과 상영·행사 소식에 부산국제영화제가 올해 마지막이 아니냐는 SNS 반응이 퍼질 정도였다. 내부에선 어떻게 감지하고 있나.
감사한 일이다. 영화제 일은 저절로 되는 게 없다. 프로그래머로 6년 일하다 집행위원장이 되면서 많은 것을 바꾸려 노력했다. 프로그래머들의 업무 체계, 태도와 철학의 문제까지 강도 높게 수정과 보완을 요청했다. 사소하게는 회의 방식부터 섭외 일정까지 전부 달라졌다. 그 과정은 껄끄럽고 힘들었지만, 덕분에 목표한 결과를 낼 수 있었다. 이번에 보내주신 반응을 통해 부산국제영화제에 대한 관객들의 바람이 높다는 것도 더욱 실감했다. 앞으로도 개선해야 할 부분이 많다. 현상 유지에 안주하기 시작하면 영화제란 조금씩 나빠질 수밖에 없다. 올해가 30회라서 반짝한 것이 아니라, 지금과 같은 수준을 내년, 내후년에도 유지하는 것이 목표다. 사무국 워크숍에서 영화제 스태프들에게 “내년에도 올해가 마지막인 것처럼 하겠다”고 말했다. 다들 기함했지만. (웃음)
- 2023년부터 2년간 집행위원장 공석으로 영화제를 치렀다. 30회에 맞춰 대규모 행사를 준비해야 할 올해 신임 집행위원장이 된 개인적인 소회를 들려준다면.
위원장 선임 공모가 세 차례나 무산됐을 때도 내가 지원해야겠다는 생각은 안 했다. 그러다 네 번째 공모에 이르러 비교적 짧은 시간 안에 결정했다. 더 이상 관망하는 건 방법이 아니라고 판단했다. 영화제 일은 밖에서 보면 간단해 보이지만 들여다보면 복잡한 논리가 얽혀 있다. 외부 인사가 오면 최소 6개월은 익혀야 하는데 우리에겐 그럴 시간이 많지 않았다. 그 점에 있어서만큼은 누구보다 잘해야 했고, 자신도 있었다. 6년 동안 집행위원장이 되겠다는 생각은 단 한번도 해보지 않았지만 막상 지원한 이후로는 해보고 싶은 일이 너무 많다. 말하자면 나는 집행위원장이 되고 싶어서 지원한 게 아니라 집행위원장의 ‘일’을 해보고 싶어서 지원했다.
- 올해는 한국영화 프로그래밍을 겸업했지만 내년부터 새 한국영화 프로그래머 채용 계획은 어떻게 되나.
내년에도 똑같은 방식을 취해야 할 이유는 없다. 영화제 정관이 요구하는 프로그래머 채용 방식과 시기의 문제 등이 맞물려 올해는 한국영화 프로그래머를 채용하지 못했지만 내년에는 한국은 물론 기타 해외 권역도 채용을 진행할 수도 있다.
- 올해 영화제의 변화 중 단연 역점은 경쟁부문의 신설이다. 14편 라인업 선정의 방향성에 대해 들려달라.
경쟁 작품 14편을 뽑을 때는 제반 조건을 지나치게 복잡하게 생각하지 않았다. 해당 작품이 아시아영화의 수작으로서 충분한 면모를 지녔는지에 집중했다. 결과적으로 올해 4편을 제외하고는 모두 월드프리미어로 가져오게 됐다. 칸, 베니스, 로카르노 등의 영화제에서 출품 및 수상한 영화들이 있는데, 그 영화제에 갔기 때문에 초청한 것이 아니라 우리와 같은 안목으로 앞선 시기에 열리는 영화제들이 먼저 가져간 것이라 생각한다. 앞으로 경쟁 섹션의 영화들은 부산의 발굴과 발견이라는 차원에서 의미를 보여줄 것이다. 후발 주자로서 우리에게 필요한 미덕은 패기다. 아시아영화의 미학을 보여줄 수 있는 도화선이 되었으면 한다. 용기와 패기만 앞세우면 투박해질 수 있으니 예리한 안목으로 선정작을 초청하겠다.
- 경쟁부문 신설의 필요를 실감한 배경은.
나는 경쟁 영화제로의 ‘전환’이라는 표현보다 ‘신설’이라는 표현을 선호한다. 부산국제영화제는 기본 구조상 전면적인 경쟁 영화제를 지향할 수도 없고 바라는 바도 아니다. 이번 신설을 통해 도모하고자 하는 특정한 역할이 있다. 영화제가 30년간 대표 섹션으로 여겨온 뉴커런츠(신인감독 데뷔 섹션)와 지석(중견 감독의 신작 섹션)의 분리 운영이 실효성을 놓고 많은 고민을 낳았다. 신인과 기성·거장 감독을 분리하기보다는 이들 작품의 상호작용을 도모하는 대형 플랫폼을 만드는 것이 필요하다고 판단했다. 한국영화 프로그래머 시절의 경험들이 바탕이 됐다. 예를 들어 2022년 뉴커런츠 수상작인 이정홍 감독의 <괴인>은 국내 평자들과 주요 매체의 일관된 지지를 받았지만 해외 영화제의 주목도 면에서 아쉬움이 남았다. 지금과 같이 경쟁 섹션의 영향력이 더해졌다면 같은 작품이 해외에서 더 많은 이목을 끌었으리라 생각해보게 하는 여러 사례들이 <괴인> 외에도 있다. 즉 경쟁 섹션은 기존의 뉴커런츠가 수행하고자 했던 신인 발굴의 효과를 극대화할 수 있는 체계가 될 수 있다. 아시아 및 국내에서 공인된 감독들이 부산국제영화제 경쟁부문을 통해 보다 확장된 가치를 얻는다면, 역으로 해외 각국의 많은 감독들이 부산을 더 궁금해하고 찾는 기회도 늘어날 거라고 본다.
- 나홍진·코고나다·마르지예 메쉬키니 감독, 배우 양가휘·난디타 다스·한효주, 프로듀서인 율리아 에비나 바하라까지 경쟁 심사위원단의 구성이 다채롭다. 섭외 과정에서 공들인 부분이 있다면.
마음에 드는 심사위원 라인업이 결정되기 전까지는 절대 발표하지 않는다는 원칙을 세웠다. 우리가 보기에 ‘정말 좋다’고 느껴질 때까지 한분 한분 초청했다. 출신 국가, 전문 분야, 작품의 패기와 용기를 알아볼 안목 등 여러 면모를 셈하고 고려해서 결정한 것이다. 과거 뉴커런츠 섹션 시절에 심사위원은 5명이었다. 영화제 운영 면에선 심사위원이 2명 늘어나는 것이 큰 차이다. 그럼에도 사무국의 고생을 감수하면서 더 넓고 새로운 논의 구조를 만들고자 했다.
이 프로그램은 놓치지 말 것!
- 특별기획 프로그램이 5개(아시아영화의 결정적 순간들 / 마르코 벨로키오, 주먹의 영화 / 줄리엣 비노쉬, 움직이는 감정 / 우리들의 작은 역사, 미래를 부탁해! / 까르뜨 블랑슈), 마스터 클래스가 5개(자파르 파나히 / 마이클 만 / 세르게이 로즈니차 / 마르코 벨로키오 / 줄리엣 비노쉬)로 확연히 수가 늘어난 점도 눈에 띈다.
특별기획 프로그램은 보통 3개였는데, 전체 편수의 밸런스를 보며 배치를 새롭게 했다. 그 과정에서 편수는 조금 줄이더라도 프로그램 개수를 늘릴 수 있는 방법을 찾았다. 그렇게 5개를 만들었고, 각각 다른 성격을 보여주도록 기획했다. 마스터 클래스는 게스트가 많아지면서 자연스럽게 폭이 넓어졌다. 지난해에는 3개, 지지난해에는 1개였는데 너무 적다고 생각했다. 앞으로도 지금 정도의 특별기획 프로그램과 마스터 클래스는 최대한 유지하고 싶다.
- ‘아시아영화의 결정적 순간들’은 특히 올해 30주년의 의미와 어울리는 기획이다.
아시아영화의 흐름을 재조명하고 그 영화사적 가치를 체계적으로 정리하는 ‘아시아영화 100’의 세 번째 국면(2015년 최고의 아시아영화, 2021년 최고의 아시아여성영화)이다. 고 김지석 수석 프로그래머가 아시아영화의 역사적 성과를 기록해보자는 뜻에서 시작했다. 이번에는 1996년 이후 작품 중 10편을 택했는데, 관객이 영화인과 만날 수 있도록 만든다는 데 방점을 두고 게스트 참석 여부에 실용적으로 주목했다. 감독이나 배우가 참석 가능한 작품을 우선적으로 선정해 이창동, 두기봉, 지아장커 감독 등이 찾는다.
- 게스트 초청에 상당한 예산이 필요했을 것으로 보인다. 올해 재원 확보는 어떻게 했나.
재원 확보는 전적으로 박광수 이사장이 지휘하고 있다. 또한 모든 업무 면에서도 이사장의 전폭적인 지원을 받고 있다. 초청은, 박광수 이사장이 특별히 마련한 초청 펀드에도 크게 힘입었고, 30회를 기념한 부산시의 지원도 좋았다. 최근 몇년의 기록을 톺아볼 때 올해가 협찬도 가장 풍성하다. 그렇다고 빅 게스트 초청이 재정만으로 해결되는 문제는 아니다. 예산이 훨씬 여유롭지만 우리만큼 게스트를 부르지 못하는 영화제도 많다. 중요한 것은 영화제가 쌓아온 신뢰다.
- <케이팝 데몬 헌터스> 싱어롱은 화제와 함께 의외라는 반응도 많았다. 어떤 필요나 트렌드를 느꼈는지.
넷플릭스에서 먼저 제안이 왔다. 집행위원장으로서 OTT가 가진 긍정적인 흐름을 외면할 필요가 없다는 입장이다. 올해 게스트 중 한명인 기예르모 델 토로도 넷플릭스 작품 <프랑켄슈타인>으로 온다. 영화제가 OTT를 외면한다고 극장 영화가 살아나는 게 아니다. 앞으로도 국내외 OTT와 긴장된 동반자 관계를 유지하면서 관객에게 극장에서 즐기는 특별한 경험을 제공하고 싶다. 다만, 영화제의 수용과 OTT가 영화계와 충돌하는 정책적·제도적 문제는 별개로 다뤄져야 한다. 얼마 전 문화체육관광부에서 영화계 간담회를 연 적 있다. 지금 한국 영화제의 역량이 크게 두 가지라는 제안을 했다. 첫 번째로 정부가 바라는 K컬처 육성에 있어 영화제만큼 효과적인 문화사업은 많지 않다, 국가적 차원에서 이 가치를 명확히 인지하고 끌어안아달라는 것이다. 국비 문제와 연관이 깊은데 현재 부산국제영화제 예산 중 국비가 채 5%가 되지 않는다. 주요 대륙의 이른바 메이저 영화제들과는 굉장히 격차가 크다. 두 번째는 한국영화 위기론이 만연한 가운데 극장으로 관객을 불러모아야 한다고 하는데, 그런 맥락에서도 영화제의 역할이 있지 않겠냐는 것이다. 한편 한편의 개별 영화들이 전선에서 싸우는 것도 중요하겠지만 영화제 차원에서 대중에게 긍정적인 극장 경험을 남기는 것. 현시점에서 영화제의 중요한 역할이다.
- 영화 애호가들을 위해 보다 집중한 프로그램이 있다면.
알렉산드레 코베리제 감독이 동생이자 음악가인 조르지 코베리제와 클래스를 연다. 축제의 화려함 속에서도 영화 애호가들이 듣고 싶어 하는 강연은 무엇일까를 고민하면서 직접 기획한 것이 씨네 클래스다. 작은 규모의 마스터 클래스라고 봐주시면 좋겠다. 코베리제 형제를 비롯해 총 4개의 씨네 클래스가 열린다. 대중의 축제이자 애호가들이 취향의 특권을 최대한 누리고 갈 수 있는 곳이라는 양극단의 성질이 영화제에 공존하길 바란다.
- 영화제 시기가 9월 중순으로 이례적으로 앞당겨졌다. 이후로도 개최 일자 변경 가능성이 있는지.
올해는 전국체육대회와 추석 연휴로 일정을 조정했는데 휴일이 없다는 아쉬움도 있다. 그럼에도 상영작과 초청 게스트에 대한 반응이 좋아 평일에도 관객들이 많이 찾아주실 것으로 기대한다. 내년에는 10월 초로 돌아가야 할 것 같다.
- 종합하자면, 예술성과 대중성, 그리고 지역축제를 위한 힘의 안배에 있어 올해 영화제가 어떤 밑그림을 보여주기를 바라나.
먼저 지역 축제로서의 기능에 대해 말하자면, ‘동네방네 비프’를 지난해 9개소에서 올해 15개소로 늘렸다. 부산 시민들이 곳곳에서 영화제 분위기를 느끼고 게스트도 만날 수 있도록 했다. 부산 지역 오피니언 리더들의 민원을 귀담아듣지 않는다는 지적이 있어 더 많이 만나고 있기도 하다. 대다수의 관객들은 영화제에서만 만날 수 있는 다채로운 게스트를 기다린다. 이 부분은 이미 발표된 올해의 라인업으로 결과로 보여줬다고 생각한다. 시네필들을 위해서는 아이콘 섹션을 대폭 확대했다. 지난해 17편에서 33편으로 두배 가까이 늘렸다. 이 섹션은 월드프리미어 여부를 전혀 고려하지 않았다. 지금 한국, 아시아의 시네필들이 자신이 속한 지역에서 빨리 찾아보고 싶어 할 만한 영화를 가능한 한 풍성하게 보여주는 것이 목표였다. 이는 경쟁부문도 마찬가지다. 지금의 시네필들에게 이렇게 제안하고 싶다. 많이 와서 경쟁부문을 봐주시고, 장단점을 논평해주시면 그것이 곧 이 영화제의 거름이자 성장이 될 것이라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