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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경원 편집장의 오프닝] 순애(純愛), 어쩔수가없다.
송경원 2025-09-05

“무례하긴. 순애(純愛)야.” 2021년 <극장판 주술회전 0>의 주인공 옷코츠 유타의 시그니처 멘트는 오타쿠와 일반인을 구별하는 테스트 질문이다. 놀라운 재능을 지닌 특급 주술사 후보 유타는 어린 시절 사망한 소꿉친구이자 저주의 여왕이 된 리타에게 속박의 말을 건다. 좋아하니까 영원히 곁에서 힘을 빌려달라는 순정남의 고백. 극장 안엔 삽시간에 소름이 퍼진다. 다만 같은 소름처럼 보여도 이유는 제각각인데, 팬이라면 응당 ‘머리를 올렸더니 미남자’라는 공식에 충실한 유타의 활약에 환호하며 대사의 맛을 음미할 것이다. 반대로 일반인들은 낯간지러운 대사의 민망함에 오그라들지도 모르겠다. 순애에 열광하는 오타쿠와 무례에 더 공감할 일반인 사이의 두꺼운 벽이 완전히 사라지는 데 놀랍게도 4년이 채 걸리지 않았다.

2021년 <극장판 귀멸의 칼날: 무한열차편>이 200만 관객을 돌파했을 때만 해도 단발성 신드롬에 가깝다고 여겼다. 일본에서부터 워낙 흥행작이라 기세가 심상치 않았고 압도적인 작화는 문외한이 봐도 감탄할 수밖에 없는 수준이었다. 무엇보다 2010년 이후 여러 경로를 통해 일본 애니메이션의 저변이 친숙해진 환경의 몫도 상당했다. 2025년 <극장판 귀멸의 칼날: 무한성편>의 폭발적인 반응을 보며 무릎을 꿇는다. 내 식견이 짧았다. 너무 친숙하면 외려 안 보이는 것들이 있는데, 나 역시 은연중에 오타쿠와 일반인은 다르다고 선을 긋고 있었나 보다. 재미있는 작품에는 이유와 배경, 설명을 보탤 필요가 없다. 누구라도 좋아하고 즐기는게 당연한 공감의 장이 열린다. 이 작품도 그렇다.

<귀멸의 칼날>의 작화와 액션이야 이미 진즉에 한계선을 돌파했다. 솔직히 원작을 포함하여 <귀멸의 칼날>의 서사는 빈말로도 깊이 있거나 복합적이라고 하기 어렵다. ‘평범한 재료를 가지고 최상의 맛을 낸 사례’라는 세간의 평에 완전 동의한다. 정말 놀란 건 지금 염주 렌코쿠와 상현3 아카자 팬들이 나뉘어서 서로 논쟁을 벌이는 상황이다. (내 멋대로 기준) <귀멸의 칼날>은 최고의 ‘캐릭터 세탁물’ 중 하나다. 캐릭터를 사랑할 수밖에 없도록 만든 후 죽여버리거나, 빌런에게도 정성껏 사연을 부여해 공감할 수밖에 없도록 부추긴다. 왜 그럴 수밖에 없었는지 설명하고 납득시키는 기술은 급기야 나의 영웅을 죽인 적마저 용서하게 만드는 마술의 경지에 이르렀다. 아카자( 窩座: 거세당해 고분하게 앉아 있는 개)가 원래 하쿠지( 治: 지키는 존재)였음을 깨달을 때 눈물샘 버튼이 눌리는 건 당연한 일이다.

본래 신파의 본질은 세탁이다. 캐릭터로 사연의 거품을 낸 뒤 관객의 눈물로 응어리를 씻어낸다. 우리가 사랑에 빠지는 작품들은 결국 보는 이의 마음속 묵은 때까지 함께 씻어준다. 그런 의미에서 무언가에 빠지고 집착하는 순간을 늘 색다른 방식으로 그려낸 박찬욱 감독의 필모그래피는 영화를 향한 순애(純愛)의 기록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 순애는 늘 어딘가 기묘하게 비틀리고 어긋나 있으면서도 평범한 사람들을 울리는 마력을 발산한다. 제82회 베니스국제영화제에서 벌써부터 심상치 않은 소식이 들려온다. 박찬욱 감독의 신작 <어쩔수가없다>가 열광적인 호평에 힘입어 이미 해외 선판매만으로 손익분기를 넘겼다는 소식을 듣자니, 박찬욱 영화와 함께했던 애착 형성의 기억들이 주마등처럼 스친다. 당분간은 어쩔 수가 없다. 멀리서 들려오는 풍문으로 호기심의 허기를 채울 수밖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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