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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경원 편집장의 오프닝] 모든 형태의 사랑
송경원 2025-08-15

이별을 했다. 오랜만에 밤을 새며 <이터널 선샤인>을 다시 꺼내 봤다. 어떤 영화를 제일 좋아하는지 고를 순 없지만 어떤 영화를 여러 번 봤는지 묻는다면 몇편 꼽을 수 있다. 내겐 <이터널 선샤인>이 그중 한편이다. 오랜만에 만난 친구처럼 익숙하면서도 고사이 살짝 낯설어진 영화는 주로 혼자 밤을 지새워야 할 일이 생길 때마다 내 좁은 방문을 두드린다. 이미 아는 내용, 정해진 운명이지만볼 때마다 미묘하게 새로운 기억이 덧씌워지는 기분이라 늘 반갑고 포근하다. 계속 손이 간다. 아마도 그게 내 사랑의 방식이었던 것 같다. 여러 번, 자주, 반복해서 만나는 것. 횟수에서 오는 애정. 함께해온 시간이 내겐 곧 사랑의 증거였다.

때문에 자주 만나지 못하는 이들에 대해 늘 마음의 빚이 있다. 내가 가진 마음의 크기는 그게 아닌데, 함께 시간을 보내는 행동으로 이어지지 못할 때 미안해진다. 솔직히 그건 상대에 대한 미안함이라기보다는 내 안에 피어난 자책의 무게일 것이다. 스스로 키워낸 죄책감이란 게 참 신기한 것이 마음의 언덕 위에서 눈덩이를 굴리듯, 가만히 두면 걷잡을 수 없이 부풀어 오른다. 감당하기 힘들어진 무게에 며칠 밤을 지새우다 얼마 전 뜻밖의 위로를 받았다. 경험상 위로는 예상치 못한 순간 뜻밖의 선물처럼 찾아올 때가 많은데 이번에도 여지없이 그랬다. 소소한 대화 중에 제일 좋아하는 영화가 뭐냐는 질문이 나오자 그분은 한참 고민하더니 <이터널 선샤인>이라며 정말 소중한 물건의 포장을 풀 듯 말했다. “그래서 아껴뒀다가, 몇년에 한번 꺼내 봐요.”

그 순간 어두운 방에 불이 켜지는 것처럼 머릿속 전구가 탁 켜졌다. 맞다. 그럴 수 있다. 너무 소중해서, 행여 손상될까 아껴두는 마음도 있다. 그것도 사랑이다. 사랑이란 ‘상태’는 동일해도 ‘형태’는 각양각색이라는, 이 당연한 사실을 뒤늦게 깨닫는다. 동시에 마음속 어딘가 얼어붙었던 죄책감이 조금은 녹아내리는 기분이 들었다. 온전히 나의 형태로 표현되지 않았을지라도 상대에겐 다른 방식으로 전달되지 않았을까 하는 막연한 기대를 품는다. <이터널 선샤인>을 좋아하는 이유는 사랑의 기쁨과 아픔이 동전의 양면처럼 분리될 수 없는 것이라는 잔인한 사실에 기반하기 때문이다. 아프고 쓰라린 기억만 도려내는 건 불가능하다. 그래서 좋아하는게 아니라 그럼에도 좋아할 수밖에 없는 상태야말로 사랑의 필요조건이다.

때로 어떤 사랑은 선택의 문제조차 아니다. 태어나면서부터 주어진 운명 앞에서 우리는 무엇을 어떻게 기억해야 할까. 알 수 없는 것투성이일 때, 나는 영화를 본다. 영화가 말을 걸어오면 종종 내가 잊어버리고 있던 기억들이 복원된다. 아마 나는 앞으로도 지나간 사랑을 놓아주지 못할 때, 사랑이란 시련 앞에 막막해질 때, 사랑이란 모험 앞에 두려워질 때마다 이 영화를 꺼내 보게 될 것같다. 그리고 조엘(짐 캐리)과 클레멘타인(케이트 윈슬럿)이 복도에서 대화를 나누는 이 장면을 되새길 것이다. “나는 그쪽 모든 게 마음에 들어요.” “알아요. 곧 거슬려할 테고 나는 당신을 지루해할 거예요.” 대수롭지 않은 듯한 조엘의 답변. “It’s Ok.” 한동안 조엘의 눈동자를 바라보던 클레멘타인은 표정이 감정을 따라오기도 전에, 미간의 주름을 지우지도 못한 채 내뱉는다. “Ok.” 오늘, 이 지면에, 모든 관계에 부칠 사랑의 주문을 남긴다. “It’s O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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