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랭 기로디 감독의 <미세리코르디아>가 제빵사의 장례식에서 이어진 그 아들의 실종-살인 사건과 이방인 제레미를 둘러싼 치정을 여러 인물이 어떻게 바라보는지를 보여준다면, 장병기 감독의 <여름이 지나가면>은 먼저 세상을 조금 더 알아버린 한 소년이 그 여름의 진실을 뒤늦게 깨닫게 될 다른 소년의 등장과 퇴장을 지켜보는 영화다. 두 영화의 공통점은 앎과 모름 사이에서 파생되는 신경증적 긴장과 아연함이며, 떠남을 지켜보는 어린 두 형제에게 남은 아릿한 슬픔이다. 앎과 모름은 무지의 단순한 경계 안팎이 아니라 자기 삶을 등에 업고 보이는 것만을 볼 수 있는 파편적 실체, 아무래도 저편에서 바라볼 수 없는 진실의 비가역성을 드러낸다. 시학에서 비극의 요소는 공포와 애련을 불러온다고 했던가. 앎의 격차는 삶에서도, 서사에서도 비극을 야기한다. 신은 영웅의 운명을 알지만 영웅은 그 앞날을 알지 못한다. 우리는 알지만 그들은 모른다. 당신은 아는 이야기를 나는 여전히 모른다. 잘려나간 진실의 단면만을 보는 이는 그보다 더 알고 있는 이를 때로 애태우고 목마르게 한다.
제레미는 떠나온 마을을 다시 찾는다. 오래전 사랑했었고 한번도 잊은 적 없던 마을 제빵사 장피에르의 장례식에 참석하기 위해서다. 제빵사의 아들 뱅상은 제레미가 자기 어머니 마르틴과 자고 싶어 한다는 추잡한 망상에 편집증적으로 매달린다. 제빵사의 죽음과 제레미의 등장에 침묵을 지키던 마을 사람들은 뱅상의 실종 이후 마르틴의 식탁에 모여 각자 하고픈 말을 쏟아낸다. 뱅상의 아내 아니는 사라진 남편이 평소 얼마나 무책임했는지 또 남편을 향한 마을 사람들의 인심이 어땠는지 불평하고, 마르틴은 아들의 행방을 궁금해하면서도 제레미가 지난밤을 어디서 누구와 보냈는지에 더 관심을 보인다. 말을 하면 할수록 실종-살인이라는 사안의 실체에 이들이 얼마나 무관심한지가 드러날 뿐이다.그중 왈테르의 입지는 눈에 띈다. 그는 주로 과거를 회상하고 어린 시절의 기억을 견주어 확인해본다. 어린 시절 친구인 제레미를 내치지 않으면서 경계를 늦추지 않는다. 제레미가 거짓 증언으로 사람들을 속이고 다닐 때 적극적으로 추궁하는 이는 왈테르가 유일하다. 그렇다고 해서 이 점이 그를 사안의 실체에 다가서고자 하는 인물로 만드는 것은 아니다. 왈테르는 제레미가 어떤 연유로 자신을 유혹하려고 한 건지, 왜 사람들에게 뱅상과 자신이 서로를 질투한다고 말하고 다니는지 따위에 집착한다. 진실, 말하자면 사안의 실체에 다가설 수 없도록 막아서는 것은 ‘욕망을 일으켜라, 사랑이 죄를 데려올지라도’(<씨네21> 1515호, 남다은의 리코더 ‘욕망을 일으켜라, 사랑이 죄를 데려올지라도’ )에서 말해진 바와 유사하게 욕망, 성애에의 애욕이다. 애욕에의 집착은 시체의 발견을 막아선다.
한편 제레미는 그 이름도 신성한 어머니(마르틴)와 사제(필리프)의 사랑과 비호 아래에 있다. 그가 둘 모두를 원한 적 없는 이유는 ‘친구의 어머니를, 종교에 귀속한 자를 욕망하지 않는다’는 인간 보편 금기가 작동했기 때문이다. 제레미의 경우, 도덕 위에 세워진 금기로 인해 두 사람이 자신을 원한다는 사실을 알아채지 못한다. 수사를 진행하는 경찰 역시 진실을 수호하는 자가 아닌 의심을 신봉하는 자에 가깝다. 모두의 시선 아래에 하나의 진실로 귀결되지 못하는 사건을 지켜보자니 우리 또한 그들의 처지에 놓이는 순간이 온다. 마르틴은 정말로 경찰에게 열쇠를 건넸을까? 마르틴은 긍정도, 부정도 하지 않으며 영화는 어떤 대답도 하지 않음으로써 제레미의 의심에서 뿌리내린 진실의 파편을 마주하게 된다. <미세리코르디아>는 금기와 욕망이 가로막을 때 인간 본성은 과연 진실을 보려 할 수 있는지를 묻는다. 숲을 뒤흔드는 돌풍처럼 이 마을에는 성애에 눈먼 애욕의 바람이 분다. 알랭 기로디는 다시 한번 살인과 성애를 같은 장소에 놓는다. 두 욕망 사이를 오가는 제레미는 필리프와의 마지막을 묘지에서, 마르틴과의 마지막을 침실에서 장식한다. 마르틴과 굳게 잡은 두손은 금기의 욕망을 마침내 깨닫고 이용하기로 한 자의 손길이다. 도덕 위에 금기가, 금기 위에는 욕망이, 욕망 위에 기만이 놓인다. 그리고 저 아래 가장 깊은 곳에는 시체가 파묻혀 있다.
<미세리코르디아>에서 진실을 파편화하는 것이 욕망이라면 <여름이 지나가면>에서 진실을 깨닫는 순서를 만들어내는 것은 이미 구조화된 배타와 낙인의 시선이다. 그간 앎과 모름의 격차는 어쩌면 서사 속 인물과 관객만큼, 신과 인간만큼 멀어야 한다고 여겨왔던 것일까. <여름이 지나가면>이 남기는 씁쓸함과 잔잔한 충격은 사회구조를 향한 단편적 인지의 차이를 또래 소년에게 대입함에서 온다. 기준(이재준)은 지역에 새로 이사 온 전학생이다. 같은 반 영준(최우록)과 그의 형 영문(최현진)은 이상하거나 위협적인 존재로 각인되지만 부모가 없는 형제의 분방한 생활과 태도에 기준은 금세 이끌린다. 영문을 모방하고 싶어 하는 이유를 알지 못한 채로 말투를 남몰래 따라 하고 위계 놀이에 가담하는 기준의 마음을 영문은 내심 알고 있다. 그는 기준의 엄마(고서희)가 아들과 어울리지 말아 달라는 부탁에 앞서 정확하게 상대가 듣고자 하는 말과 아닌 말을 번갈아 내던질 수도 있는, 타의에 의해 조숙해질 수밖에 없던 소년이기 때문이다. 영문은 어느 순간부터 사람들이 자기를 보는 시선을 복제해 자신을 만들어나간 아이와 같다.
기준의 엄마가 형제를 보는 시선은 다소 복합적이다. 사연을 모를 땐 이해하기 위해 인내심을 발휘하다가 측은하게 여기기도 하고 기준을 망치는 주범으로 영문을 몰아세우기도 한다. 영준의 담임 선생님은 지역 토박이 어른들이 형제를 향해 보이는 태도와 크게 다를 바 없다. 형제를 향한 배타성은 내내 무심함으로 가장되었다가 체육대회 날 반장 석호와의 대화에서 형제를 다른 아이들과 다르게 구분 짓는다(“어쩌겠어? 온다는 거 오지 말라고 할 수도 없고”). 기준의 엄마와 선생님이 복구한 폐쇄회로 영상을 함께 확인할 때 이들이 보아야 하는 온전한 사건의 진실은 화면에 없다. 거기에는 미처 복구하지 못해 불완전한 형체만이 있을 뿐이다. 흐릿하게 움직이는 세 아이들 중에서 마치 조실부모, 결손가정이라는 인식표가 붙어 있기라도 한 양 선생님은 영준을 지목하고 기준의 엄마는 그 답을 확신한다.
<여름이 지나가면>의 마지막 시퀀스에서 기준과 형제는 작별 인사를 나누지 못한다. 신호등 없는 도로에서 잠시 차를 멈춰 세운 건 기준의 엄마지만 기준은 차에서 내리지 않고 그대로 떠나버린다. 두 소년은 기준의 모습이 여름의 무더운 공기 아래 드러나길 기다렸다 미약한 실망을 내비친다. 이전에 영문은 알았고 기준은 몰랐던 사실, 즉 어른들이 수용하던 진실(“너희는 달라”)의 격차가 좁혀지는 순간이다. 세상의 일을 먼저 깨달았던 비련의 소년이 뒤돌아본다. 이번엔 소년에게 보이지 않는 진실이 우리에게 보인다. 영문은 그때 왜 버려진 듯한 기분이 들었는지 나중에라도 들여다보려 하지 않을지도 모른다. 세밀한 복기로 자기를 위로하는 대신 소년은 욕설을 내뱉고 아무 곳에나 발길질할 것이다. 그는 모르고 우리는 알고 있다. 슬퍼하는 법을 배우지 못한 소년의 슬픔은 지켜보는 우리 몫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