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책 다 읽고 나면, 선생님이 추천해준 책도 한권 읽기로 약속할 수 있어?” 학창 시절 자율학습 시간에 무협지를 읽다 걸릴 때마다 다짐을 강요당했다. 학교 앞 책대여점 최우수 고객이자 무협지와 장르소설 수십권을 빌려와 학교에 뿌리는 공급책 중 한명이었던 나는, 국어 선생님의 특별관리 명단에 오른 요주의 인물이기도 했다. 선생님의 지론은 무협지가 말초신경만 자극하는 나쁜 글이기 때문에 한번 읽고 나면 좋은 글로 상쇄시켜야 한다는 거였다. 당시 나는 그걸 당당하게 무협지를 읽어도 좋다는 암묵적인 합의로 멋대로 왜곡한 뒤 더욱 가열차게 무협의 세계에 빠져들었다. 한참 뒤에야 그때 읽었던 ‘나쁜 책’ 중 하나가 중국 문학의 신필 김용 작가의 사조 삼부곡(<사조영웅전> <신조협려> <의천도룡기>. 당시엔 <영웅문>이란 이름의 해적판으로 출간됐다)이었다는 걸 알았지만 별다른 감흥은 없었다. 그때도, 지금도 그 책들은 내게 그저 재미있는 이야기책일 따름이다.
선생님의 ‘좋은 책, 나쁜 책 이론’에 전부 동의할 순 없었지만 무엇을 우려하셨는지는 충분히 공감한다. 나도 2000년 초반 한창 유행했던 귀여니 작가의 인터넷소설을 보며 이모티콘 범벅의 글을 도저히 이해하기 어려웠던 적이 있었으니까. 당시 선생님이 이해하지 못하셨던 것처럼, 나 역시 지금 웹소설에 열광하는 독자들의 애정을 온전히 납득하긴 어렵다. 하지만 (여건과 상황이 허락한다면 가급적) 실천하려 노력 중인 유일한 신념이 있다면, ‘잘 모를수록 파보자’는 거다.
적어도 많은 사람들이 열광하는 대상에는 그럴 만한 이유가 있다고 믿는다. 낯설고 이해하기 어려운 것들이 있을 땐 그걸 밀어내는 것보다는 그들이 왜 좋아하는지를 알아보고 탐색하는 편이, 경험상 더 재미있는 일이 일어날 확률이 높다. 궁금함에 곁불 쬐듯 함께 보다 보면 때때로 자연스럽게 스며들어 좋아지는 경우도 있다. 어린 시절엔 (나를 걱정하고 사랑해준 분들 덕분에) 그걸 ‘나쁜 물이 든다’며 경계당하기도 했지만 지금은 기왕이면 다채로운 물이 드는 쪽이 알록달록 예쁘지 않을까 싶다. 얼룩과 무늬는 한끗 차이에 불과하고, 얼룩이 무늬가 되는 순간이야말로 대체로 히든 이벤트 발생 신호다.
그리하여 일본의 라이트노벨부터 한국 웹소설까지 두루두루 섭렵해온 지 어언 30년, 나는 여전히 이상한 나라에 떨어진 것 같다. 웹소설을 꽤 좋아하고 즐겨 읽는 편이지만 소재부터 수위까지, 이 세계엔 낯설고 받아들이기 힘든 미지의 영역이 넘쳐나는지라 아직도 메이저한 작품들만 겉핥기로 읽는 정도를 벗어나지 못했다. 문장형 제목에 익숙해지는데도 한참 시간이 필요했고, 갈등 없이 결론만 나열하는 양산형 회빙환(회귀·빙의·환생) 서사에 질릴 때도 있었다. 그럼에도 이제 탈출해야겠다 싶을 때면 귀신같이, 어딘가에서 새로운 소재와 기발한 돌파구가 마치 이벤트 미션처럼 등장해서 발목을 잡는다. 이번에 새롭게 등장한 이벤트는 웹소설의 영상화다. 웹소설 기반의 영상 콘텐츠가 본격적으로 쏟아져 나올 길목에서, 기대 반 우려 반으로 기다린다. 새로운 얼룩들이 형형색색의 무늬로 거듭나길 상상하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