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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장은, 어른의 긴장을 감각하는 일 – 국내 최초 개봉 소마이 신지 <이사>
김소미 2025-07-24

세모의 예각으로 마주 앉은 식탁에서 서로 눈 한번 마주치지 않는 부모 사이에 자리한 어린 딸이 보인다. 가족의 구도는 둥근 울타리가 아니라 뾰족한 삼각을 이룬 지 이미 오래다. <이사>의 시작점은 불가역적인 와해 이후인 것이다. 파국의 행로를 따르는 <이사>는 그러나 소마이 신지의 영화답게, 믿기지 않을 정도로 생명력이 넘치는 주인공 렌코(다바타 도모코)의 쨍쨍한 목소리로 가족 멜로드라마의 비애를 감싼다. “오히코시!” (이사를 뜻하는 일본어) 타이틀시퀀스도 아이의 날 선 외침과 함께다. 개성을 드러내는 렌코의 연둣빛 셔츠와 엄마 나즈나(사쿠라다 준코)의 빨간 블라우스, 실내에서도 거침없이 트래킹하는 카메라의 움직임까지 기세에 일조한다. 갈라선 부모를 바라보면서 정체성을 재확립하는 소녀의 이야기는 이렇게 자못 비현실적인 조도와 박력 넘치는 활동성으로 앞날을 물음표에 부친다.

몇몇 불굴의 소년·소녀들이 떠오른다. 성장영화 속 유달리 굳센 초상들은 그들의 수난을 관객이 더 깨끗이 감지하게 하고 감정적 충만함으로 이끈다. 보금자리를 지키고 싶은 렌코는 단란한 가족의 이데올로기로 어른들을 다시 회유해보려는 소녀다. 현실은 그런 이상으로부터 날이 갈수록 빠르게 퇴화해, 아버지 켄이치(나카이 기이치)는 새살림을 차리고 곧 렌코의 이복동생도 태어날 참이다. 집에 남은 엄마 나즈나와 렌코의 신경전은 거세지고 아버지를 향한 렌코의 집착도 일탈을 낳는다. 그의 심리적 위기는 과학 실습 시간에 교실에 불을 지를 정도로 위태로운 수준까지 치닫는다. 렌코는 용케 부모를 속여 한때 가족이 머물렀던- 지금은 리조트로 개조된- 료칸이 있는 비와 호수로의 여행도 추진한다. 무너진 집 바깥에서 새로운 낙원을 도모하려 했던 소녀의 시도는 물론 헛수고로 돌아간다. <이사>는 인물이 표출하는 충동과 안간힘이 영화가 지닌 자율적이고 비논리적인 힘과 맞물려 완성된다.

1980년. 데뷔의 순간부터 소마이 신지는 전례없는 스타일의 청춘영화로 각인됐다. 야나기사와 기미오의 만화를 영화화한 <꿈꾸는 열다섯>을 시작으로 이듬해엔 소설 원작의 <세일러복과 기관총>을 내놓는데, <이사>의 렌코가 표출하는 역동은 바로 이 영화 속 야쿠자 보스가 된 여고생이 세일러복 차림으로 기관총을 난사하는 순간으로부터 이어져온 것이다. 소마이 감독은 1982년에 스튜디오 시스템이 쇠퇴하면서 입지가 더욱 좁아진 신진감독의 제작을 부흥하기 위해 구로사와 기요시를 비롯한 닛카쓰 연출부 출신의 동료 감독들과 제작사 디렉터스 컴퍼니를 직접 설립하고, 그가 만든 청소년 영화의 절정이라 할 수 있는 <숀벤 라이더>(1983)를 내놓는다. 롱숏으로 관조되는 액션이 롱테이크로 펼쳐지며, 이 과감한 지속은 율동을 쉬이 예측하기 어려운 카메라워크에 또 한번 힘입는다. 이러한 기술을 더욱 집요하게 발휘한 영화가 1985년 발표한 <태풍 클럽>이다. 태풍이 다가오면서 학교 교실에 갇힌 학생들에게서 어른이 해결해주지 못하는 성장의 부조리가 튀어나온다. 소마이는 근본적인 불안을 죽음에 근접하는 광기와 성적 긴장으로 승화했다. 장마, 그리고 여름 축제 기간을 통과하는 <이사>는 날씨와 장소성에 내재된 긴장감을 점점 고조해가는 전개를 보여준다는 점에서 <태풍 클럽>과 견주어볼 수 있는 작품이다. 영화는 창밖의 사나운 날씨에 정신이 팔린 젊은 아버지의 얼굴에서 시작해 호우와 축제가 점점 거세지는 정동의 한가운데로 나아간다.

성장은, 어른의 긴장을 감각하는 일

아동문학을 원작으로 삼은 <이사>는 10대 주인공 렌코를 묘사하는 통찰과 표현력으로 각광받아왔다. 덧붙여 주목할 점은 1990년대 소마이 신지 영화가 드러내는 점진적 변화로서 어른들의 세계를 구체화해나가는 경향이다. 영화의 시대성은 인물의 부적응으로 곧잘 대변된다. 소마이 영화가 그리는 청소년의 방황에서 배경막으로 존재했던 어른은 그 무능과 무기력함에 의해 사실상 공백처럼 처리되어왔다. 기성세대를 향한 절망감은 <이사>에서도 여전하다. 다만 소마이 신지는 가족 멜로드라마의 역학 아래 어른들을 심리를 한결 생생한 전선까지 끌고 들어온다. 켄이치는 새살림을 차린 집에서도 거울을 보면서 자기 얼굴에 완전히 질려 하는 표정을 짓는가 하면 이삿짐을 제대로 풀려는 의지조차 보여주지 않는다. 문을 걸어잠근 딸에게 화해를 요청하는 장면에서도 난간 밖으로 인형을 건네는 렌코의 손짓을 제때 알아차리지 못한다. 저속촬영으로 조악하게 강조된 이 장면에서 켄이치는 얼빠진 얼굴로 마지막 기회마저 놓쳐버린다. 감독의 초기 야쿠자영화에서 흘러나온 아류 같은 아버지 캐릭터는 도덕 바깥으로 이탈해버린 함량 미달의 가장이자 일찌감치 성장의 경계에서 낙오한 존재다.

<이사>가 은퇴작으로 남은 아이돌 출신의 배우 사쿠라다 준코가 분한 어머니 나즈나는 1990년대 소마이 신지가 보여준 기량의 정점이라 할 수 있는 명장면을 선사한다. 2인분의 삶을 어떻게든 괜찮은 것으로 무마하려는 나즈나의 극기심은 외식 중 만취하거나, 급조된 규칙을 강요하는 방식으로 딸을 괴롭게 한다. 좀처럼 표면화되지 않는, 그러나 폭발 직전인 나즈나의 내적 위기가 돌연 솟아나는 한 장면이 있다. 여름방학 첫날. 완고한 반항의 의미로 가정 내 가출을 시도한 렌코로 인해 한바탕 소요가 일어난다. 집 나간 켄이치까지 이 사건을 무마하기 위해 새 연인과 방문했는데, 영화는 좁은 복도에 들어찬 구성원들의 날 선 감정이 순식간에 폭력적인 몸싸움으로 번지는 순간을 자연주의적인 분위기로 포착해낸다. 각인되는 한 순간은 나즈나가 맨주먹으로 렌코가 걸어잠근 문의 유리창을 깨부술 때다. 가히 비현실적인 힘으로 유리를 깨부수고 난입하는 나즈나의 피 묻은 주먹을 카메라는 일시에 처리한다. 종전까지 미성년인 딸보다 유약한 것처럼 묘사되었지만, 이 대목에서 두명의 어른들이 억누르고 있던 극복 불가한 좌절감은 두려운 폭력성으로 치환된다. 영화평론가 하스미 시게이코는 2001년 작성한 소마이 신지를 향한 추도글(<필름 코멘트>, 2022년 1-2월호)에서 “<이사> 속 소녀의 행동은 우유부단한 부모들보다 훨씬 행동력이 넘치지만 거기에는 반항이라는 프로세스조차 빼앗긴 아이들의 무딘 초조함이 억제된 서스펜스가 되어 팽팽하게 긴장하고 있다”고 서술한 바 있다. “어떤 의미에서는 선혈이 튀는 폭력영화보다 훨씬 폭력적인 작품이라고 말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것이다. 렌코뿐만 아니라 <이사>가 어른들의 안팎을 묘사하는 밀도에 관해서도 그대로 적용해볼 수 있는 말이다.

대단원에 이르러 빗줄기는 소녀와 가족을 호수 인근의 리조트에 데려다놓는다. 이 여정은 곧이어 렌코 혼자 보내는 초현실적인 밤과 호수의 시간으로 이어진다. 소녀가 혼자서 밤의 숲을 헤맨 후 어두운 호수에 도착했을 때 펼쳐지는 것은 어린 날의 환상이다. 축제 가운데, 불타는 용의 형상을 한 돛단배가 호수에 떠 있고 가족이 물속에서 함께 부유한다. “아빠! 엄마! 어디 가는 거야? 나 혼자 두지 마!” 이제 실망에 익숙해진 렌코는 자신을 두고 사라지는 부모를 향해 애처롭게 소리치는 어린 렌코를 바라본다. <산쇼다유>와 같이 비애감을 초월적으로 승화하는 일본영화의 한 전통을 변용한 소마이 신지의 고전주의적 절제를 눈여겨봄 직하고, 동시에 길고 유려한 촬영이 극대화된 이 장면은 소마이 신지의 시그니처로 늘 언급되는 촬영 스타일이 본질적으로 감정적 리얼리즘에 복무하고 있음을 잘 알려준다. 렌코가 자신을 안아주면서 축하를 보내는 <이사>의 엔딩은 성장이 필연적으로 초현실적 안간힘을 동반하는 일임도 상기시킨다. 소녀는 이제 유년의 호수에서 헤엄쳐나와 앞으로 살아나가야 할 육지쪽으로 발을 내딛는다.

소마이 신지의 율동하는 롱테이크

<이사>의 렌코는 좀체 수그러드는 법이 없는 주체로 자신을 둘러싼 복잡다단한 외부의 요청을 향해 외향적인 제스처를 취한다. 덕분에 영화의 율동은 공간과 활발한 상호작용을 이룬다. 소마이 신지 영화는 공간을 탐구하는 방식으로 넓은 화면(롱숏)과 긴 지속 시간(롱테이크)을 확보한 뒤, 인물의 내면을 대변하는 각각의 움직임을 기입한다. 그것은 종횡무진으로 해방을 향해 뛰어노는 움직임(<숀벤 라이더>)일 수도, 태풍 속의 격렬한 춤(<태풍 클럽>)일 수도, 한층 잠잠한 양태로 작은 동네를 누비는 걸음(<물고기 떼>)일 수도 있다. <이사>는 렌코의 작은 몸짓과 대조되는 트럭, 버스, 오토바이가 결합된 장면의 달리기로 이동 촬영을 고양시킨다. 집 밖으로 튀어나가는 충동이면서 다시 돌아오고 싶은 열렬한 욕구 속에서 렌코는 떠나는 아버지의 트럭을 향해 달려가거나, 어머니와 선생을 뒤로한 채 학교를 뛰쳐나와 낯선 버스에 올라탄다. 주인공의 세계는 불안할 정도로 반경을 확장했다가 집의 욕실에 틀어박힌 이미지의 폐쇄성으로 축소되기를 반복한다. <이사>가 특별한 감흥을 형성한다면 이처럼 주인공과 공간이 절묘하게 뒤섞여 서사에 개입하기 때문일 테다. 우리는 유년의 감정적 현실뿐만 아니라 물리적 현실까지도 움켜쥔 양태로 성장의 수고로움에 다가가게 된다.

잊을 수 없는 음악

사에구사 시게아키의 음악은 <이사>가 내포한 변화무쌍함을 말할 때 간과할 수 없는 요소다. 특히 렌코와 켄이치가 오토바이를 타고 달리는 밤거리 장면에서, 감독은 종래와는 극적으로 구별되는 분위기의 음악을 사용함으로써 후반부의 정신적 여정을 이끈다. 가족의 시간이 종결되었음을 알리는 장중한 레퀴엠과도 같은 오케스트라가 반복적으로 쓰이기 시작하는 것이다. 대단원의 초월적인 시퀀스에서 진가를 발휘하는 사에구사의 음악은 현실과 초현실, 기억과 꿈을 넘나들고자 하는 영화의 진의에 담담한 비애를 더한다.

<이사>가 후대에 남긴 것

기법적 혁신과 일관성, 청소년 서사에 내면성을 드넓게 확장한 성취로 수렴되는 소마이 신지의 <이사>는 고레에다 히로카즈, 이와이 슌지, 하마구치 류스케, 소라 네오 등의 감독들에게 잊을 수 없는 자취를 남겼다. 2023년 <악은 존재하지 않는다>로 베니스국제영화제를 찾았던 하마구치 류스케는, <이사>가 최우수복원영화상을 수상하자 축하를 전하면서 소마이 신지가 자국 내의 명성과 달리 일본 바깥에서는 상대적으로 잘 알려지지 않은 것에 아쉬움을 표하기도 했다. 그러나 특정 작가가 얼마나 광범위한 영향력을 미치는가보다 그 영향의 실질적인 힘에 주목한다면, 소마이 신지의 영화는 동시대 창작자들에게 현재형으로 호출되는 전범(典範)으로서 20세기 아시아 작가 중 독보적인 입지를 차지하고 있다. 생명력 넘치는 원신 원컷을 구사하면서 변화무쌍한 세상을 온몸으로 감각하는 청소년들, 성장이 유예된 어른을 담아내고자 하는 창작자들에게 그는 가장 모방하고 싶은 감독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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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제공 찬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