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제였는지는 모르겠다. 수평선 너머로 뭉게구름이 피어나는데, 난 한적한 바닷가 그늘에 누워 그걸 바라보고 있다. 목책 사이로 난흙길을 걸어 매미 소리가 울려 퍼지는 짙푸른 색감의 야트막한 산을 향해 걷다 보면 배부터 꼬리까지 새빨간 고추잠자리가 여기저기 날아다닌다. 시각과 청각의 기억은 비교적 선명한데 필경 햇살이나 기온도 무척 뜨거웠을 당시의 촉각은 되살아나지 않는다. 그래서일까. 헉헉대는 힘겨움보다는 여유롭고 평화로운 분위기만 잔잔히 일렁인다. 짐작건대 이것은 특정한 시공간의 기억은 아닐 것이다. 대략 늦여름에 치우쳐, 내게 ‘전형적으로 남은’, 아니 이런저런 이미지를 끌어모아 하나의 ‘전형으로서 남긴’ 여름 풍광이었을 듯하다. 요컨대 나는 여름을 그렇게 (기분 좋은 모습으로) 기억하고 싶은 것이다. 스케치북 앞면에 그려졌던 어느 서양화가의 풍경화라든가 미야자키 하야오의 작품들이 뒤섞여 윤색해준 부분도 있을 테다. 단적으로 내 이런 기억의 일부는 <미래소년 코난> 등의 이미지는 물론 노랫말과도 중첩된다. 기억은 경험의 반영을 넘어 소망의 발현이기도 하다. 어떤 시점 어떤 맥락에서 그것을 회상해왔는가도 중요한 것 같고, 어떤 이야기 속에 그걸 위치시켜왔던가도 영향을 미치는 듯하다. 기억이란 원초적 체험과 반복적 회상 행위가 뒤섞인, 늘 재생산되는 이미지인 셈이다. 그리하여 내 기억 속 여름은 현재를 부정하게 한다. 언제부턴가 내가 경험하는 여름은 내 기억 속의 여름과는 무척 다르다. 현재를 긍정하지 못하고 과거를 미화하는 낭만주의와 노스탤지어는 이런 식으로 생산되는 법이리라. 그러나 내 기억이 단순히 노스탤지어로 치부될 수만은 없다. 매미의 육성은 극악스러워졌고 고추잠자리는 자취를 감췄다. 온전히 자연과 함께하며 한적하게 여름다움을 만끽할 수 있는 곳도 이제 그리 많지 않다. 세상은 확실히 더 뜨겁고 소란스러워졌으며, 오로지 자연이 허락해준 바람과 물기만으로 여름의 곤란함을 피할 여지는 훨씬 더 좁아졌다. 만들어질 당시부터 이미 노스탤지어적이었던 지브리 애니메이션은 이제 현실과의 연결고리를 거의 상실해버렸다. 과거의 여름을 되찾기 위해 우리는 정말 무언가를 결행하지 않으면 안된다는 것이다. 물론 현재의 여름에 더 긍정적인 측면이 아예 없는 것은 아니다. 예컨대 과거의 여름에는 늘 물난리가 있었고, 개울과 강을 뒤집어놓은 붉은 황토물이 성난 기세로 세상을 휩쓸어가기도 했다. 다행히 지금은 그런 모습이 드물어졌다. 무섭고 사나운 여름 기억보다는 평온하고 사근사근한 여름 기억이 자리를 잡을 수 있었던 건, 부단히 현재로 나아간 사회적 진보 덕분인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반지하 방의 침수 참사, 오송의 물난리, 채수근 상병의 목숨을 앗아간 수해는 그런 긍정성마저도 무색하게 한다. 제대로 추모되었던 바 없기에 여전히 현재진행형의 비극이다. 이런 기억은 잊어서는 안되며, 어떤 식으로든 윤색하고 싶지도 않다. 그래야 우리 기억 속 여름이 그리 죄스럽지 않은 낭만과 노스탤지어 속에 남아 있을 수 있지 않겠는가.